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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요약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릴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와 다른 사람은 불편하다. 문제는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해주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소수(약자)의 정체성은 다수(강자)의 인정 여부에 달려 있다. 소수는 홍콩인, 다수는 중국인이다. 갈등이 발생하고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은 다수(강자)인 중국인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일 테다. 

 

“왜 중국인은 홍콩인과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중국인과 홍콩인은 무엇이 다른가?”

 

홍콩 거리11.PNG

 

홍콩인의 성장 환경중 대표적인 특징 2개만 꼽으라면, ‘자유’와 ‘지켜지는 원칙(법률과 제도)’를 말할 수 있다. 

 

홍콩은 ‘익명성’ 또는 ‘내 마음대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등의 말로 표현하고 싶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해주는 사회였다. 

 

홍콩의 언론 자유도는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정치적인 자유도 마찬가지였다. 홍콩 주룽반도의 아파트엔 대만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와 중국을 상징하는 ‘오성홍기’가 자유롭게 걸려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유’에 대한 홍콩의 가치관은 ‘신호등에서 양쪽으로 차가 오지 않을 때 요령껏 길 건너기, 에스컬레이터 위의 보행’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지켜지는 원칙’. 지키지 못할 원칙은 만들지 않고, 일단 만들어진 원칙은 사회 전체가 절대적으로 지킨다. 일상생활 속에선 대표적으로 ‘택시 타기’와 ‘자동차 선팅’을 꼽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편에서, 링크)

 

그들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렇다면 중국인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길래 홍콩인과 충돌할까?

 

 

중국인의 성장 환경 : 국가와 당

 

중국(대륙)인들과 대화하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와 다른 사회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개혁개방으로 자본주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일당독재의 국가이기도 하다. 중국인 중 입만 열면 조국, 애국, 인민, 시진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사람들이 많다. 2021년 9월 말, 캐나다에서 귀국한 화웨이(華為) 그룹의 멍완저우(孟晚舟) 부회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으로 체포되어 가택연금 당한 지 2년 9개월 만에 정부가 보내준 전세기편으로 돌아왔다. 

 

귀국 과정을 보면, 애국주의 열풍 그 자체였다. 각종 매체를 통해 1억 명이 ‘영웅’의 귀환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녀의 도착 성명은 현행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도착 성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오성홍기’가 있는 곳에 신념의 등대가 있다. 

2. 평범한 중국 국민으로서 3년간 이국에 머물며 매 순간 당과 조국, 인민의 관심과 보살핌을 느꼈다. 

3.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 국민의 안위에 관심을 보여준 것에 깊이 감동했다. 

4. 조국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방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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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華為) 그룹의 멍완저우(孟晚舟) 부회장의 귀국 장면.

 

 

중국인들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두뇌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 담론에 시시각각 노출된다. 영화와 드라마는 "주선율(主旋律)", 즉,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면서 애국심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주제가 대부분이다. 당연히 청 말의 근대사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항일전쟁 시기를 다루는 내용이 많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40주년인 1989년에 개봉되었던 ‘개국대전(開國大典)’이 첫 번째 주선율 영화였다. 중화인민공화국 60주년인 2009년에 나온 ‘건국대업(建國大業)’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연히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1년 올해도 주선율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졌다. ‘1921’과  ‘혁명자(革命者)’, ‘중국의사(中國醫生)’ 등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921은 중국 공산당이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1차 당대회를 열고 창당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혁명자는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 창당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베이징대 교수 출신 혁명가 리다자오(李大釗) 전기 영화, 중국의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맹활약한 중국인 의료진을 조명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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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1921’과 ‘혁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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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 ‘장진호’

 

중국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2,300억 원)와 최대인원(12,000명)이 투입된 애국주의 영화가 지난 9월 30일 개봉되었다. ‘6·25’가 배경인 영화 ‘장진호(長津湖)’를 눈물 흘리면서 본 관객이 많았다고 한다.

 

일관되게 청나라(만주족)가 무능해서 중국이 외세에 수모를 당했다는 점, 국민당이 부패해서 공산당이 승리했다는 점, 민족의 존엄을 생각하는 공산당이 흘린 피로 항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역사의 도구화인데, 근대사와 현대사를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공산당의 영광을 위한 작업에 동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국공산당 덕분에 중국이 오늘 세계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예술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예술도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예술의 정치적 효용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회주의 사업에 동참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 감정에 호소해야만 조금 더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예술에는 낭만적 요소의 비중이 매우 큰 편이다. 그것을 혁명+낭만의 스토리텔링이라고 한다. 대부분 혁명 활동을 하다가 적들의 총에 숨진 남자친구(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혁명에 투신하는 애인(어머니)의 스토리 같은 것들이다. 이 경우 눈물샘을 강조하는 과장된 감정 표현이 필수적이다. 

