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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한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워낙 원사이드하고 깔끔하게 밀렸기 때문에, 임진왜란만큼 기록이 다양하지 않습니다. 특히, 전쟁을 직격으로 맞은 일반 백성들의 상황을 담은 기록은 더욱 드뭅니다. 글을 쓸 틈새도 없이 잡히거나, 죽거나, 끌려갔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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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

 

 

병자호란이 끝나고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나마 남은 일기들은 남한산성에서 항전(이라 쓰고 사실상 뒤주 신세였던) 관리들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번 병자호란 일기 시리즈에서는 남한산성 안에서 왕을 보필한 문관 석지형(石之珩, 1610~?)의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의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일기를 엮었습니다. 

 

(석지형은 인조 1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한 조선 후기 문신이다. 저서로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외부와 연락이 끊긴 채 소수의 군사로 버티다가 결국 직접 나가 항복했던 비극을 그대로 쓴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과 문집인 《수현집(壽峴集)》 등이 있다) 

 

그 여러 일기들을 통해 지난 편까진 병자호란 발발부터 인조가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청 황제에게 항복했던 시점까지 살펴보며, 당시 남한산성 안의 조정을 어땠고, 백성들의 삶은 어땠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병자호란이 발생한 초기의 스토리는 1편에서, 링크)

(병자호란 중반부터 항복까지의 스토리는 2편에서, 링크)

 

 

이번 편에선 전쟁이 끝난 후, 조정은 어떻게 흘러갔으며 백성들에게 남겨진 고통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쟁 기간은 고작 두 달 남짓이었지만, 수도 한양은 심각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우선 폐허가 된 한양의 풍경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637년 2월 1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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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은 창덕궁에 계셨다. 산속으로 도망갔던 백성들은 하나둘 도성으로 내려왔고,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친 자도 모여들었다. 신하부터 백성들까지 각자 자신의 집을 돌아보고, 흩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해 분주했다. 

 

그러나 집마다, 성곽의 안과 밖마다, 시체만 늘어져 있었다. 다만 들개와 까마귀 떼가 시체를 뜯어 먹고 있을 뿐이었다. 혹자는 시체를 살펴보더니, 그 시체들이 자신의 부모님과 아내임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은 약탈을 당했고,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입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생사를 알지 못한다며 서로 하소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니,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바가 처참하고 마음 아프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금과 종묘사직은 간신히 지켜냈지만, 그 대가는 이름 없는 백성들의 무수한 죽음이었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다니다가, 이윽고 길가에서 죽어 누워있는 시체가 다름 아닌 자신의 부모와 아내였음을 확인한 한 남자의 비명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비탄에 젖게 합니다.

 

청 황제는 청군에게 약탈과 살육을 금지했지만, 약탈과 살육이 없는 전쟁이 있을 수가 없죠. 그러나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조정이 조금만 더 빨리 판단하고, 더 확실한 메시지를 내보냈다면, 살 수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청군이 온다’라는 급보에도 조정의 대처를 믿던 백성들은 이산가족이 되고, 잡혀가고, 죽어 나가야만 했죠. 반대로 먼 곳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전쟁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무책임한 혼란이 빚어낸 죽음도 적지 않았던 것이죠.

 

전쟁이 끝난 후, 청군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적잖은 조선 백성들을 끌고 갑니다. 여러 기록에서 그 수가 60만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지만, 수만에 이르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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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종병기 활>

 

청나라 사람들은 끌고 간 조선인들을, 마치 노예처럼 조선의 가족들에게 되팔았습니다. 전후 복구와 전쟁 배상금 납부, 그리고 기근 속에서 조정은 세금 납부를 독촉했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람들은 가족을 다시 사(?)오기 위해 빚을 내서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1637년 2월 11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청나라 사람들이 포로가 된 우리 조선인들을 시장을 열어 팔았다. 우리 백성들은 그들을 구해오기 위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시장으로 향했고, 도로는 길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환향녀’를 대표로, 가족들이 포기해버린 사람들이나 청나라 인사들이 절대 내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청나라의 백성이 되어야만 했죠.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의 아들이자 세자였던 소현세자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청나라에선 신년 축하 잔치가 열렸는데, 그 잔치에서 소현세자와 조선 관료들은 조선인 여성 무희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1638년 1월 1일 - 『심양일기(瀋陽日記)』

 

저녁 무렵, 청나라 사람들이 잔치를 베풀었다. 세자와 대군이 사신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 다양한 축하공연이 펼쳐졌는데, 우리나라의 여성 무희와 배우들도 참여했다. 우리는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하여 차마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여성 무희 중에는 눈물을 훔치며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양일기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시강원에서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의 상황을 정리한 실록입니다. 이 심양일기의 기록을 보면, 세자와 관리들은 끌려와 춤추고 노래하는 조선인 여성들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무희들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신분보다 양심이 앞섰던 것이죠. 

 

나라와 백성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고, 세자조차도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아는 무희들은 눈물을 훔치며 노래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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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1645년 8년간 소현세자는 청나라 볼모 생활을 했다.

청 황실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려는 노력에 나중에는 우호적으로 대했지만,

볼모 생활 초기에는 소현세자와 그 가족들을 박대하며 척박한 땅에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환향녀뿐 아니라, 전쟁 직후 청군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간신히 탈출한 여성들 역시 가족들의 차가운 냉대를 받았고, 더 끔찍한 일을 겪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경상도의 지식인 김령(金坽, 1577~1641)이 일기에 남긴 기록입니다.

 

 

1637년 5월 26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이번 전쟁 중에 서울의 사대부 중 한 명도 집이 완전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참혹하고 한탄스럽다. 전쟁 초기, 남쪽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다행히 화를 면하였다.

