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고 있다. 23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18~49세의 코로나 백신 1차 접종률은 73.8%. 예약된 백신이 순조롭게 접종되면 10월에 무난히 80%대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백신만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백신 접종이 '일상으로의 회복'에 가장 중요한 준비임을 의심하는 자는 이제 거의 없다.
이쯤 해서 꼭 한번 짚어봐야 할 것이 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확하고 신속하게 재난 정보를 제공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도 언론의 기본 사명 중 하나이다. 언론의 재난보도에는 방재와 복구 기능도 있음을 유념해 피해의 확산을 방지하고 피해자와 피해지역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 재난 보도는 사회적 혼란이나 불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재난 수습에 지장을 주거나 피해자의 명예나 사생활 등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참사를 계기로 우리 언론인은 이런 의지를 담아 재난보도준칙을 제정하고 이를 성실하게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한국기자협회 <재난보도준칙>
세월호의 아이들이 남겨준 준칙을, 대한민국 언론은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가. 그들의 다짐은 과연 진심이었나.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재난에서 그들의 보도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 백신만큼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아직 재난 속에 있기 때문이다.
투쟁의 서막 : 멍청하고 악랄하게
시계를 1년 전으로 돌려보자. 이런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당시는 코로나19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하는 이른 바 트윈데믹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질병관리청이 독감 백신 접종 독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였다.
(기사링크)
상식이란 걸 가동해보자. 독감백신은 오랜 시간 안전성과 효능을 검증받아온 현대의학의 인플루엔자 대처법이다.
2020년의 독감백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비한 물질 같은 건가? 질병관리청의 급조 발명품이라도 되나? 어릴 때 엄마가 돈가스 사준다고 해서 따라나갔다가 난데없이 소아과에 끌려가 주사를 얻어맞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기억은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의 기억인가?
백만스물두번정도 양보를 해보자. 코로나19의 확산과 그와 증상이 혼돈되는 독감 유행을 앞두고 불안한 시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좀 더 면밀한 정책을 촉구하는 언론들의 갸륵한 마음이 1g 정도 행간에 있었다고 치자.
그럼 적어도,
"인플루엔자 백신의 심각한 부작용, 특히 사망과 관련된 사례는 수많은 백신 연구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재훈 가천대 예방의학과 교수
이런 전문가 의견을 앞뒤로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것은 보도준칙을 떠나서 글쓰기 기본의 문제다. 기사를 쓴 기자들은 대학 때 '국어작문'같은 교양필수강의는 고스톱 쳐서 학점 딴 건가.
(기사링크)
기자들의 투쟁의도는 '주어'에서 드러난다. 백신과 사망의 인과관계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 상황이므로 관련한 사람을 '백신 접종 후 사망 신고자'로 칭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쏟아지는 기사에서 그들은 '독감백신 사망자' 혹은 '독감백신 접종 사망자'라는 주어로 단정 짓고 시작한다. 공포감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언론들의 자가발전으로 증폭된 독감백신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는 백신 접종을 더디게 만들었다. 노년층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노출 위험이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코로나19 방역에 걸림돌이 되었다.
독감백신 논란의 정점은, 백신을 맞고 숨졌다는 고교생의 몸에서 부검 결과 치사량의 아질산나트륨이 발견되고 본인이 직접 구매하고 수령한 정황이 밝혀졌을 때였다.
이 과정에서 아주경제는 언론사에 길이 빛날 족적을 하나 남긴다. 같은 기사의 헤드라인이 시간대 별로 3단 변태하는 포켓몬적 진화를 이뤄낸 것이다.
<"누가 독감 백신에 이런 걸 넣었나"> (1단)
<백신 접종 후 사망 고교생 사인 논란> (2단)
<백신 접종 후 사망한 고교생의 몸에서 검출된 '화학물질'> (최종 진화)
K언론의 백신 투쟁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멍청하고 악랄하게.
태세 전환 : 플라나리아의 투쟁
2020년 연말,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었다. 투쟁의 전선이 변경되었다. 이번엔 백신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칼춤을 추기 시작한다.
당시는 백신의 필요성은 절실하나 개발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백신을 미리 확보하는 것은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큰 상황이었다.
코로나를 세계 최상위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확진자가 급속도로 증가해 백신 이외에는 별다른 방역 전략이 없었던 다른 나라와 사정이 달랐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급하게 만들어진 백신의 안전성의 추이를 지켜보며 그 효과를 검증해 볼 카드가 있었던 것이다.
그치만 K언론한텐 그딴거 뭐 중요하지 않았다.
자 다시 한번, 백만 스물 세번 양보를 해보자. K언론의 이러한 난리굿이, 급하게 만들어져 효과가 검증되기 전이더라도,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백신을 맞았어야 했다는 어떤 나름의 강경한 주장이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그 주장의 논리는 이미 시작부터 박살나있다. 오랫동안 안전성이 검증되어온 독감백신은 사람 잡는다고 딱 한 달 전에 게거품을 물어놓고, 그 누구도 맞아본 적 없는 신종 바이러스 백신은 왜 인류 최초로 맞게 하지 않았는지 분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플라나리아급 자아분열이다.
여기서 이들의 코로나19 재난보도 준칙은 명확해졌다.
"모르겠고, 정부가 뭘 하든 까고 본다."
언론이 정부 정책을 까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론이 논리를 갖추지 않은 채 뭔가를 까는 건 뭐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그런갑다 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이 플라나리아들의 투쟁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들은 국가적 재난인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해야 할 위기'가 아니라, '정쟁의 대상'으로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싸구려 백신의 진실 : 사라진 옥스포드
2020년 12월. 정부가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했다. K언론은 다시 한번 자아분열을 시도한다. 이번엔 갑자기 백신 효능을 신중하게 따져야 한다고 한다. 일단 맞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광광댄지 한 달 만이다.
Oxford Astra zenaca 백신(AZD1222).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정확한 명칭이다. 세계 최초로 백신을 개발한 종두법의 제너에 의해 만들어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소가 아스트라제네카사와 공동 연구를 통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이다.
다른 백신이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mRNA 방식으로 만들어진데 비해, AZ백신은 기존에 백신을 만들던 방법으로 생산되었다. 효과가 떨어질 수는 있으나 안전성은 다른 백신보다 높다. 하지만 K언론은 인과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AZ백신의 부작용 사례를 연일 보도하며 다른 백신에 비해 AZ백신이 위험하다는 근거 없는 메시지를 뿌린다.
(기사링크)
여기에 AZ백신이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사실도 중요한 타격 지점으로 활용했다. 싸구려 백신이니 효과가 떨어지고 부작용이 많다는 뉘앙스를 만들어내기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멍청하거나 혹은 악랄한 비판이다.
AZ 백신 후보 물질을 개발한 옥스포드 제너 연구소가 다국적 제약사들과 공동 개발 협약을 맺을 때 내건 조건이 있었다.
"코로나19 백신 판매로 이윤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AZ백신이 상대적으로 싼 이유는, 위험하고 효능이 떨어지는 백신이어서가 아니라, 연구자들의 숭고한 윤리의식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K언론의 활약 덕에, 제너연구소의 인류애는 싸구려로 퇴색되었다. 백신에 대한 불신과 공포는 다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렇게, K언론은 코로나 방역에 또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악랄하고 성실하게.
하지만 이들의 대활약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고오급 백신이라 그토록 안달내던 화이자가 공급되자, 이번엔 백신무용론과 함께 '돌파감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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