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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석열 ‘고발사주’가 박지원의 정치공작?

 

윤석열 전 검찰총장 재직시절 벌어진 검찰의 ‘고발사주’ 사건이 정국을 강타하면서, 잠시 잊혀졌던 박지원 국정원장이 화려하게 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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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사주’ 사건이란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현 국민의힘 대통령 예비후보자가 검찰조직을 사유화하여 정치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다. 손준성 대검수사정보정책관(현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이 당시 미래통합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웅 전 검사에게 최강욱 현 열린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 등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장모와 부인의 비리혐의를 밝히고, 공론화한 정치인과 언론인들 여럿을 고발하는 고발장을 건넸고, 이 중 일부는 실제로 고발이 이뤄졌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가 이 검찰의 ‘고발사주’ 사건의 사실상 컨트롤 타워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는 손 전 수사정보정책관이 김웅 의원에게 고발장을 건넨 시점이 지난해 제21대 국회의원 총선 직전이었으며, 손 전 수사정보정책관이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총장의 복심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대검의 수사정보정책관은 검찰청 사무기구 규정에 따른 편제상 대검 차장을 보좌하면서 수사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담당하는 자리지만, 실제로는 검찰총장의 직접 지시를 이행하는 자리다. 수사정보, 범죄정보 수집을 명분으로 사실상 정치권, 언론계, 노동계 등의 동향파악이나 광범위한 정보활동을 하면서 이 내용을 검찰총장에게 직보한다. 그래서 대검의 수사정보정책관은 통상 검찰총장이 믿고 쓸 만한 핵심 측근들로만 기용한다.

 

이러한 ‘고발사주’ 의혹은 신생 인터넷 언론사인 <뉴스버스>의 보도로 드러나게 되었고, 국민의힘과 윤석열 예비후보 측에서는 이와 같은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윤 후보의 ‘적반하장’식 변명은 가관도 아니었다. ‘이런 고발을 하려면 메이저 언론사에서 하라!’든가, 이와 같은 사건을 ‘<뉴스버스> 기자에게 알려준 공익신고자 조성은(전 미래통합당 선대위 부위원장)씨가 박지원 국정원장과 친하고, 8월 10일 경에 박 원장과 만나 밥을 먹었다’, ‘박지원의 정치공작’이라며 날뛰었다.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는 속담은 이런 때 쓰는 거다. 참고로 조성은씨는 지난해 총선 직전 미래통합당 선대위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김웅 의원이 손 검사로부터 건네받은 고발장을 텔레그램으로 전달받아 <뉴스버스> 기자에게 알리고, 보도되면서 정치권의 파장을 낳자, 직접 신분과 얼굴을 드러낸 인물이다. 미래통합당 선대위 부위원장 이전엔 새정치민주연합 청년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해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 민주평화당 창당준비위원회 부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박지원 원장과 정치적 인연을 쌓아왔다.

 

 

2. 박지원은 누구인가 

 

윤석열 캠프와 국민의힘은 ‘고발사주’ 사건을 박지원 원장의 ‘공작’이라며 되치기를 시도했으나 어설펐다. 이에 박 원장은 공개적으로 경고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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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전 총장은 나와도 술 많이 마셨다. 그래서 개인적인 신뢰가 있어서 나는 한 번도 윤 전 총장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윤 전 총장의 수사 무마 개입 의혹이 있는)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 문제에 대해서도 자료를 다 가지고 있다. 잠자는 호랑이 꼬리를 밟지 마라”

 

박 원장은 지난해 7월 제35대 국정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앞으로 다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고, SNS도 끊겠다’고 선언했고, 국정원 개혁방안을 발표할 때나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어설픈 되치기를 시도했던 윤 캠프도, 국민의힘도 그의 전투력을 잠시 잊었던 듯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박지원 국정원장의 이력과 함께 무쌍이라 불리는 그의 전투력을 한번 되짚어 보기로 하자.

 

그는 1970년대 럭키금성 상사의 샐러리맨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디뎠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11월 주식회사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에 임명되었다. 사업에 크게 성공해 어지간한 부를 이루었고, 이때 이룬 부로 뉴욕 맨해튼에 빌딩을 여러채 샀으나, 정치활동을 하면서 거의 다 팔았다고 한다. 이 빌딩들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으면 트럼프 못지 않은 부자가 됐을 거다(기사링크).

