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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밤중에 스카웃 

 

취준생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다만, 하마터면 다시 회사에 갈 뻔했다.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이 사람 번호가 아직 저장되어 있었네?’ 싶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안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송 기자 오랜만이야!”

 

"아이고~ 편집장님 잘 지내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떻게 지내? 통 안 보이네??”

 

“저 목수 일하면서 지내요. 하하.”

 

“목수? 어울리지 않게 웬 목수? 흠흠, 다른 게 아니라…….”

 

이 사람을 처음 만난 건 7년 전이다. 당시 난 잡지사 기자였다. 이 사람은 시(市)에서 발행하는 정기간행물 편집장이었다.(지금부터 김 편집장이라 칭하겠다.)

 

알아둬서 나쁜 것 없다는 누군가의 소개로 식사 한 번 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면 안부를 묻는 정도? 그 정도의 사이였다. 그나마도 내가 기자로 일했을 때 얘기니까, 무려 5년 만의 통화였다.

 

김 편집장은 3년 전쯤 시(市)에서 나왔다고 했다. 지금은 종합 콘텐츠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한다는 말도.

 

“출판 기획부터 디자인, 영상, 이벤트, 축제, 소셜네트워크서비스까지, 한마디로 종합 콘텐츠미디어 회사야~ 회사 생긴 지는 5년 좀 넘었고, 직원은 50명 정도 있어.”

 

“50명이요? 와~ 우리 지역에 그렇게 큰 콘텐츠 기획사가 있었어요? 몰랐네.”

 

“규모로만 따지면 중부권에서 거의 최대고, 이렇게 종합적으로 콘텐츠를 기획하는 회사로 보자면 지방에서 유일하지.”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세요?”

 

“우리 먹물들은 또 돌려 말하는 거 딱 싫어하니까, 내가 송 기자한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송 기자 스카웃하려고 전화했어!”

 

“예?? 갑자기요?”

 

좀 뜬금없지만, 이 시점에서 잡지사 기자 때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다녔던 잡지사에선 잡지 발행과 더불어 출판 기획 사업도 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사보, 정기간행물, 홍보 브로슈어 등을 만들어주는 거다. 이거저거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오는 때도 있었지만, 그보단 공개 입찰이 많았다. 회사가 살아야 내 월급도 나오는 것이므로 잡지 만드는 틈틈이 제안서 기획하고 프레젠테이션 준비해 입찰에 들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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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세상에나! 내가 그런 일을 재밌어하고, 심지어는 제법 잘하더란 말이다. 회사에서도 그런 나를 어여삐 여겨(?) 나중엔 아예 기획팀장을 맡겼다. 출판 기획 사업을 주로 담당하는 부서였다. 기자 때려치우고도 한동안 ‘인쇄밥’ 먹으며 살았는데, 그것도 다 그 시절 경험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내 아이덴티티를 굳이 따지자면 기자보단 출판 기획자에 가깝고, 김 편집장도 그 맥락에서 스카웃 제안을 해왔던 거다.

 

한 번 끌어줘, 이렇게 부탁할게

 

“송 기자, 그러지 말고 한 번 만나. 만나서 얘기하자고. 회사 구경도 한 번 하고~”

 

“아 예, 그럼 식사나 한번 하시죠. 하하.”

 

김 편집장 만나기 전까진 가벼운 마음이었다. 나도 내 나름의 인생 플랜이 있거니와, 새해를 맞아 마침 목표 몇 가지도 세워놓은 참이었다. 출판 기획자라……. 글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가능성이었다. 그저, 오랜만에 연락해 준 게 반갑고 내 값어치를 인정해 준 거니 그게 고마워 식사나 한 끼 하자는 마음이었다.

 

부사장실에서 맞이한 김 편집장은 작정한 듯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회사를 소개했다.

 

“회사 커지면서 작년에 이 건물을 샀어. 앞으로 이곳에서 자체 콘텐츠 사업도 기획하고, 다양한 문화 사업도 할 거야. 영상 스튜디오도 조성할 거고.”

 

“이야~ 진짜 회사 규모가 엄청나네요.”

 

“송 기자 이 바닥 뜬 게 얼마나 됐다고 했지?”

 

“기자 그만둔 건 5년 전이고, 출판 기획 일은 그 뒤로도 2년 더 했죠.”

 

“요즘은 그때랑 상황이 많이 달라. 지역 회사라고 그 지역 사업만 입찰하는 게 아냐. 다 전국 단위야. 우리도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 곳곳에서 용역 사업을 진행해~ 내년이면 연 매출 100억 넘어서 상장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런 거까지 난 잘 모르겠고, 제일 혹했던 건 카메라 장비실이었다. 영상 사업까지 하는 회사라 그런지 각종 카메라가 어마 무시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아련히 기억난다. 잡지사 다닐 때 한 푼 두 푼 모아 바디 사고, 렌즈 하나씩 사 모았던 기억 말이다. 그때는 사진에도 관심 참 많았는데.

 

“내가 2년 전에 이 회사 왔을 때 직원 15명이었어. 불과 2년 만에 50명으로 늘었어. 폭풍 성장하는 유망 중소기업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어.”

 

“그러게요. 그런 회사에서 굳이 저를 왜?”

