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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선판에서 재밌는 사건이 있었다. 윤석열이 세 번 연속으로 국민의힘 대선후보 토론회에 손바닥에 王(임금 왕) 자를 쓰고 토론에 임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라디오 진행자 김종배 씨는 ‘방역으로 손을 씻는데, 왜 손바닥에 王자가 계속 남아있냐’ 물었고,  윤석열 캠프 대변인으로 있는 김용남 전 의원은 “주로 손가락 위주로 씻은 것 같다.”고 답했다. 

 

서울신문 윤석열.JPG

3, 4, 5차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자 토론회

 

 

무속 비방을 실행한 윤석열

 

나는 평소 무속에 일정한 관심이 있었다. 내림굿 받는 것도 구경가고 그랬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다른 믿음의 체계가 그렇듯 무속도 원리적 사고는 보여지는 것보다 단순하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다. 윤석열이 손바닥에 王자를 쓰고 나타난 것과 같은 행위를 일컬어 비방(秘方)이라고 한다. 비방이란 본래 무당이 대가를 받고 나서야, 값을 치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기복 비결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방(숨겨진 방법)인 것이다. 옛부터 무속인도 직업인이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값어치가 나가는 방법은 비방으로 묶어둘 수밖에 없다. 

 

비방은 지역마다 다르고 계보마다 다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각의 무당마다 다르다. 제대로 된 진퉁 강신무나 세습무는 모두 자신만의 비방 체계가 있다. 그러나 복잡해 보이는 수많은 방책들이 애초에 비방이라는 점에서는 단순한 것이다.  

 

비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영희를 좋아하는데, 영희는 철수와 결혼 약속까지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는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사술이라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간다.

 

강호동.JPG

 

이 경우 아마 대화는 이런 식이 된다. 

 

 

무당 : 거참 속 좁아가지고 큰일 날 양반이구먼...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은 팔자가 맞물리기 때문이 아니면 전생에 못다 푼 연을 이생에 풀기 위해 그리된 거요. 서로 붙을 운명을 어째서 억지로 떼놓겠다 한단 말이오! 당장 꺼지시오!

 

나 : 돈은 충분히 들고 왔습니다. 빳빳한 현찰로다가, 것두 5만 원권으로다가 베개 대신 베고 주무셔도 될 만큼 두툼하게... 

 

무당 : 생각해보니 손님에게 당장 꺼지라고 한 건 내가 잘못한 것 같소. 헌데... 하늘이 내린 인연을 인간이 끊으면 그 업은 고스란히 끊은 인간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소.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슷한 체계다)

 

손님이 살아서든 죽어서든 아니면 내세에서든, 그 업은 반드시 되돌려받게 되어 있소. 어떤 업을 지어서 어떻게 되돌려받을지는 모르는 것이오. 그래도 남의 인연에 칼질을 해야겠소?

 

나 : 제가 마 영희를 옴팡 행복하게 해 주고, 철수도 괜찮은 놈이니 좋은 각시 만나서 평생 잘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도 좀 알려주십쇼! 제가 효과 없다고 내 돈 내놓으라고 쳐들어오고 뭐 그러는 진상 아닙니다! 제가 아주 깔끔한 놈이에요!

 

무당 : 허허 이러면 안 되는데... 내 그럼 신어머니께 내려받은 비방 하나를 전할 터이니 실수 없이 실행해 볼 마음이 있으실까?

 

나 : 제가 군대에서도 인간 FM이었습니다요!

 

무당 : 오케이. 그럼 인쟈 내가 비방을 알려줄 것인 게 실수가 있어서는 알 될 것이여. 자 돈을 주고 달라 하든 훔치든 아무튼 철수가 신던 신발을 얻도록 해. 신발 한 짝에 철수의 이름과 사주팔자를 써서 넣고 다른 쪽에는 영희의 이름과 사주팔자를 넣어. 두 사람의 사진도 각각 넣어주면 좋은데, 함께 찍은 사진을 갈라서 넣으면 더 좋아.

 

물건만 잘 준비됐으면 그담부턴 쉬워. 멀리멀리 떨어지게 영희를 넣은 신발짝은 강원도에, 철수를 넣은 신발짝은 인천에다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파묻어부러. 그것이 비방이여. 