 

박 원장이 미국에서 사업하던 시절, 정치적 망명 생활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건 그의 생활비를 대면서다. 그 인연이 정치인 박지원 인생의 큰 시초라고 할 수 있고,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하자, 미국 영주권을 정리하고 귀국해 김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와 신당 창당 등을 도왔다. 그 인연으로 1992년 민주당의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본격적인 정치인 박지원의 시대는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부터다.

 

김 전 대통령 시절 문화부장관과 비서실장을 역임, 명실상부 국민의정부의 핵심 실세였고, 김 전 대통령의 복심이었다. 문화정책과 관련한 유명한 명언이 이때 나온다.

 

“(문화에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지원’이가 문화부장관이 된 것이다.”

 

정권에 비판적이라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지원에서 배제했던 모 정권의 모 문화부장관들과는 참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문화정책이 자유로워지고, 그동안 문화계에서 꺼렸던 일본 영화 등 세계영화, 창작물의 수입이 다양하게 이뤄진다. 한국 영화 산업에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문화부장관 재임 시절 업적과 평가에서 박지원 원장은 이창동 감독과 함께 늘 상위권에 오르기도 한다.

 

 

3. 6‧15 남북 첫 정상회담의 숨은 주역

 

박 원장이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던 2000년. 역사적인 남북 첫 정상회담이었던 6‧15 회담을 성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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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2000년 초 현대 정몽헌 회장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에 이은 남북 당사자간 정당회담 성사를 위한 물밑 협상이 진행되었고, 첫 장소는 싱가포르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 특사의 대화 상대로 통일부장관이 아닌 문화부장관이었던 그를 보낸다. 김 전 대통령에 따르면 통일부장관은 노출 가능성이 있고, 북쪽에서도 대통령의 측근을 원하기 때문에 박지원을 보냈다고 한다.

 

박지원 특유의 친화력과 능수능란한 회담력으로, 남‧북 실무자들의 첫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후 재차 만남과 대화를 통해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는 평가다. 남북정성회담 성사시키는 데 성공한 것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는데 박 원장이 동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과 이후 언론에 밝힌 후일담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 있다. (박 원장이 당시 국정원장과 국정원 대북담당자들과 일을 함께 하면서 양질의 정보인맥을 구축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정상회담을 진행하면서도 고비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수산 참배’ 문제다. 금수산 태양궁전은 김일성의 시신이 보존된 장소인데, 북측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이곳을 참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에 우리 정상이 가서 참배를 하면 ‘김일성 찬양‧고무’, ‘빨갱이’로 공격받기 딱 좋았다. 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며 현직 대통령이 남한에 오는 순간 바로 고발당하는 것을 넘어 탄핵까지 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북측의 요구에 당시 장관이었던 박지원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참배하지 마십시오. 제가 대신 금수산 참배하고 징역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후일담은 아주 유명하다. 결국, 김정일 위원장이 금수산 참배 요구를 철회하는 것으로 별 탈 없이 지날 수 있었다.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의 성공과 남북대화의 물꼬를 튼 이 회담은 대통령의 의지도 중요했지만, 실무자들의 이행 능력,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협상 능력도 중요했다. 그들이 받쳐주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회담이었으며, 박지원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4. 대북송금특검 구속 후 재기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니다. 김대중 정부 말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그는 전정권에 대한 사정의 칼을 제일 먼저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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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 불법 대북송금이 있었다'는 이유로 2003년 당시 한나라당은 집요하게 공격했다. 정확하게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4억 5000만 달러의 대북 송금을 주도하고(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산업은행이 현대그룹에 4000억 원을 대출하도록 압력을 행사한(직권남용) 혐의다. 또 현대그룹으로부터 “대북사업을 도와달라”는 청탁과 함께 150억 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결국 특검수사까지 받게 되었고, 송두환 특검팀에 의해 구속된다.

 

1년 정도 복역하다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2004년 대법원에서 주요혐의로 거론된 ‘현대비자금 159억 원 수수혐의’에 대해서는 무죄취지의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2006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과 추징금 1억 원을 선고받아 법정구속 되었다.

