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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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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멸망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오징어게임을 했을 때, 사실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인구와 물량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 실패의 결과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중국 자체의 생산력은 그대로다. 그 생산력은 결국 당나라가 물려받았다. 당태종은 극적인 실패를 겪었지만 문제는 회복력이다. 중국이라는 막대한 생산 기반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몇 번의 승리를 거뒀지만, 승리를 거둘수록 국가의 체력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을 향해 고갈되어갔다. 한반도와 중원의 태생적인 생산력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그래서 최후의 단 한 번 패배로 평양성이 불타고 나라가 멸망했다. 아무리 고구려 전사들이 저녁은 지옥에서 먹는 일당백 전사라 한들 일당천에는 무너지게 마련이니까.

 

당나라는, 고구려만 멸망시키면 아주 많은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고구려는, 당나라에 개기면 아주 많은 가오가 살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의 입장

 

자존심 세우고 끝까지 가다가 결국 망했다. 과연 중국은 덩치가 컸다. 아주아주아주 컸다. 당나라의 입장은 이보다 복잡하다. 중국의 결론은, 한반도 왕조를 완전히 제압하고 혹은 멸망시키기 위해 드는 비용이 너무나 막대하다는 것이었다. 수나라는 망했고, 당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갔다. 수많은 인민의 희생으로 중국 역사가 최소 수백 년은 후퇴했다. 문제는 그렇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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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까지 신라 편에 합세한 나당전쟁의 패배는 논하지 않겠다. 고구려는 멸망 후 어떻게 됐는가.

 

고구려 유민들은 너무나 빨리 발해라는 국가로 시즌2를 시작했다. 물론, 발해도 망했다. 하지만 발해가 망하기 전에 신라가 사라지고 고려가 출현했다.

 

원래 고구려와 고려는 동의어이며, 같은 말로 혼용되었다. 당대 사람들의 기준에 고구려=고려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왕실 가문만 바뀐 채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 인식은 중국인이나 한반도인이나 동일하다. 고려의 건국세력은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했으며 주몽을 시조로 모셨다.

 

중국인에게 2천 년 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반도는 고구려=고려다. 우리에게 '결국 신라가 통일했다'라는 말은, 중국인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고구려를 피똥 싸서 멸망시켜 신라가 통일했더니, 결국 고구려가 부활해 도로아미타불이 됐다'인 것이다.

 

중국의 입장

 

엄청난 희생과 한 통일 왕조의 몰락과 역사적 퇴보를 감수하고 '고려'라는 놈을 어찌어찌 때려잡는 데 성공했다. 신라라는 애들이 한때 한반도 문명의 적장자가 되었으나(심지어 그 짧은 시기에 발해라는 간이역이 있었다) 다시 '고려'가 그 자리에 들어섰다.

 

고려는 쿠데타에 의해 조선이 되었으나, 역사상 고려군과 조선군이 싸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성계는 조선의 초대 국왕이기 이전에 고려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쿠데타에 성공하고 먼저 고려의 국왕이 되었던 것. 그래서 국호와 왕실 가문만 바뀌었을 뿐, 당연히 조선은 고려의 연장선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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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

 

조선은 정식 국호일 뿐, 사실 조선은 고려=고구려다. 아직도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비하할 때 '까올리빵즈(고려봉자)'라고 욕한다. 한국인은 조선인,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고려인. 결국 국제적으로 우리는 고려인이고 코리안이고 까레이스끼이고 고구려인이다.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는지와 상관없이 적어도 중국인에게 우리 한반도인은 여전히 '고구려 사람'이다.

 

결국 중국은 엄청난 비용을 치른 채 본질적 변화는 전혀 바꾸지 못했다. 한반도는 한반도대로, 끝까지 질렀다가 굵직한 왕조 하나가 소멸당하는 경험을 했다.

 

여기서 한중 두 문명은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중국 : 저 개새끼들을 이를 악물고 조져봐야 남는 거 하나 없다.

한반도 : 끝까지 가 보면, 결국 X된다는 걸 확인했구먼.

 

이후 한반도와 중원은 암묵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서로 인정할 걸 인정하고 건드리지 말 건 건드리지 말자.

