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공고해지는 홍콩인 정체성
지역은 ‘집단기억’을 공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이 나의 기억일 수 있듯이, 집단을 생성하는 기억도 있다. ‘집단기억’은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홍콩판 문화대혁명(67폭동)은 홍콩이라는 지역성을 매우 분명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집단의식’이라는 것도 있다.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식을 말한다. 홍콩의 문화대혁명(67폭동)에서 좌파들이 보여준 폭력은 홍콩인들의 ‘반중 의식’과 ‘반공 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70년대에는 홍콩의 지하철 운행 등 공공서비스와 복지 수준이 크게 제고되었다. ‘가난한 중국’과 강력하게 대비되는 ‘잘사는 홍콩’이라는 ‘우월의식’이 더해졌다.
문화적인 유전자 즉 밈(Meme)도 홍콩 정체성의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소룡(李小龍)과 성룡(成龍)으로 대표되는 홍콩 영화의 전성기는, 1980년대 오우삼(吳宇森),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영화까지 이어졌다. 1974년은 인기로 볼 때 광둥어 팝송(Canton Pop)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광둥어 노래는 대륙과 대만을 강타했다.
1970년대 홍콩 대중문화의 발전은 문화적으로도 홍콩인들에게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정체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2. (장국영)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양조위, 왕페이)
한편 1970년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느슨해진 중국의 분위기를 틈타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인구가 홍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흐름은 홍콩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불안감은 ‘우리’의 배타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상대를 차별할수록 내 정체성은 뚜렷해지는 법이다.
1972년까지는 홍콩에서 출생하는 사람에게만 영주권이 주어졌다. 1972년부터는 연속 7년 이상을 거주하면 영구 거주민 자격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부터는 홍콩에 일단 도착하면 거주할 수 있는 법을 폐지하고, 불법 입국자는 체포해서 돌려보냈다.
1980년대 후반 내가 홍콩에 도착해보니 경찰들은 행인들에게 수시로 신분증을 요구했다. 행색이 초라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할 경우 경찰은 어김없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 역시 씻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나가면 어김없이 신분을 확인받았다. 홍콩이라는 꿈을 쫓아 대륙에서 숨어들어온 ‘타자’들을 골라내기 위한 홍콩의 노력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나는 종업원과 손님들의 ‘애매한’ 눈길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볼 때 광둥어를 하지 못하고 보통화를 사용하는 나는 ‘폭력적’이고도 ‘가난한’ 중국에서 막 도착한 이방인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중국에서 홍콩으로 막 이민을 온 아찬(阿燦) 같은 ‘타자’였다.
(아찬은 1979년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중국에서 막 넘어온 촌티 나는 캐릭터로 한꺼번에 햄버거 30개를 먹기도 했다. 이후 아찬은 대륙에서 건너온 ‘신이민자’를 폄하해서 부르는 호칭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홍콩인들에게 타자가 되고 있었다)
1979년 홍콩의 TV 드라마 People in the Net(망 속의 사람들)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 정체성 공고화를 가속화하다
홍콩은 ‘애매한’ 공간이라 표현된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긴 말인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더욱더 애매한 위치가 되었다. 경계선 너머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중국-홍콩 사이에는 국경선이 생겼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국에서는 살벌한 정치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조국’을 바라보고 있는 홍콩인들에게 정치적인 안정과 자유를 누리는 홍콩의 소중함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홍콩 정부는 ‘제3의 길’로 나아갔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명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홍콩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통치의 안정을 확보하는 길이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면서 서구의 대표적인 가치인 자유와 법치를 추구하는 방향이었다.
홍콩의 정체성은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술했던 여러 상황이 발생하며 중국은 (홍콩인들에게) 타자로서 ‘강력하게’ 인식되었고, 그즈음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한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이란 당시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했던 공익광고로서 각종 캠페인을 통해 홍콩인들에게 홍콩은 우리 집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한 운동이다)
그렇게 형성된 홍콩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 중 하나는 ‘제3의 공간’이다. 홍콩이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공간인 데다, 정치적으로 중국이나 대만 편향도 아니면서,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나아가서 홍콩 내에도 광범위한 ‘제3지대’가 존재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철저한 중립 말이다. ‘제3지대’는 당신의 사상이나 이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선택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혼종’과 ‘변경’이라는 기호로 대표되는 후식민 담론이 유행할 때, 홍콩은 그 실제 ‘보기’로서 빠지지 않았다. 중국과 영국, 즉 동양과 서양의 변방으로써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독특한 홍콩의 문화가 만들어진 이론적 배경이다.
학자들은 영국의 통치 방식이 홍콩이라는 ‘동양의 진주’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중국인이 통치하는 양안(대륙, 대만)보다 선진적이고 근대화된 공간이라는 말이다. 서구적인 합리성으로 따져볼 때,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곳이(었)다.
다음 편에선 중국과 홍콩의 ‘일국양제(一國兩制)’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