 

2007년 12월 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은 박 원장을 특별사면하였다. 대북송금특검으로 구속까지 되었던 박 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좋지 않은 감정을 이후에도 종종 드러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후 집필한 저서에 이와 관련된 자세한 사정이 나와있다. 특검을 수용할 밖에 없었던 노 전 대통령 나름의 사정과 고민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서 집요한 공격이 들어오고 있었고, 특검을 받지 않으면 검찰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특검은 딱 정해진 혐의에 대해서만 수사가 가능하고, 시간적 제약이 있지만, 검찰로 수사가 넘어가면 사안과 시간의 제약이 없어 수사대상과 수사혐의가 훨씬 광범해지기 때문에 까딱하다간 전정권에 발을 담근 모든 인사를 상대로 수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어떤 사안을 헤집을지 몰라 비교적 후폭풍과 피해가 크지 않을 특검을 선택한 것이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하지 않으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남북정상회담이 ‘대통령의 통치행위’였음을 천명해야 했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는 고도의 정치행위로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판례도 있고 명분도 되니, 노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에게 이러한 의사를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노 대통령은 특검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남북정상회담으로 옥고를 치른 박 원장은 200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고 복권된다. 이듬해 치러지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를 지역구로 하여 출마한다. 정권을 내주고 이때 총선에서도 대패가 예견되었던 민주당 공천심위위원회가 박지원 원장의 공천 배제 결정을 내리자,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강행한다.

 

DJ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을 DJ도 묵인하는 것으로 사실상 허락했고, 박 원장은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6‧15 정상회담을 상징하는 의원회관 615호를 차지하고 앉아 정치활동을 이어 간다. 그해 8월 정세균 대표체제 하에서 민주당 복당도 승인되었다.

 

 

5. MB정부 첫 검찰총장 인사 천성관 낙마

 

대통령 권력의 핵심은 인사고, 인사의 끝판왕은 4대 권력기관장 임명이다. 4대 권력기관 중에서도 검찰총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임명하면 비로소 대통령이 지닌 권력을 체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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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에서

출처: <오마이뉴스>
 

MB는 첫 검찰총장으로 천성관을 임명했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 막혀 결국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천성관의 비리와 사치스런 생활이 모두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2009년 7월이면 MB정부 초반이었고, 국회에는 한나라당 의석만 178석, 친박연대 14석, 자유선진당이 18석이었다. 범보수여권이 200석을 넘겼고, 민주당 의석은 83석에 불과했지만, MB정부에서 처음 임명한 검찰총장이 인사청문회를 넘지 못하고 낙마했다. 이때 탄생한 게 법사위 박남매(박지원, 박영선)다. 물론, 정보의 출처는 모두 박지원이었다.

 

당시 청문위원이자 의원이었던 박지원 원장은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 하루 전날 보좌진에게 한뭉치 서류를 건네면서 “잘 정리해 놓으라”는 한마디만 남겼다고 한다. 그 서류를 열어본 보좌진들도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검찰, 항공사, 면세점, 백화점, 교육계와의 인맥이 아니면 도저히 쉽게 얻을 수도, 알 수도 없는 자료들이었다. 덕분에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자와 가족들의 빤쓰까지도 외제명품이었다(CK가 명품인지는 알 수 없느나)는 사실까지 전국민이 알게 되었다.

 

이 활약은 이후 그가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당선과 원내대표로서 보여준 미친 정치력의 서막에 불과하다.

 

 

6. 제18대 국회 제3기 민주당 원내대표 당선 화려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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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2010년 5월, 징검다리도 한참 징검다리로 박지원 원장(당시 의원)이 민주당 원내대표로 재선된다. 공천 결과에 불복해 당을 탈당하고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 후 다시 복귀한 민주당에서, 결선투표 없이 1차에서 60%를 득표했다. 