 

한반도 왕조는 중국에 입조하고 제후국의 위치는 받아들이되, 부릴 수 있는 진상은 다 부린다. 중국에 이어 천하의 넘버 2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다.

 

형씨, 내가 형 대접은 해 드릴게. 하지만 주권을 넘보면 안 되는 건 알지? 내가 웬만하면 형님 대접해 드리고는 싶지. 형이 동생 눈치 잘 봐주면.

 

중국은 한반도 왕조를 멸망시키는 데엔 너무나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는 사실과, 한 번 멸망을 시켜본들 지들이 멸망당해주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러므로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이렇게 된다.

 

내가 천명을 받은 천자국이라는 건 인정을 좀 해 주시고. 아이, 잘해드릴께. 가오만 좀 살려줘 봐. 형 대접만 좀 잘 해 줘봐. 특히 다른 애들(베트남, 일본) 볼 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1천 년 한중관계는 이러한 기본적 맥락 위에서 수립된 결과다. 그것은 한반도의 개 X같은 태도와 실행력에서 기인한다.

 

"행님, 그짝이 굳이 우리를 멸망시킬라 하믄 우리는 멸망을 당해겠지요. 하지마는 내 뒤지기 전에 행님을 다시는 정상적으로 살 수는 없게 맨들고 뒤질 것이란 건 아시지라? 마 내 뒤질때 행님 눈깔 하나는 파불고 팔다리 하나씩은 조사불고 뒤질 것이오."

 

이 암묵적 메시지, 이것이 고구려의 멸망과 부활(고려왕조)이 우리에게 준 유산이다.

 

한족만의 깨달음

 

고구려의 멸망과 그 여파가 한반도와 중국에 강요한 '깨달음'이 내내 지켜진 건 아니었다. 발해를 거쳐 고려왕조가 출현한 시점에서는 - 즉 중국군에 불탄 평양성이 다시 한반도 왕조의 군사기지로 부활했을 때 중국의 입장에서 이 깨달음은, 한족만의 깨달음이었다. 

 

고려=고구려가 한반도에 자리잡은 한사군을 기어이 밀어내면서 국가로 바로 섰다는 점에서, 시작과 몰락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중국문명의 적자인 한족의 역사에서 지긋지긋한 이름이다. 문제는 한반도 주민은 비슷한 '깨달음'을 여러번 재확인시켜주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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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용환의 <귀주대첩>(1975)

 

귀주대첩으로 승리를 결정짓기 전까지, 고려는 거란의 침공을 세 차례나 받아내야 했다. 만약 중국의 범주를 현재 중국이 주장하는대로 거란이며 몽골이며 다 포함되는 것으로 인정해준다고 해보자. 중국의 프로파간다가 불쾌하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측면이다. 

 

한반도 문명은 한족에게 가르쳐준 깨달음을 기마민족에게도 새로 가르쳐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지금 이야기하는 '한중관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힘의 불균형은 그대로 이어진다. 

 

한줌에 불과한 한반도

 

중국의 막대한 인구와 생산력 일부를 차지한 거란은 2차 침공에서 40만 명이라는 초월적인 병력을 동원했다. 이 때 고려 현종은 거란 추격대에 4km 거리까지 추격당하며 나라가 멸망할 뻔했다. 

 

현대인들은 말과 낙타, 소와 같은 가축이 전쟁에 있어 얼마나 강력한 전력인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기병 한 기의 전투력은 보병 한 명의 5~15배이며, 고도로 훈련된 정예병은 20배를 넘어선다. 

 

한반도는 농사를 짓는 데 있어 여타 농경문명에 비해 극도로 불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군 할아버지의 신묘한 부동산 선정 능력에 힘입어(?) 목축 역시 지나치게 불리하다. 엄밀히 말해 한반도에는 제대로 된 목축이 가능했던 적이 없다. 

 

전쟁에 쏟아넣을 수 있는 물량에 있어, 한반도의 생산력은 유목문명에 대해서도 한 줌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거란의 3차 침공병력인 10만 명은 100% 유목 기병이었다는 점에서, 한족 보병을 무더기로 끌고 온 2차 침공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의 병력이었으며 전투력도 확실했다. 고려 수비군 20만 명은 절대다수가 보병이었다는 점에서 이때 거란의 병력은 고려의 5~10배로 보아야 한다. 

