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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금 속사정

베르사유 조약의 경제 조항은 독소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내용이어서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었다. 독일에 대해서는 황당무계할 정도로 많은 배상금을 부과했다. 그러한 명령은 승전국의 분노와 아울러 패배한 국가나 사회는 현대전을 치르는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승전국 국민들의 이해 부족을 나타낸 것이었다.

                                                              - 처칠 회고록 중 발췌 

 

처칠의 말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 『패배한 국가나 사회는 현대전을 치르는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란 대목이다. 1차 대전은 그 이전의 전쟁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는 전쟁이었다. ‘세계대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수많은 국가들이 전 지구적인 규모로 참여했다. 전장으로 삼은 곳도 훨씬 넓고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그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바닷속에서의 전투, 하늘에서의 전투가 시작됐고, 땅 위에서는 ‘육상전함’이라 불리는 탱크들이 등장하게 됐다. 이 모든 게 돈이다. 배상금 1,320억 금 마르크(golden mark). 달러로는 330억 달러란 어마어마한 액수는 인류가 처음으로 겪은 현대전의 영수증이었다. 

 

이건 배상할 수 없는 규모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자신들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에 따라 배상금 분배비율도 정했다. 당시 배상금 분배 비율은 프랑스가 52%, 영국이 22%, 이탈리아 10%, 벨기에 8%로 정해졌다. 

 

전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게 프랑스다. 전쟁 때문에 프랑스 농경지의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1백만 동의 건물과 9천여 개의 공장이 대부분 파괴됐다. 여기에 석탄광과 철광 또한 황폐화되었다. 6천 개의 교량이 파괴됐으며, 600km의 철도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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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협상국 대표들은 프랑스가 가장 큰 피해를 본 걸 인정했다. 프랑스의 재건 비용으로 대략 640억 금 마르크, 약 150억 달러가 들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프랑스 정부도 자신들의 피해를 고려해 최소한 배상금의 55%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승전국들도 납득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1919년 1월 프랑스와 미국 전문가들은 대략 1,200억 금 마르크(286억달러) 수준에서 배상금이 책정될 걸로 예상했으나, 1921년 5월 런던에서 최종적으로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됐다. 

 

이 액수도 그나마 조정한 금액이었다. 1918년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가 전문가들에게 들은 액수는 2,200억 마르크였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건 당시 승전국들이 이런 무리한 금액을 책정한 배경이었다. 이들이 독일을 감정적으로 대한 것일까?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이 당시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재정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4년 3개월 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는 전쟁 전 예산의 27년분을, 영국은 38년분을, 독일은 50년분을 썼다.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국민총생산(GNP) 대비 군사비는 독일이 53%, 영국이 38%에 달했다. 그리고 고작 10개월 동안만 참전한 미국은 GNP 대비 군사비로 13%를 지출했다.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어떻게 전쟁비용을 마련했을까?

 

세계구급 현대전의 영수증 

1913년 미국은 이미 영국을 추월해 세계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큰 나라가 됐다. 경제대국 미국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게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미국은 전쟁 기간 내내 협상국들에게 전쟁자금을 빌려줬다. 전쟁 전 37억 달러의 채무를 졌던 세계 최대의 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이제 126억 달러의 채권을 가진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됐다.

 

전쟁 비용 덕분에 영국은 파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런 암울한 경제상황은 당연한 결과였다. 전쟁 직전 영국의 국방비 지출은 '연간 5,000만 파운드'였으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 '하루 5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 애초 영국은 미국에서 수입할 전쟁물자 규모를 최대 5,000만 달러 정도로 예상했으나 그 최종액수는 30억 달러에 달했다. 전쟁의 비용은 모두의 예상을 아득히 추월했다. 전쟁 때문에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더 시티(The City) 위상은 땅에 떨어지고, 뉴욕의 월 스트리트가 급부상하게 된다. 참전은 겨우 10개월 동안 하였지만 전쟁의 향방을 가린 건 미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다급한 건 프랑스였다. 전쟁 기간 가장 큰 피해를 본 프랑스는 하루빨리 피해지역을 복구해야 했다. 1922년 프랑스는 45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를 전쟁 관련 연금지급과 피해 지역의 재건 비용으로 미리 지출했다. 여기에 미국에 갚아야 할 ‘빚’이 얹어진 거다. 즉, 프랑스와 영국은 자국 내 피해 복구 혹은 전사자 유족연금 등을 지급해야 함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에게 지게 된 국가 채무를 갚아야 했다. 문제는 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상황에서 이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재원을 찾는 게 어려웠다는 거다. 그 결과 미국에 진 빚을 독일에 배상금으로 받아내 갚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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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는 피아(彼我)가 없다

