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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민주주의>-룰라에서 탄핵까지(2019)

다큐멘터리-브라질

121분,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페트라 코스타

 

 

3년 전에 나온 다큐멘터리다. 지난 대선에서도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다큐를 다시 꺼내드는 것은, (해당 다큐의 수많은 리뷰가 쏟아졌음에도) 더 할 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난 브라질의 역사를 모른다. 현재의 정치상황은 더욱 모른다. 그러니 영화에 담긴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꽤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 즉, ‘민주주의는 허약하다’는 대명제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브라질은 우리와 꽤나 흡사한 역사를 지녔다. 1964년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 정권이 1985년까지 통치했고, ‘반공’을 내세우며 빈약한 정통성을 대체하고 관료와 권위주의로 경제개혁을 이뤄 안정을 도모했으며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군부가 무너지며 직선제를 쟁취한 것도 판박이다.

 

플렌테이션 농장주로 상징되는 매판자본이 수백년 간 기득권을 유지하고 9개 가문이 브라질 전체 언론사를 장악하고 있는 것도 기막힌 기시감을 선사한다.

 

 

브라질 진보 대통령 룰라와 지우마 호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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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진보 정치의 상징, 룰라는 어떤 인물인가. 1969년 노동운동가로 대중 앞에 선 룰라는 노동자당(PT) 창당멤버로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4위의 성적을 거뒀다. 이후 1986년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연방하원 선거에 출마해 최다 득표로 중앙무대에 입성했다.

 

89, 94, 98년 세 차례 대권 도전에 나선 룰라는 돌풍을 일으켰지만 그의 급진적 이미지는 기득권 및 중산층의 반감을 샀고 연거푸 2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룰라는 온건중도적인 노선을 채택하고 정장을 입는 등 온건한 이미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부통령 후보로 브라질 최대 섬유기업 소유주인 주제 알렌카르를 임명함으로써 보수세력 및 중도우파와 연합해 결국 대선에서 승리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1990년대 룰라와 노동자당의 등장 & 중앙정치에서의 선전은 우리나라 노동 및 진보계열에도 큰 자극이 되었으며 결국 민주노동당 창당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2005년 룰라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하자 국내 진보계열에선 룰라를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배신자, 회색분자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방한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일부를 보자. 

 


 

조선일보 직원 : ‘노동자 빈민을 위한 대통령’을 표방해 당선된 뒤 기업가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며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다던데?

 

룰라 : 나는 확고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적이 없다. 늘 독립적 입장을 추구하면서 노조와 노동자당을 이끌었다. 사람들은 '대통령 되더니 노조 지도자 시절 이야기와 다른 소리를 한다'고 비난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노조 지도자 룰라'는 노동자들만 대변했지만, '대통령 룰라'는 1억 8000만 명의 브라질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한다. 브라질 대통령이 어떻게 노조 지도자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룰라는 경제정책 등에서 ‘신자유주의자’, ‘배신자’ 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밀어붙인 진보정책은 브라질을 일정 부분 바꿔놓았다. 바로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ília)’라 불리는 빈민구제 정책이 대표적이다. 우리로 치면 일종의 기초생활보장제도인데, 이게 아주 잼있다.

 

빈곤층에 무상으로 일정금액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 만약 결석률 15% 이상이면 지원을 보류한다. 이 정책으로 아이들의 출석율 및 진학률은 비약적으로 늘고 아동노동 착취는 줄었다. 극심한 빈곤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정상적인 영양이 공급되었다. 이 정책은 극빈층의 감소와 중산층 증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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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링크

 

룰라는 말했다. 

 

“부자한테 돈 쓰는 건 투자라고 하면서, 왜 빈민에게 돈 쓰는 건 비용이라고 하는가.”

 

부정부패와 기득권 카르텔, 극심한 빈부격차 등으로 찌들어있던 브라질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브라질에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대통령 룰라는 연임에 성공하고 80% 넘는 지지율 속에 퇴임했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으로 지우마 호세프를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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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마 호세프는 누구인가. 호세프는 2010년 10월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복한 가정 출신이지만 사회주의자가 되어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 조직에 참여하는 등 무력투쟁에 나섰고 1970년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당한 후 1972년까지 3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출감 후 경제학을 전공하고 1985년 지방정부 관직에 진출했다. 2001년 노동자당(PT)에 합류하였고 2002년 대선 당시 룰라 캠프에 합류해 에너지정책을 입안했다. 2005년 수석장관(우리로 치면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2010년 3월까지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2010년 룰라의 후계자로 대선에 나서 대통령에 당선, 2014년 연임에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까지였다. 움츠려있던 기득권층의 강력한 백래시가 작동한 것이다.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겹쳐보인 대한민국

