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 통수를 맞았다
"훈련은 계획된 대로 시작됐고, 진행됐으며, 종료될 것이다."
- 2월 15일 러시아 외교부 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의 발언 중 발췌
불과 보름 전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 관계자들,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러시아가 미쳤다고 전쟁을 하겠어?"
"잘해봐야 국지전이야. 돈바스 지역에서 좀 싸우다가 말겠지."
"희박하지만, 우크라이나를 핀란드화 시키는 정도로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러시아 체면을 살려주는 셈 치고, 민스크 협정을 지키는 흉내라도 내겠지."
등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참고로 민스크 협정은 2014년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루한스크 인민공화국, 러시아가 서명한 정전협정이다. 우크라이나와 돈바스 지역에서 분리 독립한 '자칭 국가'인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루한스크 인민공화국 두 국가가 휴전을 하고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 그 내용인데, 우크라이나가 협정을 지키진 않았다. 하긴 멀쩡한 자기 땅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지킬 리가.
출처 - <위키피디아 캡쳐>
러시아 외교부 장관이 발언 후 10일도 안 돼서 전쟁이 발발했다. 모두 뒤통수를 맞았다. 푸틴이 크림반도를 접수한 직후부터 미친 듯이 금광 개발에 나섰고, 보유 외환 중 달러의 비중을 극도로 낮추고 위안화로 유로화 비중을 올렸을 때, 금 보유량을 계속 늘렸을 때도 사람들은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푸틴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쟁을 하겠어?"
라는 생각을 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판단이다. 이건 러시아의 '목적'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이유가 뭘까?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다. 잘 되면 포섭하거나 친 러시아 정권을 들어서게 하는 게 최선이다. 그런데 전쟁이라고?
2. 현대전의 명분
승리의 역사보다는 패배, 억압, 고통의 기억을 공유할 때 민족성이 생겨난다.
- 에르네스트 르낭의 책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발췌
르낭은 독일이 게르만 민족으로 뭉친 계기는 나폴레옹의 침략에서 시작됐다고 봤다. 갑자기 19세기 사상가의 이름을 꺼낸 건 '민족주의'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근대국가는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는 계기 중 가장 큰 것이 '전쟁'이다. 침략전쟁의 피해자일 경우, 민족주의는 더욱 발흥하게 된다.
더구나 20세기를 거치면서 '침략전쟁'은 악으로 규정됐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전의 역사와 달리 선제공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다. 현대전의 법적인 양식미(?!)를 만든 두 개의 법 조항을 보자.
"모든 회원국은 그 국제관계에 있어 다른 국가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기타 방식으로도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간다."
- UN 헌장 2조 4항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국제연합회원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처를 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 자위권을 행사함에 있어 회원국이 취한 조치는 즉시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된다. 또한 이 조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조치를 언제든지 취한다는, 이 헌장에 의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권한과 책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아니한다."
- UN 헌장 51조
법적으로 21세기 인류 사회는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는 '자위권 행사 전쟁'만을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한다. 놀랍게도 UN 러시아 대사도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우리는 UN 헌장 51조에 나와 있는 집단 자위권에 따라 전쟁을 하는 거다. 우리 정당하다!"
이러고 앉아 있다. 이는 누가 봐도 '명분' 면에서 멍청한 짓이다. UN이 아무리 핫바지라고 해도 현대전에서 '침략전쟁'은 누가 봐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궁극적 목표.
"우크라이나를 포섭"
하는 것과도 상충한다. 당장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들고 일어날 건 누가 봐도 뻔하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에 협력할까? 오히려 러시아가 원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더 높다. 당장 핀란드와 스웨덴 등등 러시아 머리 위쪽의 중립국들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완벽히 나토 쪽으로 기운 느낌이다. 실제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출처 - <한겨레>
3. 중국이 맞은 통수와 푸틴의 큰그림
만약... 정말 만약에 푸틴이 이 모든 걸 계산했다면, 푸틴이 생각하는 건
"새로운 냉전"
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다면 그다음은 바로 발트 3국이다. 물론 발트 3국은 나토 가입국이라 쉽게 치고 나갈 순 없겠지만, 그게 수순이다. 그리고 폴란드와 대치상황을 벌일 거다.
이때쯤 되면 폴란드와 그 뒤 독일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왜? 우크라이나부터 시작해서 독일까지 중부 유럽의 탁 트인 평원은 냉전 시절부터 기갑 웨이브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냉전 시절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기갑 예비부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전쟁 나면 바로 예비부대를 움직이던 곳이다(괜히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며, 군사 장비가 잔뜩 있었던 게 아니다).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접수했더라면 그 이후에 러시아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토가 움직일 거다. 폴란드에 선을 그어놓고, 나토는 미친 듯이 군비 확충을 할 거다. 만약 큰 그림을 그린다면 푸틴은,
"중국과 손잡고 새로운 냉전을 만들자! 어차피 중국도 우릴 레버리지 삼아 미국과 힘겨루기하려고 하는데... 이 참에 우리도 한 번 제대로 나가봐야지!"