미국은 같이 싸운 동맹들의 빚을 깎아 줄 생각이 없었다. 채무 이자 지불을 잠깐 유예해 주겠다는 선심 정도가 고작이었다. 미국 재무부는 채무국들이 전쟁 중 진 빚에 대해 공동대응을 시도하지 말라고 연일 경고하였다.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꿔 준 돈을 떼일 것 같아서” 참전한 걸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미국은 협상국에 물자를 팔아먹고, 돈을 빌려주면서 제법 장사를 잘했다. 그러나 점점 전황(戰況)이 좋지 않은 곳으로 흐르자 미국이 참전하게 된 거다. 떼일 거 같은,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거다. 자본에는 피아(彼我)가 없다(자크 파월의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라는 책을 보면 전쟁과 자본 사이의 거래에 관해 알 수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 바란다), 

 

케인스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협상국들 사이에 부채를 서로 탕감해 주면서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 규모를 대폭 줄여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중부 유럽(독일)의 빈곤화를 목표로 한다면, 감히 예언하건대 보복은 신속하게 찾아올 것이다.” 

 

케인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평화에 비용을 지불하자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상국 내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쪽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쪽에 배려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프랑스로서는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전후로 가장 강경한 발언과 행동을 보였던 프랑스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거다. 물론 여기엔 복수심도 있었다. 그러나 복수심의 근저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3,900만, 그러나 독일은 6,000만에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 내내 프랑스 땅은 짓밟혔지만, 독일 본토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만약 독일이 부활한다면? 프랑스는 이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독일을 더욱더 가혹하게 몰아세웠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이 붙은 보불전쟁(普佛戰爭)의 패배 이후 프랑스는 독일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한때 유럽의 패권을 차지했던 프랑스였지만 이제 독일의 부상을 막아낼 수 없게 됐다. 1880년 프랑스는 전체 유럽 인구의 15.7%를 차지했지만, 1900년이 되면 이 수치는 9.7%로 떨어졌다. 1920년 프랑스 인구는 4,100만 명이었지만 독일 인구는 6,500만 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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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생산과 경제적 역량은 격차가 더 컸다. 1880년 독일의 강철, 석탄, 철 생산량은 프랑스를 추월했다. 1913년 프랑스의 연간 석탄 생산량은 4,100만 톤인 데 반해 독일은 2억 7,900만 톤이 됐다. 전쟁의 혼란을 딛고 독일이 다시 부흥하게 된 1930년대 말, 프랑스의 석탄 생산량은 4,700만 톤, 독일은 3억 5,100만 톤이 됐다. 프랑스는 이제 혼자서 독일을 막아설 수 없게 됐다. 1920년 프랑스 정보부의 평가로는 독일의 산업 잠재력은 프랑스의 3배가 됐고, 독일 인구는 곧 프랑스의 2배가 넘을 거라는 예상치가 나왔다. 이겼지만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어쩌면 베르사유 조약은 프랑스의 이런 두려움과 복수심, 경제적 절박감 때문에 『조약의 목적을 놓친 문서』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 속에서 히틀러는 정치참여를 결심하게 된다.

 

그 후 며칠 있다가 나는 나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 몹시 걱정하고 있었던 자신의 장래에 대한 생각에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황제 빌헬름 2세는 마르크스주의의 지도자들에게 융화의 손을 뻗은 최초의 독일 황제였지만, 부랑자들은 명예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중략) 유태인이란 계약 따위는 없고 단지 엄격한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가가 되려고 결심했다.

- <나의 투쟁> 중 발췌

 

오해가 있을까 봐 말하지만, <나의 투쟁>의 내용을 전부 다 믿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히틀러는 이때까지 ‘평범한 독일인’이 느꼈을 만한 불평과 불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가 정치를 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폴 케네디 전 이왈수 역 

처칠회고록(제2차대전 발췌본)/ 까치/ 윈스턴 처칠 저 차병직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