 

국제 원자재값 폭락과 무리한 월드컵 개최 등으로 촉발된 경제위기가 호세프의 지지율 하락을 촉발했다는데 내가 경제에 대해 뭘 알겠냐. 여하튼 잇단 경제침체로 들끓는 민심을 틈타 호시탐탐 탄핵을 노리던 연방하원에 ‘부정회계’(공공은행으로 보낼 기금을 늦게 보내 예산상 구멍이 난 것을 일종의 허위 회계로 메운 것)라는 꼬투리를 잡혀 2016년 탄핵당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호세프 대통령의 부패 문제는 터럭만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른바 ‘창의적인 회계’라 불린 ‘부정회계’가 불가피하진 않았는지, 근본적으론 시스템 상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는지, 그동안의 정부 관행은 어떠했는지 따위는 일체 따지지 않고 이를 ‘탄핵 찬/반’으로 몰아갔다(호세프 본인은 이전 정부에서도 늘상 하던 관행이라 문제가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여기서 또 강렬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다큐 곳곳에서 드러난다. 

 

탄핵에 나서는 어느 야당 정치인에게 “호세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유대감이 약하다. 여당 의원들과조차도 포옹이나 악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답한다. 다시 말해 “설렁탕 한그릇 안 사더라”는 말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뿐만인가.

 

탄핵 찬/반 토론에서 어느 우익 정치인은 “아이의 성별을 바꾸자고 제안하고 6살 때부터 섹스를 가르침으로써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렇다. 브라질에도 전광훈이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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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당한 뒤 지우마 호세프.

 

그리고 이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소위 ‘세차 작전’이 박자를 맞춘다. 2014년 세르지우 모루 연방판사에 의해 시작된 반부패 전쟁을 일컫는데, 실로 성과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반부패 수사인 ‘마니폴리테(깨끗한 손)’에서 영감을 받은 모루 연방수사판사(브라질에선 판사도 검사의 수사영역 중 일정부분을 담당하는 ‘수사판사’라는 직역이 있다고 한다)의 거침없는 수사로 수많은 정치인들과 거대기업 간의 부정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모루 연방수사판사는 일약 국민적 스타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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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 당시 연방수사판사.

모루는 지우마 호세프가 탄핵당한 뒤

당선된 보우소나루 정부에 법무장관으로 입각했다.

 

이 타이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호세프는 물론이고 건설사로부터 3층 복층 아파트를 뇌물로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룰라 또한 아무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기소를 결정한 검찰은 “룰라가 아파트를 뇌물로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룰라가 아파트를 뇌물로 받은 것을 숨긴 증거”라는 기괴한 논리로 기소를 강행했다는 점이다(모루 판사 앞에서 룰라는 “빈정거림은 그만두고 제발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려달라”고 하소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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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브라질에서 부패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수사재량을 허용한 것까진 좋았으나 수사와 기소를 한 손에 틀어쥔 수사주체의 막강한 권한이 얼마나 황당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그 부작용 또한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둘째,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룰라 집권 시절 이루어진 ‘사법부 독립’이 그 바탕을 이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동안 부정부패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던 개혁 주체인 집권여당 노동자당(PT) 또한 기존의 부패사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내로남불’의 덫에 빠져든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룰라는 재판에 넘겨지고 수감되며 다큐는 끝을 맺는다.

 

 

교묘하게 이상한 나라가 되다

 

옛날엔 사람을 고문해서 죽이는 살인마 군부정권과 싸우면 됐다. 간명했고 단순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다. 저들은 더 이상 총칼로 우릴 대하지 못한다. 하여, 방법은 더욱 교묘해졌고 치밀해졌다. ‘법치’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로남불’이라는 감정에 불을 지른다.

 

트레버 노아라는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데일리쇼에서 오바마 대통령 재임 기간 벌어졌던 천인공로할 스캔들 10가지를 정리해 발표했다. 일테면, 정장에 국기 배지 미착용, 영부인과 데이트, 사우디 국왕에게 고개 숙임, 정장 재킷 안 입고 근무, 헬멧 쓰고 자전거 타기 등등이 그것이다. 미국 수꼴세력(폭스뉴스)이 오바마를 향해 어떠한 프로파간다를 벌여왔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상이다.

 

해당 영상 시청하기.

