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

 

z7fchjzp-1336615300.jpg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히틀러에게 관심이 있는 이라면, <나의 투쟁>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히틀러 본인도 껄끄러워했던 본인의 책 <나의 투쟁>. (히틀러는 자신이 나중에 독일 총리 자리에까지 오를 줄 알았다면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책에 기술된 히틀러의 유년시절, 청소년 시절은 조지프 캠밸이 말한 영웅서사의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의 유년기를 살펴보자. 그는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도 비범함을 보여주고 있다. 열한 살도 되기 전에 자신이 민족주의자가 됐다는 걸 확인했고, 폭압적인 아버지 밑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으며, 가난과 빈곤 속에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나와 있다.

 

① “아버지는 아들도 자기처럼 관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관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12세 때 아버지는 나의 그림공부를 금지해 버렸다. 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림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게으름을 부리자, 학교성적은 극과 극을 달렸다. 그러나 지리, 세계사 두 과목만은 반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② “내가 일찍이 역사에 관해서 한 사람의 교사를 얻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이후 나의 전생애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린츠 실업학교 당시 나의 스승이던 레오폴트 푀슈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에게는 하나의 역사관이 이상적 상태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에서 과거를 해명하고, 과거에서 현재에 대한 인과관계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알았기에, 당시 우리가 궁금해 하던 시사문제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해 주었다. 우리의 작은 국가주의적 열광이 그에게는 교육수단이 되었다. 그런 교사 밑에서 독일역사를 공부한 내가, 독일민족의 운명을 무참히 짓밟은 지배왕국에 대해 어찌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③ “12세 때 비로소 극장에서 <빌헬름 텔>을 보았다. 그리고 두어 달 후 <로엔그린>을 보았는데, 그것이 내가 최초로 본 오페라로, 단번에 매료되었다. 13세 때 아버지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내게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키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그러던 차에 나는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어머니에게 장차 내가 사무실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했다. 덕분에 나는 1년 동안 실업학교를 휴학해야만 했고, 마침내 어머니는 미술학교로 옮기는 것을 승낙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④ “약간의 유산과 고아연금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었으므로 나는 빵을 얻기 위해 일해야만 했다. 옷가지만 든 트렁크와 마음속의 굳은 의지를 간직하고 나는 빈으로 떠났다.”

 

⑤ “어머니가 병상에 있을 때 나는 미술학교 시험을 치르러 빈으로 갔다. 입학시험 합격을 확신했기에, 불합격 통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즉시 학장을 찾아가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나의 그림을 보고 화가로서는 부적합하지만 건축분야에는 재능이 있어 보인다면서 건축과를 지망하라고 권했다.”

 

⑥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세 번째로 빈에 갔는데, 이번에는 5년을 머물렀고, 빈곤과 비참함을 겪었다. 노동자로, 3류 화가로 빵을 얻기 위해 애썼다. 굶주림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유일한 내 친구였고, 모든 일에 충실히 뒤따라오는 존재였다. 책을 사거나 오페라 극장에 다녀온 다음이면 여러 날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그 무렵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식비를 아껴 오페라를 구경하는 것을 제외하면 일과 책만이 나의 유일한 삶이었다. 닥치는 대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몇 년 동안은 오늘날까지도 내게 실력을 공급하는 지식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시절에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했다.”

 

- <나의 투쟁> 中 발췌

 

<나의 투쟁>에 나오는 그의 주장을 100% 모두 믿을 순 없다. 아니, 믿어선 안 된다. 영웅이 되기 위해 그의 청소년기는 미화됐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죽은 후 히틀러는 자기 세상을 만났다. 언제나 히틀러 편을 들어준 어머니를 설득해 16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밑바닥 삶을 산 듯이 말했지만, 히틀러는 세무서장이었던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에 어머니의 지원, 고모들의 재산까지 있었다.

 

밑바닥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거기에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엽서 판매수익도 더해야 한다. 한 마디로 그는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거다. 