 

얘길 들어보니, 실력 좋은 팀장급 출판 기획자 씨가 말랐단다. 특히나 지역 인재는 더 귀하다는 거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데려다 쓰자니 콧대도 높고, 지역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먹물 출신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콘텐츠 사업의 근간은 출판 기획 아니겠나. 근데 출판기획팀 팀장이 계속 공석이야. 그러던 차에 송 기자 소식 들었어. 내가 왜 진작 송 기자 생각을 못 했나 몰라. 송 기자가 한 번 끌어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

 

그럼 너, 월급 한 500만 원 주면 갈 거냐?

 

난, 흔들렸다. 그래, 분명 재밌었다. 며칠씩 밤새워가며 제안서 수정하고, 정장 차려입고 깐깐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발표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입찰에 떨어지면 한동안 울상이었다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또 다른 입찰에 성공했을 땐 사무실을 방방 뛰어다니며 소리 질렀던 기억이 차례로 스쳐 지났다.

 

그래, 분명 재밌을 거다. 그 시절만큼 체력이 받쳐줄진 모르겠으나, 또 그 시절만큼 머리가 돌아가 줄진 모르겠으나, 내 심장은 두근거릴 게 분명했다.

 

그에 반해 현재 내 처지는 어떤가. 당장의 수입은 동년배보다 많지만, 늘 불안정한 게 사실이다. ‘일당쟁이’ 노가다꾼이니 말이다. 특히나 요즘 같은 겨울엔 일거리도 많이 없다. 춥기는 또 왜 이렇게 추운지, 가끔은 월급 좀 덜 받아도 좋으니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능구렁이 같은 김 편집장이 흔들리는 내 눈빛을 포착했다.

 

“목수 돈 많이 버는 거 알아. 내가 까놓고 송 기자 지금 버는 것보다 많이 준다는 약속은 못 해. 비슷한 수준으로는 맞춰줄 수 있어. 그 정도면 업계 최고 대우야. 그런저런 걸 떠나서 송 기자한테 망치질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누구나 천직이라는 게 있는 거야. 내가 송 기자랑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글쎄~ 내가 아는 송 기자는 망치보다 펜이 어울리는 사람이야.”

 

“며칠만 고민할 시간을 주세요.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요.”

 

결과적으로 난, 거절의 뜻을 전했다. 처음엔 현실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김 편집장이 제안한 연봉과 내가 현재 버는 수입을 비교했다. 요즘처럼 일이 많이 없을 땐 오히려 회사 월급이 많을 것도 같았다. 그뿐이랴. 김 편집장은 각종 성과금과 보너스도 약속했다. 퇴직금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느새 난 종이와 펜을 꺼내놓고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나한테 물었다.

 

‘그럼 너, 월급 한 500만 원 주면 갈 거냐? 아니, 얼마를 주면 갈 수 있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를 달리게 만들었던 건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기자 일 시작한 것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였고, 그렇게 시작한 기자 일을 5년 만에 때려치운 것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아서였다.

 

내 인생에서 후회하는 선택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서울에 있는 잡지사 취재팀장으로 갔던 거다. 당시엔 더 큰 바닥에서 한번 놀아보자는 각오였던 거 같다. 막상 올라가 보니, 재미없었다. ‘서울의 잘나가는 잡지사 취재팀장’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동력을 주지 못했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번지르르 한데,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영 거북했다. 결국 난, 1년 만에 다시 내려왔다.

 

노가다 일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알친구 녀석은 거듭, 너의 그 재능을 썩히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그동안 쌓았던 커리어가 아깝지 않으냐고도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목수 일을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너무 즐겁고 재밌어서 지금 난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얘기해줬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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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걱정은 낼 모레 모두들 미쳐 보게

 

내가 떠드는 말이 누군가에겐 한가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살겠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나도 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그리하여 책임져야 할 게 많으면 많아질수록, 마냥 ‘꼴리는 대로’만 살 수는 없다는 걸.

 

그치만 말이다.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룬대서, 내일 두 배로 행복해지는 건 아닐 게다. 우리가 진짜로 미뤄야 하는 건 오늘의 행복이 아니라, 내일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 모를 일에 대한 걱정 아닐까.

 

그래서 난, 더 열심히 ‘꼴리는 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로 하고 싶은 일 마구마구 하면서 말이다. 싸이가 부른 <챔피언> 가사처럼, “내일 걱정은 낼모레” 아니, 내일모레 글피로 미뤄놓고.

 

“질러 볼까 더 크게 / 뛰어올라 더 높게 / 내일 걱정은 낼모레 / 모두들 미쳐 보게♪”

 

잠시 들떠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구나 싶었다. 열심히 끄적이던 종이를 박박 찢어버렸다. 다시 나에게 물었다. 2년 전 친구에게 했던 대답, 여전히 유효하냐고. 그러니까, ‘네놈’, 지금 행복하냔 말이다.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 인마!! 행복하다!! 공부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길래 그런 삶은 불행한 삶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해가지고 힘들어죽겠는 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정말로 그렇다. 이제 목수 3년 차인데, 여전히 하루하루가 즐겁다. 하면 할수록 알게 되고, 알면 알수록 보이게 되고, 보이니까 자꾸 묻게 된다. 그래서 이따금 “넌 아직도 그걸 모르냐?”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럼 좀 어떠랴. 그렇게 자꾸 묻고 물어 머리가 아닌 몸에 익히는 과정들이 가슴 벅차게 기쁜걸. 2,500년 전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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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제안 주셨는데 거절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고민을 깊게 했는데, 조금은 더 망치질하면서 살까 합니다. 이런 말씀드리게 되어서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또 좋은 인연이 닿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가정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김 편집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다시 회사로 돌아갈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