 

스토리 구성이 복잡하거나, 사건 전개가 매우 논리적이거나, 주인공이 대단히 이성적일 경우,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선동이라는 목표를 무리하게 돌출시켜야 하기 때문에 작품이 유치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눈에 ‘못 봐주는’, ‘닭살 돋는’, ‘오글거리는’, 이른바 신파극 같은 드라마나 영화가 매우 많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스토리에 노출되어 올 경우 문제는 심각하다. 북한을 보자. 같은 사람, 그것도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과거 북한 응원단이 보여준 해프닝을 되새겨본다. 

 

 

홍콩과 중국 : 우리와 북한

 

2003년 8월, 대구에서 개최된 세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 북한의 응원단 303명이 왔다. 한 눈에도 고르고 고른 미녀 대학생들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예술이 '사용'되고 이 분야에서 미녀가 중용된다. 

 

미녀 대학생은 입만 열면 통일을 이야기했다. 기자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통일에 대한 언급은 빠뜨리지 않았다. 마치 통일을 전도하기 위해 파견된 선교단 같았다. 그렇게 중요한 통일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남한의 주민들은 그저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응원단은 내게 한 장면을 더 보여주었다. 

 

예천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갑자기 버스를 멈추게 했다. 그들이 달려간 곳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악수하는 사진이 실린 환영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오는 중이었다. 장군님 사진을 이런 곳에 걸어둘 수 있냐고 울고불고 항의하며 플래카드를 떼서 버스 안으로 모셨다.  

 

북한 응원단.PNG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북한사람은 이렇게 다르다. 정도가 덜하나 중국 사람들도 비슷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 이걸 뒤집어 보자.

 

국가사회주의 중국의 시각으로 홍콩을 바라보면? 홍콩은 국가도 민족도 모르는 한심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잘 교육된 문명인'인 자신들이 '한심한 존재'들을 깨우쳐줘야 한다. 권력층과는 별개로, 이런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불쌍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홍콩을 '해방(?)'시킬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던 게다.  

 

 

홍콩 주권 반환 의식에서도 볼 수 있는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1997년 7월 1일 0시 완자이의 컨벤션센터에서 중국과 영국이 주권 반환 의식을 거행하였다. 6월 30일 20시부터 불꽃놀이와 함께 4천여 명이 만찬을 함께 했다. 21시에는 중국의 인민해방군 5천 명이 중국-홍콩의 경계선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영국대표단은 찰스 왕세자, 토니 블레어 수상, 외상 등이었는데, 찰스 왕세자는 먼저 아래와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1. 홍콩은 분투 정신과 안정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성취를 창조했으며, 동방과 서방이 공존 공영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2. 1984년의 『중영공동성명』은 세계를 향한 장엄한 약속인바, 홍콩의 생활방식 불변을 보증했다. 영국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공동성명을 지지할 것이다. 

3.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가장 친절한 눈빛으로 당신들이 평범하지 않은 역사의 신기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주시할 것이다. 

 

중국대표단은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리펑 총리, 외교부장 등이었는데, 장쩌민 주석은 아래와 같은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 시각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는 초대받은 10만 명의 관중이 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1. 1997년 7월 1일, 오늘은 영원히 기억할만한 시간으로 역사책에 실릴 것이다.

2. 1백 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고, 홍콩이 조국으로 반환되는 것은, 홍콩 동포가 조국이라는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인바, 이로써 홍콩의 발전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3. 중국 정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일국양제 방침을 집행할 것이다.   

 

예상대로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국의 모든 신문은 ‘백 년 치욕이 끝났음’과 ‘마침내 돌아왔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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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논리로는 홍콩을 외세와 내부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인데, 티베트도 신장도 내몽골도 같은 논리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중국공산당을 홍보하기 위해 이것보다 더 좋은 테마는 없었다.

 

1997년 7월 1일 자로 중국이 홍콩에 대한 주권을 회복한 것과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가 태어났다. 홍콩특별행정구의 헌법인 『기본법』에 따라 홍콩의 수장인 행정장관이 취임했다. 『기본법』에 의하면 행정장관의 자격 요건은 다음과 같다. 

 

1. 홍콩특별행정구의 영구 거주권을 지닌 중국 국민으로서 외국 거주권이 없어야 한다.

2. 40세 이상이어야 한다.

3. 홍콩에서 연속 거주 20년 이상이라야 한다.

4. 선거위원회 위원 약간 명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홍콩특구의 행정장관은 홍콩 거주민의 선거로 선출된 후,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한다. 기존의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 각 분야에 큰 권력을 향유한 데 비하면, 행정장관의 권력은 크게 축소된 것이다. 입법회의가 행정장관에 대한 탄핵권을 가지게 된 것 또한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이었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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