 

85석(83석이었던 민주당으로 탈당했던 인사들이 하나둘 복당해 어느덧 85석이 된다)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라고는 하지만, 이 선거가 그리 쉽지 않다. 이 기간 동안 박 원장의 선거운동을 접한 민주당 의원들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매일 아침을 박지원의 모닝콜로 시작해, 박지원의 안녕 인사로 끝났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을 상대하면서 쓸 수 있는 협상 전략이 별로 없었다. 의석수 차이가 커서 쓸 수 있는 선택지도 별로 없었다. MB정부와 한나라당은 출범하자마자 172석을 앞세워 미디어법을 비롯한 소위 MB 4대악법을 밀어붙였고, 매년 연말 예산안 통과 때마다 몸싸움 국회를 치러야만 했다. 민주당으로선 장외 투쟁 내지는 국회본회의장 점거 등 물리력 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치러진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백전노장인 김무성 의원이 당선되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인 김무성의 카운터파트너로서 박지원도 만만치 않은 공격과 방어력을 보여준다. 김무성 원내대표가 박지원 원장을 향해 공공연하게 “여우야~”라고 불렀을 정도다.

 

2010년 연말 예산안처리를 앞두고 국회에서 예결위장이나 본회의장에서 물리적으로 대치하고 있을 때, 박지원 당시 원내대표가 김무성 원내대표에게 전화 한 통을 해 점거를 풀었다. 한나라당이 끝내 힘으로 밀어붙여 통과시킨 법안들이 다수 있으나, 박 원내대표 시절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MB정부와 거대여당인 한나라당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이재훈 지식경제부장관 후보자 등 MB정부 인사들을 9명이나 낙마시키며 ‘청문회 저승사자’라고 불렸다.

 

 

7. 민주당 친노, 문재인 대표도 적이었을 땐 힘들었다!

 

‘우리 편일 땐 좋지만, 적으로 돌리면 가장 무서운 사람!’

 

정치권에서는 박 원장을 두고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 편일 때와 적일 때의 차이를 가장 처절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는 친노 인사들이 민주당의 주류로 등장한다. 이해찬, 한명숙, 이광재, 안희정, 문재인 등이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검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구속까지 됐던 박 원장이 친노인사들과 사이가 좋을 리는 없었다.

 

당대표 경선이나 선거 공천권을 가지고 권력투쟁에 들어갈 때, 민주당의 정통지지층이 포진한 호남에 지역기반을 두고 있는 의원들과 친노 인사 간의 반목과 다툼이 극심했다(과연 같은 당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호남 토호나 다름없었던 박 원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딱 한 번 친노인사들과 연대했던 적이 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 당대표, 원내대표 경선 때였다. 박 원장은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대표를 노렸다. 친노의 좌장이자 새롭게 신설된 지역구인 세종시에서 초대 의원으로 당선돼 다시 국회에 입성한 이해찬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이해찬 의원이 먼저 박지원 원장에게 전화해 원내대표를 하고 내가 당대표를 하자고 제안, '이-박연대'가 이뤄진다. 어렵긴 하지만 박지원 원장은 원내대표 선거에서 유인태 의원을 7표 차로 물리치고 당선된다. 이해찬 의원도 7월 전당대회에서 만만치 않던 상대인 김한길 의원을 꺾고 당대표에 오른다.

 

2012년 12월 치러진 선거에서 문재인 민주당 당시 후보가 박근혜에게 패하고, 정권탈환에 실패한 후 민주당은 호남세력들과 친노세력들의 갈등은 계속된다. 이는 2015년 1월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극에 달한다. 박근혜 정권의 연이은 국정실패와 참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2014년 지방동시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비대위체제를 거쳐 새로운 지도부를 꾸려야 했다. 2015년 당대표 경선은 2016년 치러질 국회의원 총선거의 공천권까지 걸린 문제라 박지원을 필두로 하는 호남세력과 문재인을 필두로 하는 친노세력의 싸움이 가히 볼만 했었다.

 

박지원 원장은 문재인 대표체제에 반기를 들고, 공천권 지분을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해 안철수 대표와 함께 국민의당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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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민주당으로 합쳐지기 위한 탈당과 신당창당이었다는 사실은 2021년 4월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박영선 전 장관의 고백을 통해서 밝혀진다. 박 전 장관은 <월말 김어준>에 출연해 이렇게 밝혔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박지원을 비롯한 호남쪽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박영선도, 이언주 의원과 함께 탈당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런데 아니다. 박지원 의원이 당시 전화해 본인은 오늘 민주당을 떠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민주당에 남으라고 했다. 그래야 박남매는 다시 만난다”

 

권력투쟁의 전략이었는지, 이 전략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아직 평가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좀 더 지켜보며 역사에 맡기자.

