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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홍콩체제’를 공부하면서 늘 한반도체제도 같이 생각해본다. 남한과 북한은 반드시 통일(통합)되어야 하는가? 무엇을 어디까지 통일(통합)할 것인가? 분리된 채 통일(통합)되는 것은 나쁜 것인가? 남한과 북한의 정체성은 어디까지 어떻게 보호되는 것이 좋을까? 

 

지역은 집단기억을 공유하지만, 더불어 공통의 화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문화적 유전자가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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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첨밀밀’ 한 장면.

 

20세기 후반, 홍콩에선 1997년이라는 운명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은 유지되고 존중될 수 있을까?’에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시 홍콩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주권 반환에 대해서 토론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홍콩을 어떻게 할까, 반환을 요구할까, 그대로 둘까, 영국은 순순히 돌려줄까? 개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관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다. 

 

개인이나 기관이나 사유 방법의 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든 바뀐다고 하기보다는 안 바뀐다고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만큼 일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 바뀌면 좋겠다는 심리가 지배적일 때, 우리의 두뇌가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중국에게 홍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왜 거위를 죽이겠냐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홍콩 조야의 기대와는 반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홍콩을 가지려는 영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1970년 말, 신계의 조차 기한이 20년 앞으로 다가오자 홍콩 경제계가 먼저 걱정하기 시작했다.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원래 ‘영구적’으로 영국에게 ‘할양’한 것이고, 가장 넓은 신계 지역은 1898년부터 99년간 빌려준 것이었다. 신계 지역은 1997년이 되면 중국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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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홍콩 총독 머레이 맥리호스와 덩샤오핑 

 

1979년 홍콩 총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덩샤오핑은 홍콩 회수에 대한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총독은 홍콩으로 돌아와서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주권을 연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중국 정부의 홍콩 반환 방침이 분명하게 공개된 시점은 1982년이었다. 덩샤오핑은 히스 (당시 전직) 영국 수상을 만나 대만에 대한 기본정책인 ‘9개 조항’의 조건으로 홍콩을 회수할 것이라고 했다. 홍콩의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주택 가격이 폭락했다. 

 

1982년 당시 영국의 수상 마거릿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기세로 다시 덩샤오핑과 담판을 했다. 

 

대처 수상은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 등) 국제법상의 효력을 들어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을 계속 통치할 것이라고 했다. 덩샤오핑은 난징조약이 불평등조약이며 조약 책임자인 청나라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홍콩을 회수하기로 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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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

 

중국과 영국은 정식 담판에 돌입했다.

 

영국은 주권과 통치권을 나누어서 협상했다. 홍콩의 주권은 중국으로 돌려주되 통치는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중국은 1997년이 되면 주권과 통치권 모두 회수할 것임을 견지했다. 

 

영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득실을 충분하게 따져보았다. 

 

-경제적으로 큰 이익은 이미 1960년대에 끝났다는 점 

-중국이 군사 공격을 할 경우 홍콩을 지켜낼 수 없다는 점 

-외교적으로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

-영국 정부 내 탈식민 분위기가 커졌다는 점 

 

등을 이유로, 영국은 홍콩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수많은 난관을 통과하여 마침내 1984년 9월 양국은 『중영공동성명』을 체결하고,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게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홍콩특별행정구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고도의 자치를 누린다. 

 ②홍콩특별행정구는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과 최종심판권을 지니며, 현행 법률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홍콩특별행정구는 현지인 스스로 통치한다.

 홍콩에서의 영국의 이익을 보호한다.

 홍콩특별행정구의 기본법을 제정한다. 

 

다시 요약하면 ‘일국양제’, ‘50년 불변’,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사회주의, 홍콩에는 자본주의를 시행한다는 ‘일국양제’에 대해 대처 수상은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했고,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 유물주의와 역사 유물주의의 공로’라고 했다. 

 

 

중국이 홍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

 

결과적으로 중국의 승리였다. 영국으로서는 두 가지가 아쉬웠다. 

 

①모든 원칙에 대해 일일이 자세하게 토를 달지 않았다는 점 

②중국-영국의 2자회담이 아닌 중국-영국-홍콩의 3자 회담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점 

 

영국은 대영백과사전 같이 매우 자세한 합의서를 원했지만, 중국은 큰 맥락만을 기록한 두세 장 정도의 서류만을 원했다. 합의 내용을 자세하게 규정하지 못한 점은 홍콩의 민주화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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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홍콩

 

중국과 영국 사이에 주권 반환 협상이 시작되면서 홍콩인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회담장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자신에 대해 변호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어느 신문의 정치 만화는, 부모(덩샤오핑과 대처 수상) 앞에서, ‘종이(중영공동성명)’를 손에 들고 있는 사람에게 팔려 가는 소녀를 그렸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었던 홍콩사람들의 처지를 전통 결혼을 앞둔 신부의 모습에 빗댄 것이다. 홍콩인들의 열패감과 분노는 그만큼 컸다.   

 

홍콩인들의 마음은 이민으로 표현되었는데, 1980년부터 86년까지 매년 2만 명 정도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매년 3-4만 명 정도가 해외로 떠났다. 

 

 

‘일국양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국민당은 대만 섬으로 후퇴하였지만, 양자는 여전히 금문도(金門島)를 비롯한 곳곳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1955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전인대에서 중국은 가능한 조건하에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대만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고 했다. 

 

1979년 1-2월 덩샤오핑은 방미 기간에 대만이 ‘조국’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대만의 현실과 제도를 존중할 것이라고 했다. 1981년 8월 그는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개 성, 일개 지역으로서 원래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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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 부부가 국빈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물을 바라보고 있다. 

 

1982년 1월, 덩샤오핑은 대만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처음으로 ‘일개 국가, 양종 제도’ 개념을 공개했다. 

 

1982년 9월 덩샤오핑은 영국의 대처 수상과 회담하면서, 현행 홍콩의 정치, 경제, 제도 심지어 대부분의 법률도 보류할 수 있다고 했다. 1984년 6월 덩샤오핑은 홍콩 경제계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일국양제’로 대만과 홍콩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일국양제’에서 ‘일국’과 ‘양제’의 무게 중심과 순위였다. ‘일국’이 중요한가, ‘양제’가 중요한가의 지루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중국정부는 당연히 중국이라는 국가가 우선이고, 홍콩으로서는 자본주의 제도를 50년 동안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양제’를 보장받아야 했다. 

 

 

다음 편에선

 

홍콩을 알기 위해서는 ‘일국양제’가 관건이고, ‘일국양제’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의 체제 특수성과 덩샤오핑이란 인물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다음 편에서 이와 함께 홍콩에선 현재 어떤 논리들이 충돌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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