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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 하나, 기승전정치 대화

 

“술자리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치를 주제로 대화하라”라는 말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과 정치적 지향점이 다를 경우, 대판 싸우고 영원히 안 보게 될 것이고 정치적 지향점이 같을 경우에는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나. 바꿔 말하면,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선 웬만하면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국회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항상 저 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간다. 꼭 술자리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먼저 정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샌가 침 튀기며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럴 땐 깊은 ‘현자타임’에 빠진다. 아무리 정치가 밥 먹여주는 일을 하고 산다지만 이럴 일인가 싶다. 아주 사소한 주제로 시작한 대화들은 어느 순간 정치라는 깔때기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든다. 가끔은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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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호인들과 야구를 할 때도 그랬다. 야구장에 달린 비디오 판독 장치를 보면서 대한민국 생활체육 인프라와 예산이 많이 늘었다며, 해당 지역 정치인의 역량과 체육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공이나 잘 맞출 일이지..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어김없다. 대기업의 독과점 문제, 전통시장과의 상생에 대한 현안, 어느 기업 총수가 시작한 ‘멸공 챌린지'에 담긴 남루한 멘탈리티에 대해서 쇼핑메이트와 이야기한다. 피시방에서 롤이나 스타크래프트를 하다가도 난데없이 게임 중독이 질병이라고 강변했던 어떤 국회의원을 떠올린다. 음식을 시켜 먹을 때도 배달 수수료 문제의 개선 방안에 대하여, 오랜만에 고향의 부모님과 전화 통화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고향 지역 민심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국회 보좌진이 되면, 어딜 가든 정치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말이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나를 중심으로 알아서들 정치 이야기를 한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들이 많다. 단순히 자신들의 의견만 들어줬으면 하는 뜻이 담겨 있는 사람들도 있고, 어떻게 판단해야 맞는지 정치 일선에 있는 나에게 의견을 구하는 경우도 있고, 평소 진짜 궁금했던 걸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가끔은 ‘어디 한 번 반박 해보시지?’라는 식으로 논쟁을 신청하는 자들도 있다.

 

국회 보좌진들이라고 모든 시사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고 자신이 속한 상임위나 모시는 의원에 따라 시사 이슈에 대한 이해도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잘 모르는 주제가 나오면, ‘보좌관이 그것도 몰라요?’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쫄리는 마음으로 전문가인 척 떠들어대야 할 때도 있다.

 

어쩔 때는 정치의 늪에서 사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딜 가서 누굴 만나도 정치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말이다. 아, 물론 케바케다. 뉴스나 이슈에 밝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한국 정치, 정당의 역사, 근현대사를 줄줄 꿰며 빛나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정치덕후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로 좋은 공부가 된다.

 

그르타. '기-승-전-정치'의 대화 패턴, 보좌관의 대표적인 직업병이다.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꺼이 나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할까. 간단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많은 부분이 정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현타가 오더라도, 정치에 대한 대화는 언제나, 기꺼이, 성심껏 하게 된다. 나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증상 둘, 뉴스 중독

 

대부분의 보좌관들은 주요 이슈들에 관해, 종편이나 시사채널에 나와서 떠드는 시사평론가 정도, 혹은 그 이상 수준으로 내용을 숙지하고 있다. 하루 종일 뉴스를 끼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좌관의 하루는 뉴스로 시작해서 뉴스로 끝난다. 아침 라디오를 켜고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 후 일하는 동안 정치 뉴스를 직간접적으로 계속 접한다.

 

심야 마감 뉴스는 보좌진들의 수면 ASMR이다. 이것 역시 자의반 타의반이다. 직접 포털이나 지면에서 확인하는 뉴스들도 있지만, 직장동료들의 단톡방이나 업계(?)관계자들과의 톡방에서 끊임없이 정치 관련 뉴스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모시는 의원과 중요한 논의는 오늘 주요 뉴스를 서로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대화가 이루어진다. 의원이 놓친 뉴스를 채워주는 것은 보좌진의 '업무'지만, 의원을 통해 새 소식을 듣는 것은 보좌진의 '태만'이다.

 

그러다 보니 뉴스에 대한 강박마저 생길 때가 있다. 뉴스를 많이 보는 것과 그 뉴스를 이해하는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보좌관들마다 뉴스를 해석하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다. 그 능력의 차이, 즉 '미디어 리터러시'가 보좌관들의 실력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 기사 헤드라인 혹은 뉴스를 작성한 기자 이름만 보고도 어떤 의도로 쓰인 기사인지 바로 이해하고 머릿속의 정보와 조합하는 일은 하루 만에 되는 일이 아니다.

