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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선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웅산 수찌 국가 고문을 비롯해 대통령, 국회의원 등이 감금되었고, 내각 부처장들이 대거 교체되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 ‘2008년도 헌법 조항 417과 418’을 근거로 앞으로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얀마 군부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 미얀마를 좌지우지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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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다 다음 날인 지난 2월 2일, 미얀마 만달레이 시내에 나타난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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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웅산 수찌(왼쪽)와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최고사령관(오른쪽)이 같이 있는 모습. / 이미지 출처-<AP 뉴시스>

 

2011년 군부정권에서 준민간정부로 변화가 생겼고, 2015년에 아웅산 수찌의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잡았지만, 표면적인 권력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 권력은 군부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미얀마 군부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고 유지했는가를 알아보려 한다. 

 

군부 정권은 1962년 네 윈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부터 시작되었다.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1948년 독립을 하였는데, 순탄하게 독립을 준비하던 와중 미얀마를 하나로 뭉쳐주던 ‘민족의 영웅’ 아웅 산 장군이 독립을 6개월 남기고 암살당한다. 이때부터 미얀마의 혼란은 시작된다.

 

아웅 산 장군의 죽임 이후, 미얀마의 독립건국 세력(AFPFL)은 쪼개지고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내전이 발발하는 등 혼란스런 나날이 지속된다. 독립이 된 지 10년도 더 지난 1962년까지 혼란스런 정국이 지속되자 네 윈 장군은 땃마도(미얀마군의 공식 명칭)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네 윈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1974년 버마사회주의연방(미얀마 옛 이름)의 헌법을 공표하며 일당-의회 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네 윈 하에 미얀마의 경제는 망가졌고,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마이너스 성장률까지 기록하게 된다(자세한 내용은 1편 링크).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한 최대 규모 민주항쟁 

 

"Status quo to keep things uncomplicated and to stay employed"

복잡하지 않은 것을 유지하고 고용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현상   

 

미얀마 속담이다. 버마식 사회주의 시절 공무원들이 어떠한 변화도 주려 하지 않은 채 현실에만 안주했던 모습을 꼬집는 말이다. 그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했던 군부 정권은 계획했던 만큼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미얀마는 1988년을 맞이하게 된다. 1988년은 미얀마 국민이 군부 정권에 저항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에 대한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한 시기로 미얀마 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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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민주 항쟁. 

 

1988년 8월 8일에 전국적 대규모로 일어나 ‘8888 항쟁’이라 불리는 이 민주화 운동은 사소한 사건에서 출발하였다. 그해 3월 랑군공업대학(현재의 양곤기술대학교) 근처의 한 찻집에서 대학생들끼리 사소한 말다툼을 벌인 것에서 시작되었다. 

 

다툼의 당사자 중 한 명이 아버지가 정부 관리라는 이유로 처벌로부터 면죄부를 받게 되자 랑군공대 학생들은 불공정한 판단에 대해 항의 및 시위를 시작했고, 이에 지역 주민들까지 합류하여 시위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그러다 시위 진압을 하던 경찰력에 의해 학생 두 명이 사망하게 되었고, 차별적 대우와 당시 군부 정권의 실정에 분노하던 시민들이 합쳐 군부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들불처럼 퍼지게 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군부 정권은 그해 7월 의회와 당원대회를 비상 소집해 대응책을 논의했다. 당시 정권의 수장이었던 네 윈은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했다. 

 

 

항쟁 국면에서 바뀌는 군부 지도자들과 대응 방식 

 

그는 ‘1974년도 헌법’에 명시된 일당제에 관한 조항을 수정해서 다당제 선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본인 및 고위 지도부는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명목으로 대통령직 및 당 수장직에서 사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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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하지만, 네 윈의 뜻과는 달리 군부 내부의 의견은 정치 개혁보다는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초점이 모아졌고, 다당제 선거 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국민은 총파업 및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고, 그 결과로 8월 8일 양곤에만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하지만 네 윈의 뒤를 이어 대통령과 당 의장직으로 임명된 세인 륀(Sein Lwin)은 시위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 

 

군부는 당시 사망자 수가 수십 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여러 정보를 취합해볼 때 8월 8일을 기점으로 단 며칠 동안의 사망자 수만 최소 수백 명에서 최대 3,000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랑군의 학살자(Butcher of Rangoon)”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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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민주 항쟁.

 

폭력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더욱 확산되어 세인 륀은 사퇴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마웅 마웅(Maung Maung)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커지는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다당제 선거 계획을 발표하는 등 몇 가지 유화책을 내놓았다. 마웅 마웅은 1988년 8월 24일, ‘1974년도 헌법’의 개정 계획을 발표하며 다당제 선거를 치를 수도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이미 헌법 개정안이 정권 내부에서 불발된 이후 민주 세력은 “현 정권은 퇴진하고 과도 정부(interim government)를 수립한 후 바로 다당제 선거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이젠 현 정권에서 헌법 개정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일단 현 정권 인사들은 무조건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 후에 제로 베이스에서 다당제 선거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아웅산 수찌는 8월 29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담화문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만약 한 달 전에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 투표가 제안되었다면, 국민은 감사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헌법 개정 논의는 이미 오래된 얘기에 불과하다. 다당제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며, 헌법 개정은 불필요한 과정이다.”

