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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마주한 외국인 노동자의 벽

 

유학을 떠나며 개인적으로 가졌던 목표 중 하나는 영국에서 근무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공부로 바쁜 학기 중에 학교 취업지원센터 워크숍에 열심히 참여하며 영문 이력서도 가다듬고, 모의면접에 참가하며 2020년 멋진 영국 취업을 꿈꿨다.

 

한국에서의 경력이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검증 안된 외국인일 뿐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 인턴과 단기 계약직부터 지원했다. 이 공고에 지원한 30대 석사는 나뿐일 것이라며 자조하기도 했다. 나와 처지가 같은 수많은 다른 외국인 학생들이 나처럼 지원서를 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게 높디높은 외국인 노동자의 벽을 느끼고 있던 중,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설상가상이었다. 도대체 영국 회사들은 재택근무를 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채용절차가 세월아 네월아 늘어졌다. 그렇게 엉망진창 꼬여가는 와중, 지원한 사실조차 까먹고 있었던 몇몇 회사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어렵사리 면접 기회가 주어졌다.

 

면접관과 마주하고 봐도 어려운 영어면접을 전화/화상으로 치러야 했다. 한 마디라도 더 잘 들어보겠다고 볼륨을 최대한 키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렵사리 20~30분 면접을 끝내면, 먹먹해진 귀와 왜인지 모를 자책감이 밀려왔다. 공허한 마음을 안고 터벅터벅 산책을 나가는 것이 마음을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숙사 계약이 끝나가던 지난 9월,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영국 취업의 꿈을 붙잡고 지지부진한 취업과정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 하반기 취업시장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것인가. 기숙사 퇴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닿을 듯 닿지 않는 해외 취업의 기회들을 나를 더욱 혼란스럽고 괴롭게 했다. 한국 남자 신입사원 나이의 최저 기준선이 내 나이라는 취업 준비 카페의 '~카더라 글'들에 마음은 점점 더 다급해져갔다.

 

목적과 수단이 도치되는 순간

 

마음 조급한 외국인 취업 준비생이 되어보니 나도 모르게 어리석어졌다. 내가 원하는 길을 찾고자 퇴사하고 유학까지 가 놓고서는, 정작 당장 쓰일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데에 급급해져있었다. 영국 한인마트 유통직 공고를 왜 심각하게 보다가,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말 그대로 현타가 쎄게 밀려왔다.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원래 힘 쏟아 마무리해야 할 논문 작성에 소홀해져갔다. 살다 보면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가 그랬다. 조급한 마음은 내가 어떤 마음과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잊게 만들었다.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을 그때, 형의 한마디가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네가 영국에서 일 못해보고 돌아온다고, 아무도 너를 실패한 유학이라 비난하지 않아. 대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렴.'

 

곰곰이 생각해봤다. 애초에 유학의 목적은 좋은 교육과 원하는 분야의 경력개발이었다. 그때 나는 해외 생활에 경도되어 영국에 취업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기숙사를 나가 런던에 머물며 취업 준비를 하려 구했던 에어비앤비 숙소가 주인의 변덕으로 취소되던 날, 분명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대자연 앞에서 겸손해지자.'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귀국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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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영국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하루 5만 명씩 신규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변종 바이러스로 재차 심각한 봉쇄령(락다운)이 실시됐으며, 여러 국가에서 영국발 입국 거부까지 일어나고 있다.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헛헛했지만, 결과적으로 귀국은 잘한 선택이었다.

 

코시국 취업시장의 천태만상

 

돌아온 고국의 상황은 많은 게 달라져있었다. 요원할 것 같던 원격근무/수업이 돌아가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전화와 카톡만 쓰시던 아버지가 배달앱으로 음식을 주문해 식사를 하고 계신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코시국이다. 오죽하면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를 10년을 앞당겼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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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호서대>

 

