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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각궁은 화살의 힘은 교자궁보다 약간 낫지만 오래 불을 지피지 않으면 상하기가 가장 쉽습니다. 군기를 유치(留置)하기에는 교자궁이 나을 것 같기에 신이 호남을 맡고 있을 때에 군기 중에서 흑각궁으로 상하고 망가진 것은 모두 교자궁으로 대체하자고 청하였으나 묘당에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흑각궁이 으뜸이고 교자궁이 다음이라면 어찌 흑각궁을 폐하겠는가? 그러나 교자궁도 산성(山城)에서는 쓸 수 있을 것이니 중신이 그 편리 여부(與否)에 대하여 진달하는 것이 좋겠다."

 

- 비변사등록 영조 1년(1725년) 12월 8일의 기록 중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은 조선 후기 최고 의결기구인 비변사가 처리한 일들을 정리한 기록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 기록물 정도로 보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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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이 비변사등록에도 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725년의 일이다.

 

이미 정묘호란 당시 조선의 주력 투사병기는 조총이 됐다. 국가차원에서 조총의 양산을 독촉하고 있었고, 실제로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덕분에 가격도 떨어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자궁과 흑각궁 중 뭐가 낫냐고 토론을 하고 있다.

 

흑각궁과 교자궁에 대해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 최고의 활은 흑각궁이다. 이 흑각궁을 만드는데 물소뿔, 산뽕나무, 참나무, 쇠심줄, 어교(민어부레로 만든 풀), 화피(산벚나무 껍질), 소가죽, 삼베, 면실 등이 들어가는데, 다른 건 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핵심적인 물소뿔은 구할 수 없었다.

 

왜 물소뿔이 필요할까? 우선 활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활이란 건 활대의 탄력으로 화살을 날리는 도구고, 활의 위력은 탄성이 결정짓는다. 처음에야 다들 나무로 만들었지만, 더 큰 탄성을 얻기 위해 동물 뼈나 다른 재료를 활용한 합성궁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각궁은 합성궁의 대표주자가 된다.

 

조선의 물소뿔 수입처는 명나라였는데, 주로 동남아시아나 남중국에서 서식하는 물소의 뿔을 팔았다. 문제는 당시 명나라의 반응인데, 한민족이 그 활로 자신들을 괴롭혔던 역사를 잘 알기에 물소뿔을 전략물자로 분류하고 1회 거래 시 최대 50부 정도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을 두었다. 이러다 보니 성종 시절에는 왕이 직접 나서서 밀수를 지시하고, 밀수하다 이게 적발돼 조정에서 어떤 핑계를 댈까 회의를 할 지경이 된다.

 

세조 시절에는 흑각궁을 연습용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전략병기로 분류, 치장하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덜컥 일본에서 물소 한쌍을 얻었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키워서 성종시절엔 약 70마리까지 숫자를 늘렸는데, 기후적응에 실패해서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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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각궁

 

결국 조선은 물소뿔을 대신 한우뿔로 향각궁(鄕角弓), 사슴뿔로 녹각궁(鹿角弓) 등등 대체품을 만들지만, 각각 뚜렷한 약점이 있었다. 우선 향각궁은 한우 뿔이 너무 짧아서 소 2마리를 잡아야 활을 만들 수 있었고, 녹각궁은 만들기가 힘들었다. 활을 만들 정도로 뿔이 큰 사슴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죽으나 사나 물소뿔이 필요한 거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교자궁(交子弓)이란 말이 나온다. 이게 새로 나온 활이라고 보긴 어렵고, 향각궁의 개량형이라 볼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조 1년, 그러니까 1725년의 기록 비변사등록에 이 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거다. 영조는 흑각궁이 조선의 무기 중에서 으뜸이라며 추켜세운다. 조총이 분명 있음에도 화살의 중요성을 주장한 거다. 물론, 단순한 인사치레라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 때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조선군 무기고에 활이 계속 있었다는 거다. 그것도 넘쳐나도록.

 

외국에선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후 활은 서서히 퇴조하다가 어느 순간 전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총이 등장한 이후 활은 뒤로 밀려난 거다. 그런데, 한국은 갑오경장 때까지 활을 주요무기로 활용했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총의 경우와 달리 활은 약점이 너무 뚜렷하다. 우선 훈련하는 게 어렵고, 제약조건이 너무 많다. 바람과 같은 기후의 영향도 많이 받고(조총의 경우는 비오는 날 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건 활도 어느 정도 제약을 받는다), 관리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활의 경우는 총에 비해 관리가 어렵다. 이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인정한 부분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직전에 내놓은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보면,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진다.”

 

란 말이 나온다. 이게 바로 각궁의 단점이다. 각궁은 재료 자체가 모두 동식물성이고, 이걸 천연 접착제인 민어부레를 중탕해 녹인 아교로 붙인다. 이 아교가 습기를 먹으면 쉽게 풀어졌다. 활이 해체되지 않더라도 탄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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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는 각궁을 쓰기 애매하다. 다 떠나서 평시에도 관리하기가 꽤 난망하다. 합성궁은 결국은 재료들을 접착제로 붙여서 만드는 것이기에 이 접착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이 때문에 각궁은 건조하고 따뜻한 곳에서 조심스럽게 보관해야 한다. 보통은 섭씨 30도 내외의 온도에서 보관하는데, 활 보관용 점화장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하곤 했다.

 

각궁은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이걸 만드는 것도, 보관하는 것도, 심지어 훈련하는 것도 힘든 무기가 된 거다.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게, 각궁 한 자루 만드는 데 보통 3천 번 이상 사람 손이 간다. 제작 기간도 1년 정도 걸린다. 활 한 자루 만드는데 1년이 통째로 들어가는 건 아니고, 재료 준비부터 활을 만들고, 이걸 사람의 몸에 맞도록 하는 활풀이까지 1년이다. 실제 제작 기간은 4개월. 보통 활을 만들기 가장 적당한 때가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다. 부레풀을 붙이기에 습도가 딱 알맞은 때라 그렇다)

 

그런데 이 무기를 조선은 19세기 말, 갑오경장 때까지 당당히 현역 무기로 분류해 놓고, 상당량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활쏘기에 대한 집착을 넘어 '맹신'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어쩌면 올림픽 시즌 때마다 양궁 대표팀이 금메달을 싹 쓸어오는 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조상들이 이 정도로 활에 미쳐있었는데, 그 피가 어디로 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