이런 계산까지도 갔을 수 있다. 미국과 영국 동맹이 혈맹의 느낌이라면, 중국과 러시아의 동맹은 화학적 결합이 아니라 서로 이용할 것만 이용해 먹는... 냉정한 의미의 동맹이다(참고로 중국은 러시아와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을 배우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 그러나 푸틴은 중국과 제대로 결합해 미국과 대응하려는 거 같다. 아니면 이런 식의 전쟁을 생각할 수 없다.
실상 러시아에 제대로 속은 건 중국이다. 중국도 철석같이,
"러시아가 미쳤다고 우크라이나를 치겠어?"
이렇게 믿고, 자국민 6천 명을 우크라이나에 그대로 방치해 뒀다가 지금 난리가 났다. 그만큼 푸틴의 결정은 '이질적'인 결정이다.
더 놀라운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쉽게 이길 거라 자신했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가 바로 전쟁 준비다.
"러시아 전쟁 물자는 3~4일 치만 준비돼 있는 거로 보인다. 전쟁이 열흘 정도 지나면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은 소진될 것이다."
- 前 에스토니아 군사령관 리호 테라스의 발언 중 발췌
이게 뭘 의미할까? 푸틴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던 거다. 종합해 보면 푸틴은 빠르게 우크라이나를 접수하고 미국 그리고 나토와 다시 선을 확실히 그으려 했다. 결국은 신냉전으로 이어지는 거겠지만, 러시아의 ‘체급’은 소련의 그것과는 다르기에 중국과 손을 잡고 미국과의 대결을 준비한다는 게 푸틴의 큰 그림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첫 단추부터 어그러진 거다. 이렇게 되는 순간, 중국의 입장도 곤란해지게 된다. 중국은 강제로(!) 러시아와 같은 배를 타게 된다. 여기서 러시아를 버릴 수도 없게 되고, 그렇다고 같이 가기에는 부담 가는 상황이 되는 거다.
4. 왜 푸틴은 불가능한 일을 하려하는가
이해가 안 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도대체 뭘 얻겠다는 걸까? 예전처럼 친러 정권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할 거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유로마이단 혁명을 일으켜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몰아낸 건 러시아도 봤지 않은가?(야누코비치는 친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전쟁까지 일으킨 상황이니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등을 돌릴 건 뻔하다.
출처 - <연합뉴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를 보라. 냉전 시절 그리고 그 이전에 소련에 당한 게 있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자마자 이들은 러시아에 이빨을 갈았다.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등등 냉전 시절, 소련이 힘으로 내리누른 게 그들이었는데, 힘의 공백이 생기자마자 폴란드・헝가리・체코는 바로 나토 가입을 해 버렸다. 그들은 소련에 억압받은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라고 다를까? 아무리 같은 슬라브 민족이라지만, 이 침략의 기억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깊숙이 각인 될 거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게 폴란드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이다. 이건 정말...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인류애의 발현'이라고 보일 수도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대한 두려움."
"러시아라는 공통의 적에 대한 적개심"
2차 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가 주축이 돼서 폴란드 사람을 12만 명 이상 죽인 보위인 학살 사건(The Massacres of Poles in Volhynia)이 지난 세기에 있었는데, 이렇게 서로를 돕는다니... 아름다운 인류애로 볼 수도 있겠지만, 러시아에 대한 증오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증오보다 더 깊었던 게 아닐까.
만약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쉽게 접수했다면, 대치선은 명확해지고, 신냉전은 시작됐을 것이며, 다음 목표는 발트 3국이 됐을 거다.
그러나 젤린스키가 이렇게 버틸 줄은 아무도 몰랐다.
추신: 이번 전쟁은 모든 내로라하는 군사, 외교 전문가의 예상이 틀린만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 나 역시 푸틴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허나, 현재 지정학적으로 '완충지대 국가'의 운명을 타고있는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한국에겐 결코 남일이 아니기에(한반도는 시시각각 선택의 갈림길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럴 때야말로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겠다.
국제관계 차원에서 벌어지는 큰그림을 보면서 푸틴의 의도에 보다 정밀히 접근함이 옳을 터, 오늘은 간단한 썰로 마무리해 죄송하다. 내일까지 보다 깊은 분석기사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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