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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째서 수천 년 동안 중국에 흡수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동아시아학에 있어 국제적인 질문이며, 그 답은 수많은 논문으로 제시되어 있다. 결론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퍽 국뽕스럽다. 한국인이 해냈다는 것이다.

 

국뽕이라서 민망하지만 인정할 수밖에는 없다. 진시황이 최초로 중국이라는 개념을 발명했을 때부터, 중국은 통합적이고 팽창적인 개념이었다. 중국 통일왕조의 인구는 거의 언제나 한반도 인구의 20배 이상을 유지해왔다. 현재는 대략 27배다.

 

그리고 중국은 한반도를 차지하든 굴복시키든,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한 역사가 깊다. 한족 중심으로 말하자면 한나라와 당나라가 있다.

 

중국 전부 혹은 북부를 차지한 북방 기마민족으로 보자면 요나라(거란족),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여진족=만주족)가 있다. 원나라는 협상으로 끝났고 청나라는 성공을 거뒀지만 발목을 붙잡히지 않기 위해 인조의 삼궤구고두만 받고 잽싸게 퇴장했다.

 

(남한산성에서 조선은 식량이 없어서 항복했지, 싸움을 못해서 항복하지는 않았다. 조선군의 전투능력-특히 사격실력-은 청군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래서 청나라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조선군을 참전시켰다.)

 

중국에서 발생한 세력으로는 홍건적이 있다. 중국 외의 경우를 보자면 임진왜란이 있다. 임진왜란도 본질은 중국과 같다. 전국(센고쿠)시대 직후 일본의 인구와 생산력은 조선의 2배 이상이었다.

 

한반도 주민이 독자적인 민족과 언어,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데 지금껏 성공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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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기록화. 612년(영양왕 23), 고구려가 중국 수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승을 거둔 장면을 그린 기록화. / 출처: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민족기록화>

 

 

'산성 알박기'라는 우주방어 시스템 

 

현상적 차원에서 보자면 많은 요인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우주방어 시스템. 물리력과 물리력의 정직한 충돌로는 중국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과 맞붙었을 때는 결정적 전투 직전까지 최대한 발목을 붙잡아 시간, 돈, 체력, 머릿수, 물자, 정신력을 녹아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당연히 극단적으로 적은 인구로 인구대국을 상대할 방법은 야무지게 설계하고 배치한 '수비 거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식 산성이다. 물론 이 산성은 척박하고 거친 한반도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산성 알박기'를 통해 천군만마의 적에게 최대한 많은 고통과 낭비를 강요해야 한다. 머릿수와 물자가 우월한 적을 패퇴시키기 위해 최대한 많은 희생을 강요한 후 영혼까지 끌어모은 야전 병력으로 단번에 승부를 내야 한다. 한반도에는 두 번, 세 번 결정적 야전을 치를 생산력이 없기 때문이다.

 

귀주대첩, 살수대첩, 행주대첩, 안시성 공방전 등 우리 역사에 기록된 결정적 승리들은 대개 이런 형태를 띠고 있다(누군가는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을 들며 따지겠지만... 바로 그래서 이순신을 천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논외의 존재다).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채석한 화강암을 옮겨 당나라로부터 빼앗은 안시성 성벽을 리모델링했다. 고구려의 야전군은 당군이 안시성의 화강암 성벽에 녹아내릴 만큼 녹아내린 후에야 승리를 결정짓기 위해 나타나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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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복원도 

출처 -<KBS>

 

이런 형태의 승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귀족(양반)부터 노비까지 산성에 모여들어 우주방어를 펼칠 만큼 단합되어 있어야 했다. 왕부터 노비까지 밥상의 형태(밥 + 국 + 찬)가 동일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산성 안에서 발휘되어야 하는 지독함과 인내심 역시, 한반도 주민이 공통적으로 보유해야 할 조건이었을 것이다.

 

덜 죽고, 더 죽이는 원거리 발사 무기의 감각 

 

이것은 승리하는 조건이 아니라, 승리를 내다볼 수 있는 기본 토대다. 내가 마셔야 하는 공기 같은 것이다.

 

'목숨의 경제성'

 

한반도 주민의 생존 게임에서 교환비(아군과 적군의 살상비율)를 압도적으로 우월하게 가져오는 것은 승부가 아니라, 승부를 내 볼 생각을 할 최소 조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쪽의 머릿수를 최대한 지키면서도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발사 무기 운용 능력은 잘 하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보유해야 하는 기본 조건이다.

 

당연히 발사 무기의 대표주자는 활이다. 유사과학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험상 한국인은 무언가를 쏘아 맞추는 건 정말 잘한다. 장담하는데 징병되어 군대에 간 한국인 안경잡이 샌님이 상병만 되면 그 어떤 미군 특급전사보다도 사격을 잘 한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그렇다.

 

나는 군대에서 만발 사격으로 두 번이나 휴가를 나오기도 했으며, 유사시 저격 임무를 받은 채로 군 생활의 반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유원지에서 평생 단 한 번도 사격을 해 보지 않은 여자친구와 사격 대결을 했을 때 완패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군 입대 전까지 한 번도 사격을 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한반도 주민으로서, 원거리 발사 무기를 다루는 감각을 선조들에게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생존자만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어쩐지 명나라와 청나라 모두 지원병으로 조선군 저격수를 원했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한 명나라 군사학자는 흥분해서 이렇게 떠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창술, 일본의 검술, 그리고 조선의 궁술이 어떻게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지 살아서 구경하게 됐다고.

