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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의 결혼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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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의 주요 입안자이자 불교계 대표 중 한 명이었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1910년, 중추원과 총독부에 건백서(建白書)를 보낸다. 그 내용의 핵심은, 승려의 생산 활동과 결혼을 허용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승려의 결혼과 생산을 금하는 일은 전통이지만, 불합리한 전통이다. 각국은 제국주의적인 인구 부양을 서두르고 있는데, 우리만 구태의연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게다가 계율이란 원래 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고지식하게 지키려고만 하니 참으로 슬프다.

 

승려의 결혼을 허해달라는 한용운의 주장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2차례의 건백서에 그치지 않고 1913년 발표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에서 더욱 강하게 논의했다. 승려의 결혼을 주장하는 그의 논리는 이랬다.

 

⓵ 자손을 낳는 건 자연스러운 윤리에 부합한다.

⓶ 승려들은 인구 재생산이 안 되므로, 국력 발전상 손실이 크다.

⓷ 결혼 문제 때문에 하산하는 승려가 많아, 불교 전파에 지장이 크다.

⓸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인 본능을 강제로 혹은 형식적으로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치 아니한 불상사가 일어난다. 고려 말기에 있었던 불교의 부작용을 생각해보라. 승려의 결혼 규제가 오히려 풍속을 헤치게 된다.

 

지금 보면 도대체 무슨 약을 해야 이런 생각이 나오나 싶지 않은가? 참 까다롭고 난감한 지점을 그는 “이런 얘기를 하면 당연히 반대하겠지만”이란 서두를 던지면서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래서 현대 연구자들은 이 부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용운이 처했던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맥락적 이해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만해의 급발진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그런데 한용운이 겉으로 쓴 글 이면에 밝히지 못한 속뜻도 있는 것 같다. ⓵과 ⓶는 ‘윤리’나 ‘국력 발전’과 같은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불교 후계자 양성 문제와 맞물려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승려가 되는 사람의 다수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배경으로 했다. 승려가 되는 길이 거의 유일한 생존의 선택지였고, ‘진리를 깨달으리라’하는 굳은 각오를 하고 입산하는 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드물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불교가 쇠락하고, 불교가 하고 있던 사회 안에서의 역할(예컨대 민간 복지 분야)을 기독교 계열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선 절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계열 보호시설로 입소하는 것이 더 유리했다. 불교가 제공하던 철학적 세계관 역시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밀려 적절한 담론을 제공하지 못했다. 수행자 급감은 예견되던 바였고,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심각하다.

 

한용운이 이런 아이디어를 내게 된 배경에는 아무래도 일본 불교를 돌아보고 온 경험이 깔려있지 않을까 싶다. 1908년, 한용운은 조동종 히로사마(弘眞雪三)라는 승려의 호의로 일본 불교를 잠깐 맛보는데, 이때 약 8개월간 조동종 대학에 입학한다. 조동종은 일본 내에서 승려의 육식과 결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종파 중 하나로, 한용운 또한 조동종 내에서 흘러나온 담론을 충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 불교는 적극적인 결혼과 자녀에게 주지를 물려주는 형태로 지금까지 존속해오고 있다. 또한, 일찍이 기업화된 형태로 일본인들의 장례 문화에 깊게 관여하면서, 혹자는 일본 불교를 이미 신앙이 사라져버린 ‘장례 불교’라 비판한다. 어쨌든, 방식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적어도 후계자 문제를 ‘해결’한 것만은 분명하며, 제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린 지금의 한국불교와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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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⓷은 앞선 두 가지 이유와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한용운은 사회진화론에 큰 감회를 받아 『불교유신론』을 작성했다. (그가 계속해서 인구나 국력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사회진화론적 맥락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유신론』 전반에 걸쳐 절간은 도심으로 내려와야 하고, 선 수행 중심의 불교에서 평범한 사람을 위한 불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불교가 세속과 다른 모습이 아니라, 세속 그 자체의 모습 속에서 빛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략을 적극적으로 취한 현대의 종단이 천태종이다. 천태종은 도심지에 대규모 사찰을 조성하면서 손가락 안에 드는 종단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⓸는 조금 더 의뭉스럽다. ‘예기치 않는 불상사’란, 다른 게 아니라 승려의 파계다. 그러면서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을 사례로 드는데, 승려들이 권력을 점유하고 남의 집 부인을 빼앗으며 풍속을 헤쳤던 시기를 일컫는다. 한용운은 무조건적인 규제가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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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육룡이 나르샤>

 

한용운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한국불교적인 대승불교’ 정체성에 기반한다. 그가 건백서에서 말했듯, 계율이란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이나 ‘매뉴얼’일뿐이며, 그것을 따른다고 하여 꼭 진리를 깨닫는 것은 아니었다. 대승불교, 특히 한국의 대승불교는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다르지 않고, 수행자와 평범한 사람이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며, 진리와 번뇌가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사찰에 가면 불이문(不二門)이란 대문에 있는데, 요로코롬한 엑기스를 잊지 말라는 뜻이다.

 

원효의 토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 교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례,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확실시되는’ 사례가 없다면 널리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런데, 있다. 바로 원효(元曉)라는 대스타가. 한반도 내부와 외부에 끼친 영향력으로 원효를 뛰어넘을 한반도 출신 인물은, 현재까지를 포함해서 없다. 원효가 누구인가? 한국사에서 손꼽는 섹드립인 ‘도끼 드립’으로 요석공주와 뜨밤을 보낸 인물이며,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불교를 대중의 품으로 인도한 ‘찐 보살’이다. 실제로 요석공주와 원효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 덕분에 그것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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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라는 롤모델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어쨌든 한용운은 원효의 길을 걸었다. 1931년 그는 결혼하여 50이 넘은 나이에 딸을 얻었으며, 늘 민중 속에서 함께하며 보살의 길을 걷고자 했다.

 

한용운의 주장은 ‘미친 소리’라는 비난도 들었지만, 일본 불교가 주도권을 잡아나감에 따라 점점 더 현실화되었다. 마침내 1926년 총독부는 승려의 육식과 결혼을 허용한다. 이에 반대해 총독부에 또 다른 건백서를 보낸 한 명의 3·1 운동 불교계 민족대표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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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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