 

상식적으로 바그너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밑바닥 삶이 가능하겠는가? 그 유명한 미술학교에서의 탈락 에피소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유일한 재능인 ‘예술’로 인정욕구를 채우려 했던 히틀러에게 미술학교 탈락은 좌절 그 자체였을 거다. 이건 젊은 시절 겪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성장과정이다. 그리고 이 짧은 순간 자신에게 그림은 취미이고, 건축이 자기 인생의 운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건축학교에 들어가려면 실업학교 졸업장이 필요한데, 히틀러는 실업학교를 자퇴했었다. 인생이 멈춰선 거다. 이 역시도 청춘의 한 과정일 뿐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젊은이들은 자기 인생의 ‘무엇’을 찾기 위해 탐색하고 좌절하지 않는가? 특이한 건 없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건 <나의 투쟁>에서는 빈에서의 생활이 그에게 반유대주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줬다는 거다. 

 

“빈에서의 유대인들이 냉혈한이고 수치를 모르며 성매매를 배후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시절 히틀러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유대인 자선단체에 감사를 표시했고, 유대인 친구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의 어머니를 치료했던 에두라르드 블로흐(Eduard Bloch) 박사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유대인이었던 블로흐는 ‘빈자의 의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블로흐는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를 진찰했다.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다. 블로흐는 곧장 치료에 들어갔지만,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 결국 클라라는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세간의 사람들은 이때의 기억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을 증오하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히틀러는 블로흐에게, 

 

“당신한테 영원히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가 훗날 보여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생각하면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ㅎㅌㄹ.jpg

 

 

2.

 

고통스런 빈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히틀러는 뮌헨으로 떠나게 된다. 이곳에서 3년 간 미술과 건축을 공부할 작정이었다. 

 

그러던 1914년 1월 20일 오스트리아에서 군복무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는 입영을 연기하기 위한 탄원서를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군대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반년이 지나 히틀러는 자원입대 청원서를 내면서까지 군대에 입대한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재미난 건 그는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한 게 아니라 바이마르 왕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16연대에 배속된 히틀러는 최선을 다해 군생활에 임했다. 동료들을 모아놓고 술과 담배의 해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는 신뢰받는 동료였다. 위기시 맨 앞에 나섰고, 부상당한 동료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위험한 임무라도 뒤로 빠지지 않았다. 약간 이상했지만, 괜찮은 동료였다. 

 

그의 동료들은 히틀러를,

 

“약간 특이하지만, 믿을만한 친구.”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

“어울리는 게 약간 서투르지만 괜찮은 친구.”

 

라고 평가했다. 연락병으로 위험한 임무에 앞장 서야 했으며, 수차례 목숨이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그는 16연대에서 인정받는 병사로 생활했다.

 

그러던 히틀러는 솜 전투에서 포탄 파편을 맞았다. 첫 번째 부상이었다. 그는 부상이 호전되자 다시 16연대로 복귀하는데, 이때 장교와 병사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취사병들이 그의 복귀를 환영하기 위해 빵과 잼, 케이크로 이루어진 카르토펠푸퍼(Kartoffelpuffer : 독일식 감자전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를 특별식단을 내놓을 정도였다. 

 

히틀러는 꽤 괜찮은 동료로 인정받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집을 나온 직후부터 군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히틀러는 특별한 ‘소속’이 없었다. 즉,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느낄만한 경험이 없었다. 군대는 히틀러에게 소속감과 유대감을 줬다. 고향을 떠난 이후 그에게 처음으로 가족과 같은 소속감과 일체감을 심어준 게 군대였다. 히틀러는 군복무 자체를 좋아했고, 열성을 다해 근무했다. 

 

1280px-Bundesarchiv_Bild_146-1974-082-44,_Adolf_Hitler_im_Ersten_Weltkrieg_retouched.jpg

16 바이에른 예비 보병 연대의

군대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가장 오른쪽)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철십자상 2급, 군 십자 훈장 3급, 뛰어난 용감성을 인정하는 연대증서, 그리고 군복무 메달 3급과 함께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 이 훈장을 상신한 건 유대인 장교였던 후고 구트만 중위였다.  전쟁은 히틀러에게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안식처는 곧 사라지게 된다. 

 

 

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