 

노무현-문재인 재임 기간에도 똑같았다. 샤넬에서 협찬 받아 외교 의전으로 이용한 자켓을 샤넬측에 반환했고 샤넬은 이를 기념해 한글박물관에 (같은 아이템의) 자켓을 기증했는데 조선일보 직원은 (샤넬측의 답변을) “못믿겠다”고 한다. 아주 지독한 ‘답정너’다. 심지어 몇 만원 짜리 브로치를 제작한 제작자가 TV조선 직원에게 앞뒤 맥락과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했음에도 해당 내용은 쏙 빠지고 ‘의혹’ 보도는 계속된다. 

 

2012년에도 18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의혹을 제기하면서 일파만파 커졌던 노무현과 김정일의 NLL 대화록 논란이 있었다. 새누리당은 대화록 기밀문서를 다 까고 나서도 한창을 사골 우리듯 우리다가 정치적 목적이 달성된 후에야 “노무현은 NLL 포기 발언 안했다”고 말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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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링크

 

브라질은, 이런 하찮은 정치공세를 통해 2019년 극우 정치인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이 되었고 2022년 4월 9일 현재, 자국민 66만 명이 코로나로 사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입시 관련 표창장과 인턴경력의 문제는 엄중히 형사처벌되지만 주가조작은 문제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위기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키워드로 ‘사법 쿠데타’를 손꼽는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쪽을 보자고 말하고 싶다. 

 

 

남겨야 이기고, 이겨야 이룰 수 있다  

 

다큐에서 많은 장면이 등장하듯, 브라질 또한 우리처럼 국민여론이 날카롭게 양분되어 있다. 심지어 반룰라파 시위 군중 중에는 “과거 군사정권이 그립다. 군부의 쿠데타를 원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그런 이들이 그냥 ‘또라이’라고 손가락질 하면 그 뿐일까. 윤석열을 찍은 1천 6백 7십만 유권자가 하나같이 모두 지능이 떨어지는 반푼이들일까(우리끼리 솔직히 얘기하자면, 걔들 지능이 좀 떨어지는 애들이란 강력한 심증은 갖고 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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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카르텔을 형성해 온 강고한 기득권층이 있다. 거기에 기생하고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세력 또한 시퍼렇게 살아있다. 이건 그냥 상수다. 어느 날 유혈혁명이 일어나 광화문 조선일보 사옥이 성난 시민들의 손에 불타는 날이 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걔들은 그러려고 태어난 것이다. 직업이다. 하는 일이 그렇다. 강남3구가 윤석열에게 90% 가까이 몰표를 주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에게 왜 짖느냐고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브라질의 정치상황을 다룬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길어 올려야 할까.

 

‘검수완박’ 법안 통과 중요하다. 언론개혁법 또한 중요하다. 다큐에서도 룰라는 슬픈 얼굴로 임기 중에 언론개혁을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하는 일로 꼽았을 정도다. 헌데 여기서 나는 약간의 희망과 불안이 동시에 생긴다. 

 

바로 저들이 그토록 울궈먹는 민생과 경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생과 경제에 대한 체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이슈에서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큰 줄기, 이슈파이팅이 되는 정책을 죄다 우리편이 잡고 갔으면 한다. 지난 선거를 보자. 아무리 방역을 잘하고 사망자를 줄이고 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해도 경제, 부동산 들먹이며 거기에 불을 붙이니 얼마나 쉽게 정권이 넘어가는가.

 

코로나 방역과 사망자를 줄인 게 민생과 경제와 아무 상관이 없나?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체감상, 그리고 교묘한 말장난으로 그걸 동 떨어져 있다고 느끼게 할 뿐이다.  

 

난 민주당이 이걸 잘 연결했으면 한다. 예를 들어 검수완박이 중요하고 언론개혁이 중요한데 중도층의 입장에서 이 이슈만 얘기하면 민생과 경제와 연결해서 읽기 어렵다. 이 이슈가 넓게 봤을 때, 왜 민생과 연결되고 경제와 연결되는지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한다. 

 

즉, 이기는 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결고리라고 본다. 왜 민주당이 이걸 해야 하냐고? 국힘보단 티끌만치라도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수권정당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의 결벽증, 강경함, 조급함, 이제 많이 던졌다. 많이 이겨봤기에 그럴 수 있었다. 이럴 때일 수록 무엇이 한 표라도 도움이 될는지 생각했으면 한다.

 

무슨 정책이든 무슨 이슈든 민생과 경제와 연결하자. 해서,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민주당은 민생과 경제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걸 보여주고, 그렇게 심은 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나가자.  

 

그걸 남겨야 다시 이길 수 있고, 이겨야 이룰 수 있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위기의 민주주의>를 다시 보며, 내가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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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