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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국으로 전지훈련을 갔었는데, 마침 같은 지역으로 다른 한국 프로팀이 전지훈련을 왔다. 예전 그 지역 마이너리그 팀이 사용했었던 구장에서 그 팀과 연습게임을 하기로 했다.

 

마이너리그 팀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고 나서 그 지역 주민들은 야구 경기에 조금은 목말라 있었던 것 같았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한국에서 온 프로야구팀의 연습경기를 보러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야구장을 찾았다. 매 이닝 이벤트도 하고 그랬다.

 

그날 가장 인상적이었고 동시에 민망했던 장면은 클리닝 타임 때였다. 때맞춰 이벤트를 관람 온 아이들을 위한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경기 주심이 이벤트 중인 사람들 보고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 순간 많은 관중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우리나라 빨리빨리 문화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구를 즐기러 온 관객들에게 좀 창피한 순간이었다.

 

선수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방법

 

11년간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뛴 카일 시거라는 선수가 있다. 얼마 전 10월 4일은 그의 시애틀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20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꿈꾸던 시애틀 매리너스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워싱턴 내셔널스를 이겨 시애틀의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었다. 보스턴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이미 포스트시즌은 물거품이 되었던 그때 카일 시거는 9회 초 수비를 하고 있었다.

 

9회 초 1사 1루의 상황에서 시애틀의 스캇 서비스 감독은 주심에게 다가갔다. 투수를 교체하는 것이 아닌 카일 시거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라운드에 있던 모든 선수들은 마운드로 모였고 카일시거와 감동적인 포옹을 하였다. 게임 중이었지만 그라운드 키퍼는 3루 베이스를 뽑아와 카일시거에게 전달하는 장면도 연출하였다. 에인절스 선수들도 그 순간을 함께 하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야구에서만 볼 수 있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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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는 마지막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끔 은퇴선수나 그날의 주인공인 선수를 교체해준다. 그 순간 경기는 중단이 된다. 모든 관중과 선수의 이목이 집중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메이저리그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 선수의 은퇴식도 그의 커리어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리베라가 투구 준비를 하던 중 덕아웃에서 두 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리베라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누군지 알아차리고 이내 웃음을 짓기 시작한다. 그 두 명의 사람은 뉴욕양키스의 또 다른 전설 데릭 지터와 앤디 페티트였다. 리베라는 그들과 포옹을 나누고 그라운드에 모인 팀 동료들과도 포옹하며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덕아웃에 들어가서도 스텝과 나머지 선수들과도 포옹을 하는 순간까지도 경기는 재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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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고 그제서야 마지막 커튼콜을 했다. 상대 선수들도 박수를 치며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게임진행을 걱정하지 않으며, 데릭지터와 앤디 페티트가 투수 교체를 할 수 있는지 규정을 따지지도 않는다.

 

야구뿐인가. 지금은 고인이 된 NBA스타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지막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마지막 경기에서 60득점을 기록했다. 그날 코비 브라이언트의 야투시도가 단일 경기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많은 슛을 던졌다. 농구 코트에서 뛰고 있는 10명의 선수가 최선을 다하면서도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지막 경기를 마음을 다해 기념했다. 같은 팀 선수는 코비에게 계속적으로 패스를 했으니 60점을 득점했을 것이고, 상대팀 선수들 역시 수비를 하면서도 비매너적인 플레이는 하지 않으며 전설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이날 경기의 마지막도 야구 경기와 비슷했다. 4.1초를 남긴 상황, 승부는 레이커스의 승리로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 순간 벤치에서 교체 사인을 보낸다. 코트를 걸어 나오는 선수는 바로 은퇴하는 코비 브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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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4.1초만 남았지만 교체하는데는 수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순간을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코비 브라이언트의 마지막 경기에서 어떤 팀이 승리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 경기에서 받은 감동을 오래도록 기억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란 이런것이지 않을까.

 

이승엽의 마지막 경기

 

20년 가까이 야구단에서 일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경기가 몇 경기 있다. 당연히 우승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시리즈에서 패해 준우승했던 시합도 떠오른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넥센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몸담았던 팀에서의 마지막 경기라서가 아니다. 그날은 이승엽 선수의 은퇴경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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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이승엽, 이호준, 박재상 등 KBO를 호령했던 세 명이 은퇴경기를 치렀다. 공교롭게도 모두 넥센과의 경기였다. 다른 게임은 단순히 은퇴식만 하는 경기라 여타 다른 은퇴식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그날 경기는 이승엽선수가 스타팅으로 출전하는 경기라 조금 남달랐다. 경기 전 넥센 선발투수였던 한현희 선수는 정면승부를 하겠노라 얘기했었고, 넥센 덕아웃에서도 흔쾌히 그와의 승부를 응원했던 기억이 있다.

 

시합이 시작되고 이승엽 선수의 첫 타석, 한현희는 자신의 말대로 직구로 정면승부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이승엽 선수의 방망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장면을 본 이들은 모두 그랬을 것이다. 비록 상대팀이었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시 스타는 다르다.’

 

덕아웃에 있던 선수들도 다들 같은 느낌으로 얘기했었다. 첫 타석 홈런에 이어 두 번째 타석에서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또 홈런을 친 것이다. 이승엽 선수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에게 이보다 큰 선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적 장면을 직접 보는 경험을 하게 해준 이승엽선수와 한현희선수에게도 감사할 따름이다. 감히 말하지만 프로야구 선수 은퇴 경기 중 최고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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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8회 말 공격, 마지막 타석에서 유격수 땅볼을 쳐서 선행 주자는 아웃이 되고 이승엽 선수는 1루에서 세이프가 되었다. 난 그 순간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지금 교체해! 교체하라고!’

 

하지만 삼성 덕아웃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승엽 선수의 마지막을 더 큰 감동의 순간으로 만들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1루를 대주자에게 내준 이승엽 선수가 그라운드를 걸어 나오며 그를 연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한국 프로야구사에 그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꽤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아쉽다. 매우.

 

순간이 필요하다

 

만약 이승엽선수의 은퇴 경기에서도 미국처럼 마지막에 교체되며 아쉬움과 존경의 포옹을 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다면, 스피드업에 매몰된 누군가는 경기를 빨리 진행하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스포츠가 더욱 발전하고 더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감동적인 순간들과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추억과 이야기 거리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오랜시간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의 인생과 그의 성장과 좌절을 함께 해온 팬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리베라의 마지막 게임같은 감동적인 순간이, 머지않아 한국프로야구에서도 연출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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