 

그러므로 한반도 주민에게 있어 적을 '쏴 죽인다'라는 것은 거의 역사적 본능에 가깝다. 고대~중세의 산성 방어에 있어 쏴 죽이는 것은 여성도 예외가 없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조선의 여성들은 동개궁(당기는 데 있어 어깨의 완력이 덜 필요한 활 중 하나)이 취미였다. <미스터 선샤인>과 <암살>의 '사격하는 여인'은 고증이 잘 된 결과다. 실제 역사와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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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안시성>

 

(여기엔 전통적으로, 전근대 기초 원거리 무기인 활이 인간의 체력을 갉아먹는 물건이라는 요인도 작용한다. 활시위를 한 번 당기는 것은 무거운 벤치프레스 한 번과 같아서 '훌륭한 장정'의 살상무기 발사 능력은 통상 20발이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한 세트 루틴이 끝나면, 전투는 계속되고 있으므로, 여성의 지원이 필요하다. 전투가 지속되는 한 원거리 살상무기는 계속해서 적에게 투사되어야 한다.)

 

이는 고려 말부터 시작된 화포제일주의는 물론이요 현재 '순수한 광기'로 불리는 국방부의 미친 듯한 원거리 발사 무기 개발과도 맞물려 있다.

 

하지만 화포제일주의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폭력의 역사를 논해야 한다. 그 과정과 결과, 양측의 결론까지 이야기해야 지금을 설명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스파르타, 고구려 그리고 영끌대결  

 

다들 아시다시피 사이가 겁나게 나빴다. 왜 그렇게 나빴는지는 지금 기준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즉 고구려 멸망 이후 기준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고구려-수나라, 고구려-당나라 관계는, 아직 한반도와 중원 양측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영끌 대결의 귀결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수, 당이 어째서 고구려 멸망을 원했는지는 설명이 불필요할 것 같다. 여러분이 세계정복 독재자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할 때, 고구려를 밟고 싶겠나 안 밟고 싶겠나. 이 답은 정해져 있다. 당연히 해결해야 할 숙원이다. 문제는 고구려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바락바락 대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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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수렵도. 무용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구에 있는 고구려 고분이다>

 

고구려는 태생부터 영토확장적인, 그리고 영토집착적인 군사국가다. 고구려의 건국 이념이 '다물'이다. 다물은 고대 한국어로 옛 땅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옛 땅의 기준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고구려 땅이지? 그야 고구려가 자의적으로 주장하는 대로다.

 

우리는 고토회복을 위해 건립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토회복을 해야만 한다. 고토는 우리가 정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 근거는 우리가 선조들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순환논증이다. 고구려의 고토회복 논리는 지금의 북한, 과거의 나치독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괴롭히기와 다를 바 없다.

 

주몽느님이 해모수에게 분양받은 땅이 있는데, 그건 당연히 소유권 증명 서류를 인수받은 우리(고구려인)가 다 읽어서 알고 있고,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대로 내놔.

 

이게 기본 논리다.

 

그걸 위해 고구려라는 국가가 존재하는데, 거꾸로 고구려를 위해 '다물'이 실행되어야 한다. 완전한 파시즘 국가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로 노골적이고 집착적인 파시즘 국가가 수백 년을 생존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이 기괴한 기적을 위해 고구려인은 동아시아의 스파르타인이 되어야 했다. 과거 고구려의 별명 중 하나가 '오자도'다. 모든 남자가 기본적으로 다섯 개 이상의 날붙이를 상시 휴대하고 다니는 미친놈들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뜻이다.

 

전투용 큰 무기, 작은 무기 = 자살용 무기, 활과 화살, 사냥용 무기, 사냥감 해체 및 요리와 식사를 위한 단검.

 

추측건대 이것이 대략적인 다섯 날붙이다. 물론 전투에 임했을 때는 얼마든지 추가된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고구려 여인들은 따로 <살계>라는 걸 조직해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아내를 학대하면 계의 조직원들이 협동해 가해자를 죽여버렸다. 이것은 국가에서 허용되거나 최소한 묵인되었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현대적 기준으로 제정신인 국가는 아니었다. 물론,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칠 때는 아주 겸손했다. 그 이유는 고구려인이 겸손해서가 아니라 중국 조정이 가진 위상 때문이다.

 

중국 조정은 전통적으로 현재의 유엔 본부를 겸한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입조'라는 걸 해야 한다. 거기가 문명의 중심이니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군 뿐 아니라 명군과도 싸우고 나서 얻은 특권을 봐야 한다. 그 특권이란 명나라 사신 앞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은 물론 그 이하 대소신료들까지 모두 무릎 꿇고 천자의 은혜에 감격하며 책봉을 받는 것이었다. 명나라식 복장을 한 상태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조공을 바칠 건 바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대결했던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는 중국과 끝까지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