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어째서 다른 음료가 아닌 커피가, 숭늉의 위치를 차지했는가? 그 첫 번째 요인은, 커피가 한국 사회와 한국인이 동경하는 어떤 느낌을 부여하는 음료였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커피는 다른 음료와 차별화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술 등과 달리 강력한 각성작용을 가진 음료라는 것과 대개 ‘커피하우스’에서 남들과 함께 마신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들로 인해, 프랑스의 카페에서 부르주아들이 모여 나누었던 이야기는 ‘계몽사상’이 되었고, 이들의 사상과 회합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타났다. 이후 서구 문명에서 카페는 이성과 계몽의 상징이 되었고, 서구 문명의 가장 빛나는 시절인 ‘벨 에포크(Belle Époque)’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벨 에포크’시대를 상징하는 그림들의 태반이 카페를 그려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sdfsd.JPG

마네의 <카페에서>

 

234927695_10158411981603601_3184636857856506224_n.jpg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춤>

 

yugjghj.JPG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이러한 이유에서 한국에 처음 커피가 들어올 때, 커피는 이성적이고 희망찬 서구 문명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본업은 천문학자이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비롯한 조선의 개화파들과 깊은 교류를 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5년 조선 고위 관리의 초대를 받아 당시 유행하던 커피를 ‘식후에’ 마셨다고 기록했다. 관료였던 윤치호는 1886년 가배관(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셨다고 기록했고,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우리 숭늉 마시듯 한다’라고 기록했다. 즉 당시 커피는 ‘짧은 머리’, ‘서양식 복식’과 함께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것이다.

 

이렇듯 커피가 도입되는 시점부터, 커피는 서구 문화의 빛나는 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양주를 팔고 ‘웨트레스(웨이트리스)’가 술을 서빙하는 곳을 ‘카페’라 불렀다.

 

229760650_10158411984023601_5939060173239292087_n.jpg

 ‘돈ㅅ벌이하는 카페의 웨트레쓰 설움’. 1928. 3. 4. 조선일보

 

반면 실제로 커피를 파는 ‘다방’은 서구의 ‘살롱’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예술과 문화를 논하는 장소였다. ‘장한몽’의 감독 이경손, ‘날개’의 작가 이상 모두 다방을 운영했던 이들이다. 당시 다방을 운영했던 유명한 예술인 중에는, 우리 세대에는 고자의 대명사쯤으로 기억되는 ‘심영’도 있다

 

sdfsdfasdff.JPG

영원히 고통받는 심영 : 내가 대명사라니..

 

231586098_10158411986213601_1648974955223703692_n.jpg

심영이 운영하던 ‘멕시코 다방’

 

“다방 손님은 주로 화가, 기자 그리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할 일 없이 차나 마시며 소일하는 유한청년들이었고 그들은 ‘육색(肉色)’ 스톡킹으로 싼 가늘고 긴 각선미의 신여성들을 바라보며 황홀해했다”

 

- 1934년 5월 1일자 잡지 〈삼천리〉, ‘끽다점평판기’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된다. 당시 한국인들이 커피를 접할 수 있는 통로는 미군의 C-레이션 속에 있는 커피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었다. 즉 일제강점기까지 커피가 빛나는 이성적 서구 문화를 상징했다면, 해방 이후 커피는 풍요와 발전의 미국 문화를 상징했다.

 

지금보다야 상대적으로 비쌌지만,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힘든 현실을 잊고 풍요로운 미국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커피 가격은 싼 것이었다.

 

이에 공식 수입된 커피의 10배 넘는 양이 미군부대 PX를 통해 흘러나왔다. 커피의 밀수 자체보다도, 미국산으로 분장한 일제 커피가 수입되는 것에 분개하는 그때의 기사들을 보면, 당시 미제 커피가 한국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30993499_10158411987778601_2326931607069701908_n.jpg

‘응시하자 밀수의 정체, 상표만 미영으로 화장 일본제 사치품’ 1950. 1. 10. 동아일보 기사

 

이러한 50년대의 혼란을 좌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516 이후 커피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한국인의 커피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76년에는 ‘꽁피’라 하여 미군부대에서 나온 커피, 담배꽁초, 계란 껍질 등을 같이 넣고 끓인 커피를 판 사장이 적발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다. 이는 커피의 신맛을 피하고 ‘태운 맛’을 즐기는 한국인들의 취향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210847847_10158411988063601_7071968908432409106_n.jpg

 

경제가 발전하고 중산층이 형성된 1980년대 이후에도 커피는 계속 풍요와 이성, 여유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미국의 커피 광고가 주로 가족의 시간, 휴식, 노동을 도와주는 역할 등을 떠올리는 광고를 했다면,

 

228885148_10158411988823601_8407512678486456309_n.jpg

 

한국의 커피 광고는 대개 (풍요에서 비롯된) 여유를 가진, 성공한 남성의 모습을 그려 냈다.

 

229877860_10158411989028601_1710708488083719352_n.jpg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부터 최근까지, 저 멀리 존재하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선진국의 모습을 그리며 달려가는 사회였다. 커피는 풍요로운 선진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커피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한국인은 ‘1세계 시민’이 된 성냥팔이 소녀의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커피가 숭늉을 대체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막상 대한민국의 커피 패권을 장악한 것은, '풍요롭고 수준 높은 선진국'의 모습과 약간은 거리 있는 어떤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발명품,

 

믹스커피다.



<계속>

 

 

편집자 주 

 

본 글은 저자와의 긴밀하고 내밀한 협의 하에

원글에 약간의 수정, 보완을 거쳐 올라갑니다. 

원본과 댓글의 생생한 맛을 함께 감상하고 싶으신 분,

저자의 괴상망측한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시라.

 

변호사 박기태의 페이스북(링크)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