 

청야전술과 게릴라전, 산성방어를 통해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 후 승부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하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로 나라가 망한다. 그런 점에서 귀주대첩은 한반도가 외세를 방어하는 방식의 교범이다. 

 

이기기만 하면 끝이 아니다. 고려군은 거의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는 전투 결과는 우리 기록 뿐 아니라 외국 기록에서도 교차된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기지 않으면 소용 없다. 한반도에는 대군(大軍)의 인력손실을 복구할 만한 회복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민에게 모든 싸움은 더 죽이고 덜 죽여야만 하는 '교환비' 싸움이다. 몽골과 수십년을 싸웠어도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몽골군 사령관을 노비의 화살로 전사시킬 정도로 효율에 집착해서였다. 

 

(여진족과는 아예 미리 결판을 내버렸다. 고려와 금나라는 서로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화해했다. 금나라가 요나라 대신 북중국을 차지하고 제국을 수립한 건 그 이후다. 이후 고려의 선택은 고구려 멸망의 결과를 그대로 따른다. 고려는 금나라를 상국으로 대우해줬고 그 대가로 금나라는 '고려 국경을 향해 기왓장 하나 던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중국에서 시작된 화약무기의 유행에 대한 극도의 집착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전에 일본 이야기. 

 

또다른 중국,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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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우리에게 일본은 또다른 중국이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역사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차피 전쟁이란 전쟁의 이익이 그렇지 않은 이익보다 높다고 판단되는 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구와 생산력 - 물량의 차원에서 일본은 한반도를 압도할 운명을 가지고 시작했다. 일본열도는 한반도보다 넓고 평야의 비율도 높으며 기후도 좋다. 한반도와 일본이 쌀농사로 문명을 일으킨 시점부터 물량의 역전은 이미 정해졌다. 시간의 문제였을 뿐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는 이미 한반도의 2배였으며, 에도시대를 거쳐 18세기에는 중국, 인도, 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의 인구대국이었다. 고종이 일본의 힘 앞에 노출되었을 때 일본의 인구는 조선의 4배 이상이었다. 

 

곡물의 인구부양력이 곧 국가의 생산량이던 전근대에는-조선왕조는 전근대의 생산력으로 일본에 멸망했으므로- 센고쿠시대 이후의 일본 역시 우리에게는 '폭력의 차원에서 본 중국'이다. 

 

한반도인의 화력에 대한 집착

 

물론 한반도의 지나친 척박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외적에게도 몹시 불리한 조건이었다.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은 홈그라운드 이점을 살리기에는 매우 좋다. 그러나 생산력의 본질적 불균형을 해소할 정도는 안 된다. 

 

화약의 시대에 진입한 이후 한반도인의 화력에 대한 집착은 진포해전 이후 들끓듯이 불붙었다. 최무선은 아지발도가 이끌고 온 왜구의 500여 척 함선을 별다른 인력손실 없이 화포로 섬멸해버렸다. 돌아갈 배를 잃은 큐슈-시코쿠 연합 해적세력은 사실 그 순간 운명이 결정났다. 이성계의 승리와 아지발도의 죽음으로 끝난 황산대첩은 큰 틀에서 보면 일종의 처형이었다(아주 위험하고 고단한 처형이긴 했다).

 

압도적 효율을 확인한 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조선초 세종과 문종 시기에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사용된 화포기술의 근간을 마련했다. 두 임금은 화력에 수학적으로 접근해, 같은 시간에 적에게 더 많은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세종대왕의 천재성이라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거시적으로 보면, 침공보다는 피침의 역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머릿수 적은 나라'의 필연적 집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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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기전> 中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국에 대해서는 '한반도 게임'에 성공했지만 한 번 식민지 신세가 되었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삼키기 위해서 조선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일본은 청, 러시아와 싸웠다. 조선은 이미 붕괴해 있었다. 한반도 게임을 실행할 역량 역시 소멸해 있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이야기에서 조선의 멸망과정은 역사적 연결점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대신 현대에 이르러 '교환비'와 '화력'에 대한 전통적 집착을 우리가 어떻게 계승했고, 계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아야 '폭력의 차원에서 본 한중관계'가 마무리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