 

나 : 그런데 철수와 영희가 귀농을 해서 자연을 느끼며 산다고 고기도 안 먹고 풀떼기만 먹고 어머니 대지를 맨발로 밟고 살아야 한다고 신발을 싹 다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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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썩을!

 

무당 : 그럼 이렇게 해. 시장통 어물전에 가서 고등어 한 마리를 사가지고 세로로 좌우 반을 곱게 갈러. 똑같이 두 사람의 이름 사주팔자 사진을 좌우 한 짝씩에 착! 붙여서 광목천으로 잘 말아. 그리고 고등어 좌우 한 짝씩을 신발 버리는 것처럼 영영 이별시키란 말여. 

 

나 : 노르웨이산 고등어도 괜찮을까요?

 

무당 : .........

 

 

자, 이렇게 나는 비방을 샀다. 비방이란 어떤 제품이 아니라 방법 그 자체인 것. 나는 구매한 비방대로 실행에 옮긴다. 

 

 

토론회를 위한 필살기 비방 ‘손바닥 王’

 

부적도 비방이다. 부적은 물건이지만, 종이와 잉크 그리고 미적 수준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는 '부적에 뭘 어떻게 써야 할지'를 구매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비방은 여전히 숨겨져 있고 어떤 비방은 무료로 풀려있다. 즉 원래는 비방이었지만, 문자 그대로를 따지자면 지금은 비방이 아닌 것들이다. 우리가 다 아는 방법들이다. 공짜니까.

 

재수 없는 사람이 떠나면 소금 뿌리기. 잠잘 때 머리의 방향. 집이나 식당 문간에 걸려 있는 북어 혹은 건조된 붉은 옥수수. 붉은 팥 뿌리기. 쌀집에 걸려있는 고양이 그림. 낡은 이발소의 호랑이 그림 등.

 

(서양미술을 전공한 평론가들이 한국형 키치문화의 전형으로 자주 소개하는 이발소 호랑이 그림은, 키치인 건 맞지만 충분한 설명은 못 된다. 원래는 비방이다)

 

이런 것들은 원래는 대가를 치러야 알 수 있는 컨텐츠였지만, 어느 순간 케이블 TV에 잊을 만하면 보이는 처럼 무료공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윤석열의 손바닥 王자도 이미 비방의 울타리를 탈출한 무료컨텐츠다. 무슨 조선시대 십팔자위왕도 아니고, 왼쪽 손바닥에 王자를 쓰면 정말 왕이 된다는 단순무식한 비방은 없다. 삼국시대라면 모를까. 

 

국민의힘 토론회.jpg

 

이것은 말솜씨에서든 기세에서든 남들에게 짓눌릴 것 같은 어려운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승자가 되게 해 주는 일회용 긴급 처방 정도라고 한다. 

 

사극에서 아무리 왕이 말솜씨와 논리에서 밀려도 신하들이 감히 반말을 쓰지는 못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위기탈출 특급 설사방지 알약 같은 비방이다. 비방을 해 왔으면 좀 조심해서 보이지나 말지...

 

한국은 무속의 세가 워낙 강성한 나라다. 애초에 전 국민이 태몽을 꾸는 기이한 나라란 한국을 제외하면 단연코 없다. 샤머니즘의 원산지인 시베리아에서도 샤먼이 마을 사람들의 예지몽을 대신 꿔준다.

 

그런 나라이니만큼 최순실과 김건희 같은 인간형이 꽤 있는 것 자체야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형이 청와대에 들어간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윤석열이 비방을 직접 실행했다고는 도저히 못 믿겠다. 팬이 써줬다는 건 더 못 믿겠고. 

 

물론 알려진 것보다 복잡한 기복 시그널이 들어간 '유료' 비방일 수도 있다. 그래 뭐, 이해하자면 이해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정치인과 연예인은 무당의 가장 실한 VIP니까. 비방의 지원사격을 받은 정치인이 윤석열 한 명일 리도 없고, 적을 리도 없다. 

 

하지만 무려 대선후보가 그것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비방을 들키는 정신머리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