한국의 취업시장 역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기업 인사팀도 이 기회를 삼아 여러 새로운 채용 프로세스를 시험하는 중이었다. 인적성 시험이나 면접 같은 기존의 오프라인 전형을 단순히 온라인화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순히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시험에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기법이 적용된 인적성 검사를 시도하는 곳도 있었다. 어떤 곳은 메일 수신 한 시간 안에 엑셀 및 보고서 과제를 수행해서 회신하는 테스트를 치루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지원자를 평가하는 온라인 AI면접이나, 기획안 자료를 화면으로 띄우고 비대면으로 프리젠테이션하는 면접이 이뤄졌다. 2020년 취업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은 줌, 스카이프 등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활용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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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대대적으로 바뀌게 된 채용 프로세스는 당연히 회사에게도, 지원자에게도 혼란스러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영국에서 지원했던 한 국내 회사는 화상면접을 볼 수 있다고 자신했었는데, 막상 1차 실무진 면접이 끝나자 2차 임원면접은 반드시 대면 면접을 해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일정만 조정해주면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타겠다며 열정을 보였지만, 실무진의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 사장님을 노트북 앞에 앉혀서 헤드폰을 씌워드리고 지원자가 어떤지 한번 보시라고 해야하는 너희도 좀 그러겠구나

 

면접날에 맞춰 짐을 기숙사 복도에 다 꺼내놓고, 화면에 보이지도 않을 구석까지 말끔하게 청소해놓고,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텅 빈 방에 앉아, 한국의 어느 인사팀 직원의 사정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려니 쓴웃음이 났다. 아따 쓰다 써.

 

면접자는 회사 면접장에 앉혀놓고, 면접관은 재택에서 화상으로 채점하는 기이한 행태의 회사도 있었다. 면접자는 면접장 오다가 코로나19 걸려도 된다는 것인가. 그 와중에 면접자 얼굴은 보여야 한다며 투명 마스크를 쓰게 했다. 스크린 너머 마스크 쓴 면접관 표정이 궁금했다. 9개 문항 7,000자 넘는 대하소설급 자기소개서를 요구할 때부터 쎄하더니.. 하여간 신비한 회사였다.

 

재난은 낮은 곳부터 차오른다

 

매년 여름만 되면 역대 최고의 기온을 갱신했다는 기상 캐스터의 멘트와, 항상 최악의 불경기라는 연말의 뉴스처럼, 단군이래 최악의 취업난이라는 말은 식상할 만큼 많이 들었다. 취업이 뻥뻥 잘 되어서 젊은 사람들이 신바람 나게 일한다는 뉴스는 들어본 적 있었나.

 

2020년 취업에 관한 뉴스들의 제목은 주로 이랬다.

 

1999년 이후로 최악인 청년실업률, 늘어가는 비경제활동인구, 신규 채용 계획을 잡지 않은 기업들.

 

비단 청년만의 문제도 아니다.

 

 아르바이트로 무급휴직 기간을 버티는 과장. 눈물을 흘리며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 명예퇴직하는 부장.

 

서로의 안녕을 확신할 수 없는 이 시국에 송년회 계획이 단톡방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지난 연말, 우리가 송년회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다.

 

재난은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도처에 있다. 내가 무릎 즈음 차오른 역경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턱밑까지 차오른 위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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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지원했던 곳 중 한 회사의 최종 면접을 마쳤다. 면접에 참여했던 몇몇 회사 중역들이 영국에서 했던 공부에 대해 관심 있게 물어봤고, 소신대로 답했다.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귀국하는 짐을 꾸려 텅 빈 기숙사를 나선 영국에서 그날처럼, 오늘도 초조하고 막막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 나와 같이 면접을 봤던 지원자들도, 그들의 부모님들도, 그들을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누군들 지금 이 시간들이 녹록할까. 서로를 염려하며 버티는 수밖에.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코시국을 정통으로 맞고 귀국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는 30대의 코로나 분투기. 나름 특별하다 생각했지만 꺼내 놓고 보니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다.

 

이번 연재글은 유독 자신이 없었다. 상황이 구리면, 사람도 구려진다 했던가. 바닥을 처박고 있던 자존감에, ‘뻔뻔하고 대차게 X된 당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보라’는 딴지 편집자의 협박도 권유도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넌. 어디서든 잘할 거야.'라고 응원해주신 전 직장 상사, '나도 석사 학위와 나이 때문에 취업 걱정이 넘쳤었어요'라며 비타민 음료를 선물해 준 따뜻한 친구, '네가 놀아봤자 일 년이지.'라며 세상 물정 모르는 믿음을 가져주신 부모님, 그리고 먼저 경험한 선배와 같은 마음으로 조언을 건네주신 딴지일보 독자님들까지. 실상은 연재 덕분에 복에 겨운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

 

어디선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당신의 지인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삶을 치러내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받았던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어쩐지 X된 것 같지만, 그렇다고 꼭 삶이 X 되라는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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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