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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다음 질문에 관한 대답일 수 있겠다.

 

내가 과연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해 얼마만큼 얘기할 수 있을까?

 

먼저, 나라는 사람이 너무나 개인적인 성향을 가진 탓에,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통찰하기보다는 그저 내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 또한 내가 해온 출판 편집 일은 통상 편집자의 역할이라 불리는 수많은 일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하기에 이 방대한(?) 업무를 감당하는 직업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우려가 있다. 결정적으로, 나는 글을 안 쓴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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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편집자라는 직업군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시중에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으니 그것들을 읽으면 된다. 그 책들을 읽으면,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한 무미건조한 기술이 아니라, 정말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인간 편집자를 만날 수 있다. 그 책들은 편집자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관하여, 편집자의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처절함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뿐인가. 수많은 편집자들이 그간 자신이 업에 종사하면서 획득한 각종 노하우와 지혜와 통찰 등을 공유한 도서들이, 그것도 장르별로 나와 있다(에세이, 사회과학, 인문과학, 청소년물, 문학 등 구체적이고도 세세하게). 유익함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진심과 공감까지 녹아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 책들을 읽으며 편집자의 꿈을 키우고, 자신들이 하고픈, 또는 하게 될 업무를 이해한다. 요컨대, 많은 편집자들이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해왔다는 것이다.

 

2. 

나는 그들과 조금 다르다. 편집자가 아니냐고? 아니, 편집자 맞다. 출판사에 다니고 있고, ‘에디터’라고 찍힌 번듯한 명함도 있고, 편집자가 하는 일들을 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아먹고 산다. 드라마 영향 탓인지, 편집자라는 직업을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그렇게 보게 놔둔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편집자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어쩌다 느닷없이(?) 편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맥락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발을 들여놓은 이 길에서 생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나에게 매우 갑작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인생에서 기로에 서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 경험이 유독 많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그렇게 기로에 서는 순간 자체를 잘 안 만드는, 웬만하면 가던 길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인생의 기로를 만난 것이다. 삼 개월 전에.

 

“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말은 반은 진심, 반은 거짓이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저런 말이라도 해야 내 인생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고, 동시에 그냥 나를 좀 편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양가감정이었다. 어쨌든 이 말 한마디로 나는 무시무시한 에디터의 세계로 끌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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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나이 39세, 누군가는 커리어의 정점을 찍을 나이에 나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하필 이럴 때에, 친밀했던 사람과도 멀어졌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파이팅이 넘쳐도 모자랄 판에, 공허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그렇게 낯선 편집자의 세계로 들어갔다.

 

편집자의 세계를 낯설어하는 나를 향해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너 출판사에서 오래 일했잖아! 그래, 출판사에서 오래 일했다. 10년 넘게 일했으니, 한 가지 일을 꽤 오래 한 셈이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은, 교정교열, 윤문 작업 등 주로 원고와 씨름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사실상 편집 업무의 본령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 일은 요즘 편집자들이 하는 업무의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

 

요즘 편집자들은 주로 사람과 씨름한다. 작가, 오너, 디자이너, 마케터, 독자 등등. 오죽하면, 책장과 책장 사이에 낀 ‘책갈피’에 자신의 존재를 비유할까. 나는 그런 책갈피 같은 삶을 산 지 이제 겨우 세 달째다. 백 일 남짓 된 아기 편집자...라고 해야 할까. 이제 겨우 맛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막 입사한 신입 편집자의 상큼함과 재기발랄함이 있지 않을까 할 수 있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어찌 되었건, 10년 동안 출판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기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기도 했고, 적지 않은 나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나보다 불과 한두 달 앞서 입사한 신입 사원들의 적극성과 패기, 이런 게 나에게는 없다.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들과 나는 절대 같을 수 없다. 어딘지 모르게 나는 뭔가, 한 풀 꺾인 느낌이랄까. 게다가 입사 당시 나는 텐션이 하늘을 찔러도 모자랄 판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매우 무기력한 상태였다. 그러나 회사는 몸집을 한창 키워야 하는 상황인지라, 나에게 일당백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나의 개인 사정을 이유로, 저 좀 봐주세요,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사수도 뭣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력직이 본능과 직감과 눈치에 의존해 손으로 발로 더듬어 가며 어찌어찌 이 일을 해나간 지 삼 개월 차.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인간이 육상 선수와 경쟁하라고 요구받는 막막함을 느끼며, 매일매일 이 길이 맞나 묻고,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되뇌며, 어떻게 하면 이 길을 벗어날까 궁리하느라 바쁘다. 안 그런 편집자가 어디 있냐고? 물론, 모든 편집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버거운 업무들을 수행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산다. 편집자 하려면 얼마나 많은 덕목들이 필요한지 아는가? 창의력, 논리력, 소통력, 설득력, 문장력, 공감력, 임기응변력, 체력 등등.

 

아,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더 있다. 숫자 감각. 편집자는 수에 밝아야 한다. 내가 만들려는 책이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다 줄 것인지를 내다보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구매율이 받쳐주지 않으면, 출판의 낭만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편집자는 모든 것을 잘해야 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편집자인데 왜 나는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있나 자문할 때가 많다. 편집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는, 뭐랄까. fake가 아닐까. 편집자라는 옷을 입고 위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달까. 이 옷은 엉성하고 어색하지만, 그렇다고 맘에 안 드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고 이 옷을 벗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내가 만일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해 글을 쓸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 싶어서다. 일단 내 스스로가 방향을 잡고 싶어서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나의 시선은 이 업계에서 다양하고도 풍부한 경험을 쌓은 사람의 그것이 아닌, 매우 낯설고 생경한 세계에 툭 떨어져 적응하기에 바쁜 이방인의 시선 같을 것이다. 매일매일이 체험 삶의 현장 편집자 편을 찍는 기분이니. 편집자로 일일 살아보기, 한 달 살아보기, 뭐 이런 기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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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리 변명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글을 쓴다면, 내 이야기를 빌려 편집자 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편집자 세계 안에 있는 나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다. 그러한 글의 쓸모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되는 밤의 서두에서, 

 

출판사 재직 10년 차 뉴비 편집자 이야기,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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