 

증상 셋, 핸드폰 중독

 

지금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보좌진이라고 하면 국회의원들 심부름꾼 정도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었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보좌진을 대리기사처럼 부리는 일은 예삿일이고 보좌진을 시켜서 자기 집 반려견 산책을 시킨다거나 회의에 들어가 있는 동안 대형마트에서 장보기를 시켰다는 흉흉한 소문도 꽤나 들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되려 보좌관들의 갑질 문제도 심심치 않게 들리니 보좌관들의 위상이 많이 올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했어도, 보좌진들이 절대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의원과 보좌진의 연결고리, 핸드폰 되시겠다. 보좌진들은 정말로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정말이다. 이 방면에선 중학교 2학년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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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보좌관>

 

일단 의원님의 전화가 언제 올지 모른다. 부재중 전화에 모시는 의원님의 번호가 찍혀있는 것만큼 심쿵 하는 화면도 없다. 내가 아는 어떤 동료는 목욕탕을 간다거나 샤워를 할 때에도 핸드폰을 지퍼백에 넣어서 들어간다. 전화를 한 번에 못 받으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의원님 덕분에 불안해서 때가 불려지지 않는다나. 의원들의 보좌진 활용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주말 밤낮없이 보좌관들을 찾는 의원들도 많이 있다. 그때마다 의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보좌관들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손에서 놓기가 힘들다.

 

어느 국회의원은 보좌관과 개인톡방을 자신의 메모장처럼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메모장처럼 떠오르는 생각을 보좌관과 1:1톡방에 그냥 쓰는 것이다. 의원 입장에서야 떠오르는 족족 톡방에 쓰고 있으니 자신의 보좌진에게 깜빡 잊고 지시를 못할 일은 없겠지만, 그 카톡을 받는 보좌관은 의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소한 무의식의 한 조각을 붙잡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의 단어인가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 뜯게 된다. 만약 당신이 여의도 인근에서, 핸드폰을 꼭 붙잡고 밥을 먹다가 깍두기를 씹을 때마다 화면을 확인하는 사람을 발견했다면, 그 자는 높은 확률로 국회 보좌관이다.

 

증상 넷, 휴식결핍증후군

 

국회의원 임기는 딱 4년이다. 임기 4년 동안의 지상목표는 다음 총선에서 한 번 더 당선되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임기 하루하루는 허투루 쓸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평일에는 국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지역으로 내려가 지역 행사, 대회, 축제, 회의 및 경조사, 각종 친목 모임 등에 열심히 참석하며 얼굴도장을 찍으며 자기 지역 표밭 관리에 매진한다. 4년 내내.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이다. 보좌진들도 주말 밤낮없이 의원과 함께 한다. 그러다 보니 보좌진들은 주말이나 근무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의원이 깨어있는 모든 시간이 근무시간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모시는 의원이 외국으로 출장을 가는 무두절(無頭節)을 보좌진들은 가장 행복해 한다. 의원님이 7박 8일로 해외출장이라도 간다고 하면 보좌진 입장에서는 7박 8일 휴가와 다름없다. 물론 일은 한다. 심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의원이 외국으로 출장을 가면 최소한 즉각 대응할 일이 없어 몸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하지만, 최근 2년간 코로나 덕분에 국회의원들의 해외출장이 극히 드물었다. 의원 해외출장으로 얻게 되는 막간의 휴식마저 끊긴 것이다. 더 안타까운 부분은 요즘 해외 로밍도 잘되고 인터넷도 잘 터진다. 빵빵하게. 해외에 있더라도 보좌진들과 연락이 끊길 일이 없다. 의원의 해외 출장으로 얻게 되는 메리트는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다. 이제 완벽한 무두절은 핸드폰을 반납하고 가야 하는 방북 일정 밖에 남지 않았다.

 

정치 이슈라는 것은 예측하기 힘든 면이 많다. 장기적 관점에서 휴가 계획은 어림도 없다. 주말 계획도 확신을 못할 때가 많다. 코로나19 같은 역병이 갑자기 창궐한다거나, 대형 산불이 난다거나, 북한에서 미사일을 쏜다거나, 당선자가 급작스럽게 용산으로 집무실을 이전한다고 떼를 쓴다거나 하는, 1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게 터지면 휴가는 다갔다고 봐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터져 쉬지 못하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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