 

민주 항쟁은 계속되었고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분위기를 보이며 미얀마가 드디어 민주화되는 듯했으나 희망의 불씨는 이내 곧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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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배우 양자경이 아웅산 수찌 역으로 출연한 <더 레이디>의 한 장면.

 

 

신군부 등장, 새로운 쿠데타

 

당시의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군부 내 다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1988년 9월 18일 쿠데타를 일으킨 쏘마웅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은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tate Law and Order Restoration Council, SLORC)를 세우고 권력을 장악했다. 

 

1962년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군부 또한 네 윈 집권 시절 공포한 ‘1974년도 사회주의 헌법’을 폐지하는 등 이전 정치, 사회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SLORC(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이 정권을 장악하기 전, 군부 집권당 BSPP(버마사회주의계획당)은 다당제 선거를 치르겠다고 공표했었고, 뒤이은 신군부 세력 SLORC도 나름의 계산을 숨긴 채 그 계획을 따르기로 한다. 그래서 1990년 5월 27일, 약 40여 년 만에 다당제에 입각한 총선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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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총선 모습.

 

이 선거에서 민주항쟁의 열기를 그대로 반영하듯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NLD가 총 492석 중 392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게 된다. 군인들은 정치 비관여 원칙을 내세우며 총선에 직접 출마하진 않았다. BSPP(버마사회주의계획당)를 전신으로 한 신군부 정당인 국민통합당(National Unity Party, NUP) 소속으로 후보를 내긴 했지만, 단 10석밖에 얻지 못했다.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한 신군부의 꼼수

 

선거는 무사히 치러졌다. 하지만 그 후속 조치를 두고 민주 세력과 군부 정권은 이견이 있었다. 

 

당시 신군부 SLORC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74년도 사회주의 헌법’을 폐지했기 때문에 새 헌법이 필요했다. 민주 세력은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새 의회가 헌법 개정기구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 정권은 처음에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태도였지만, 헌법 개정에 있어서만큼은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향후 의회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게 되면 군부의 이익에 맞는 유리한 조항들을 헌법에 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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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1인자 쏘마웅 장군 (대통령 재임 1988-1992)

 

NLD가 총선에서 압승했음에도 그 후로 약 2년 동안 별다른 개혁이 이뤄지지 못한 채 이같은 대립이 지속되었다. 새 헌법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총선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92년도 4월이나 되어서나 합법적으로 등록된 7개의 정당을 초청한 협조 회의(coordination meeting)를 개최하며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의가 시작된 뒤에도 여전히 군부(SLORC)는 신헌법 제정을 위해선 의회가 아닌 별도의 헌법 개정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NLD도 1990년 총선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NLD는 이미 1990년 총선 후에 간디 홀 선언문(Gandhi Hall Declaration)을 발표하며, 미얀마 독립 당시 의회 민주주의 바탕이 된 1947년도 헌법에 근거한 임시 헌법안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NLD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군부의 주장대로 협조 회의를 통해 향후 국민 회의(National Convention)라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새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논의하기로 합의한다. 

 

 

민주 세력이 총선에 압승했지만, 권력은 여전히 군부의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신군부 정권은 국민 회의 관련 기구들을 설치하고 회의 개최를 준비하여 해를 넘긴 1993년 1월이 되어서야 총 8개 분야의 대표단이 초청되며 국민 회의는 시작되었다. 

 

8개 분야의 대표단은 정당, 의원 대표(1990년도 총선), 민족 대표(national races), 농민 대표(peasants), 노동자 대표(workers), 지식인 및 전문가(intellectuals and technocrats), 공무원(state service personnel), 기타(other invitee)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대표단의 비율을 살펴보게 되면 신군부 정권이 지명한 대표단의 비율이 훨씬 높아 국민 회의는 국민들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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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쉐 (대통령 재임 1992-2011)

 

총 702명의 대표단 중 1990년도 총선에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은 의원 수는 107명으로 그 비율이 15%도 채 되지 않았으며, 정당 대표단 49명을 포함하더라도 약 20%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당시 선거에서 392명이라는 의원을 배출한 NLD는 국민 회의에 단 90명밖에 참석시킬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다른 대표단들은 국민 회의 소집 기구(Convening Commission for the National Convention)에서 선정하여 초청했는데, 그 과정과 절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신군부 정권이 임의로 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 회의는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약 4년간 개회와 폐회를 반복하며 열렸다. 하지만, 의사 결정 과정은 자유로운 토론이 아닌 국민 회의 소집 기구 뜻대로 진행되어 대표단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는 적었다, 

 

소집 기구에서 헌법의 각 조항에 대한 기본 원칙을 발표하면, 그 내용을 가지고 각 대표단에서 논의하고 그것을 다시 전체 회의에서 보고하는 복잡한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이런 대표단 구성의 불균형 문제, 권위적인 회의 진행 및 의사 결정 구조 등 그 절차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었다. 1995년 11월 아웅산 수찌도 이런 부분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군부는 이걸 빌미로 삼아 NLD를 더 이상 국민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문기홍 (시드니대학교, 정부 및 국제관계학과 박사과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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