 

사대부의 부인 중, 오랑캐에게서 간신히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 남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거리로 쫓겨난 부인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부녀자들은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하나같이 

 

“아닙니다! 저는 성폭행을 당한 적이 없사옵니다.”

 

라고 증언했다.

 

양반 집안의 여성임에도, 그놈의 양반이기 때문에, 성폭행당한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여성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여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지만, 도성 안의 수많은 여성, 그것도 양반 신분의 여성들이 이렇게 무참히 짓밟힌 사례는 별로 없었죠. 누구보다 명예와 지위가 중요했던 한양의 양반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졌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남한산성에서 왕을 지켰던 사람들, 그리고 실질적 활약 없이 이름만 의병이었던 의병장들은 대부분 승진합니다.

 

 

1637년 5월 16일, 26일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식(全湜)이라는 자가 의병을 모집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공을 주장하지만, 그가 한 것은 쥐뿔도 없다. 

 

그저 감사가 그의 이름을 인근 지역 의병대장의 목록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고작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다가, 청군이 괴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한편, 남한산성까지 왕을 모신 자들은 모두 고위 공무원이 되었는데, 무려 200명이나 되었다. 수비한 군졸들도 모두 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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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뒤주 신세가 되어버린 사람들, 물론 고생했죠. 그러나 녹봉을 받는 자들, 충절을 지켜야 한다는 이념을 만들어온 그들이 의무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원하게 뿌려진 관직을 냠냠하며 자신의 충절(?)을 보답받습니다. 

 

심지어, 수십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가다,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은 채 도망친 사람 역시 이조참판이 됩니다. 뜻 있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세태를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충절’과 ‘의리’를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을 거부할 사람, 그 누가 있었을까요? 

 

화친과 항전을 주장한 사람들 모두 똑같이 논공행상에서 임금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누구는 잘했고, 누구는 잘못했다는 얘기를 지루하게 이어가면서요. 그에 비하면, 청군이 홧김에 죽인 무력한 조선 백성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피해복구를 지원하자는 얘기는 너무나 적었습니다.

 

이러한 정치판의 현실에,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을 쓴 석지형은 이렇게 논평합니다.

 

아! 병자년의 정치 싸움은 화친과 항전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때 성에 들어온 자들은 제각기 화친과 항전을 주장했지만, 다들 속으로만 생각할 뿐, 누구 하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자가 없었다. 

 

신하들은 나라의 위기를 맞아 순절하여 죽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화친을 통해 나라를 살리는 치욕을 감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다 끝났음에도, 그때 ‘그자가 그때 화친을 주장한 천하의 역적입니다’라며 비난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물론 성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성 안 사람들에 대해 잘잘못을 가릴 수 있다. 그러나 성 안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은 누구든 ‘내로남불’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잡을 수 있는 순간들이, 현재에도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시작부터 끝까지 굴욕이었던 전쟁, 병자호란은 그 자체로 ‘흑역사’가 되었습니다. 조선은 ‘열녀’와 ‘충절’ 프레임을 곧추세우며 ‘정신 승리’로 일관했고, 이러한 기조는 고종 대까지 이어집니다.

 

일기를 남길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처지가 좀 나았었을 것입니다. 산성 밖에서 청군에게 끌려간 사람들은 글을 쓸 시간도 없었고,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굴욕적이라 차마 쓰지 못했습니다. 

 

정치인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근왕군과 명나라 코인에 올인했고, 결정을 내려야 할 왕은 중요한 결정을 신하들에게 미뤘죠. ‘왕은 만백성의 아버지이다’라던 조선의 개국 선언은 백지 수표가 되어, ‘만백성이 부둥부둥해줘야 하는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조선의 정치사는 심각한 PTSD에 젖은 채 흘러갑니다. 그 과정 때문에, 현대의 사람들이 ‘조선은 망할만한 나라였다’라고 꼽곤 하죠. 

 

‘임진왜란, 혹은 병자호란 때 아예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면?’ 하는, 혹은 ‘병자호란 때 조선이 승리했다면?’과 같은 if 역사물이 끊이지 않는 것도, 우리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if 역사물이 흥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눈에 ‘바로잡을 수 있었던 순간’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보는 것도 또 하나의 무책임일 수 있습니다. 무책임한 도주로 도성 백성들이 고통받았던 역사, 외국 군대 코인만 믿고 존버하던 역사는 한국전쟁에서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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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땐 국가의 아들, 끝나면(혹은 다치면) 느그 아들”인 역사는 지금도 진행형이죠. 제대로 된 국제관계 인식 없이 듣기에만 시원한 헛소리를 해대는 유튜브 혹은 특정 정치세력을 비난할 목적으로만 각종 헛소리를 해대는 유튜브의 조회수가 수백 만에 이르는 것도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바로잡을 수 있었던 순간을 놓치는 나날들이, 우리에게도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선조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후손들이 그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참고문헌

 

(1)남은경, 『瀋陽日記』 연구 - 昭顯世子, 鳳林大君의 심양 체험을 중심으로 -」, 東洋古典硏究 22.- (2005): 31-60.

(2)이영삼, 「역주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국내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대학원, 2013.

(3)장경남, 「남급의 『병자일록(丙子日錄)』 연구」, 국제어문 31.- (2004): 139-170.

(4)조애중 저, 박경신 역, 『병자일기』, 나의시간, 2015.

(5)『계암일록(溪巖日錄)』 -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6)그 외 - <스토리테마파크>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 나온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절찬리 판매 중이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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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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