 

2016년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돌풍을 일으켜 비례대표, 지역구 합산해 39석을 차지한다. 20대 국회에선 국민의당이 캐스팅보트를 쥔 막강한 교섭단체가 되는데,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 국정조사, 박영수 특검임명,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 공수처법 및 선거법 통과 당시 국민의당 원내대표였던 박 원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은 모두가 실시간으로 지켜본 역사일 게다.

 

 

8. ‘문모닝’에서 ‘우리 문재인 대통령’으로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문모닝’으로 하루를 열만큼 문재인 대통령에게 각을 세웠던 박 원장은,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 원내대표를 역임하면서 제3의 정당으로 꽤 의미 있는 활약을 보여줬다. 한 언론인이자, 정치인도 ‘늙어가는 건 어쩔 수 없어도, 낡아지지 않을 수는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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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저녁 만찬 자리에 문 대통령이 당시 국민의당 의원이던 박지원 원장을 초대했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으로서 초대한 것이다. 대북송금특검으로 징역살이했던 당사자가 18년 전 정상회담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딸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여의도 정치인들과 박지원을 DJ의 복심으로 알고 있는 많은 국민들은 ‘과연 역사의 승자는 누구일까?’라고 자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문모닝’으로 하루를 열던 당시 박 의원이 몸 담고 있던 국민의당은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내분에 휩싸인다.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 합당하자 이에 반발한 호남지역구 의원들이 국민의당을 탈당, 민주평화당을 창당한다. 당시 박 의원도 함께한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의 민심은 문재인 정부의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코로나19 극복에 정부 여당에 힘을 몰아주자는 데로 기울었다. 호남지역마저 더불어민주당이 석권하고, 목포의 박지원마저,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후보에게 지역구를 내주게 된다.

 

2008년 국회에 다시 입성한 이후 12년 동안 금요일에 목포에 내려가 주말 내 지역구 활동을 하고, 월요일에 서울에 올라와 의정활동을 하는 ‘금귀월래’를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져왔다. 하지만 거기서 낙선했고, 78세 박지원의 정치인 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다.

 

모교인 단국대에 명예교수로 임명돼 강의도 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해 자유롭고, 여유 있는 삶을 살며 남은 여생을 마감하는가 싶던 박지원 인생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여주는 계기가 생긴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이 될 국정원장에 임명된 것이다.

 

박지원을 두고 대중들도 의심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충정과 햇볕정책에 대한 신봉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서거 때까지 매일 아침 사저로 문안 인사를 갔던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자신의 꿈은 ‘초대 평양대사’라고 여러 번 천명했을 정도로, 햇볕정책, 남북관계, 통일에 대한 열망이 깊다.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징역살이까지 했다. 그때 녹내장이 심해져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부자연스러운 한쪽 눈을 갖게 되었다.

 

9명을 낙마시키며 인사청문회 청문위원으로 활동했던 그가 검증대에 서게 되었다.

 

“낼모레 팔십이시죠? 국정원장 하기에 너무 연로하신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낼모레 칠십아홉인데요”라고 하며 청문회를 통과한다. 이쯤되면 그동안 이를 갈았다던 국민의힘 의원들의 공격을 받아치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태극권의 고수마냥 공격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흘리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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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해주신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사하다, 국정원장으로서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어떤 정치적 발언도 삼가겠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충성하겠다”

 

이런 글을 남기며 평생의 염원인 평양대사를 향해 잘 가고 있는 그의 앞길에 압정을 마구 뿌려대며 누군가 선전포고를 한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국민의힘이다.  

 

그렇다. 박 원장이 대선판에 소환됐다. 잠자는 호랑이 꼬리를 자꾸만 밟아대니 기지개를 안 펼 수 있나. 이쪽은 박지원의 이력과 전투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어째 저쪽은 감을 잃은 것 같기도 해 말리고 싶다. 헌데 해보겠다는데 어쩌랴. 

 

자, 팝콘 사오자. 

 

 

 

 

□ 참고자료

- 김대중, 김대중자서전, 도서출판 삼인, 2010

- 노무현, 진보의 미래, 돌베게, 2008

- 다수의 언론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