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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본 한일전

2010-05-2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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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5.화요일


테츠


 


 


 


 


올 것이 왔다. 일본으로선 절대 져서는 안되는 시합을 졌다.
 
일본은 스위스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마지막 홈경기를 한국으로 잡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 최고의 축구해설자로 꼽히는 세르지오 에치고는 지난 10일 일본축구대표팀 명단이 발표된 직후 가진 닛칸스포츠 긴급좌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왜 마지막 경기를 한국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유럽으로 갈지도 모른다. 아주 안 좋다."
 
세르지오는 일본의 패배를 이미 2주전에 예상했다. 그랬던 이유가 있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팀의 경기를 보고 경이롭다는 표현을 썼다. 중원의 압박과 정신력, 그리고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는 투지까지, 그는 모든 것을 한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엘라시코 테크닉을 처음으로 창시하고 리벨리노, 소크라테스 등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세르지오의 충고를 '아름다움'을 중시했던 일본축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역 시절의 세르지오 에치고



반면 한국축구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론을 꾸준히 키웠다. 투박하지만 축구는 이런 것이다. 중원을 지배하는 자가 시합을 지배한다. 중원에서 밀리면 안된다. 어떻게든 공을 빼앗아 전선으로 돌진해야 한다. 현대축구는 피지컬과 체력이 기본이다.
 
조직력은 그 다음 문제다. 그리고 한국축구는 감독의 지론에 따라 어떠한 기술과 조직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 두 기본요소를, 선수들이 이미 마스터하고 있었다.
 
두 상반된 길을 걸어간 양국의 축구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오늘 한일전이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당분간 한국은 일본에 질 수 없다 라는 확신과 함께.
 
오카다 감독은 시합 전날 인터뷰에서 "시합에 이기기 위해선 8백까지 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다.
 
한국도 물론이지만 월드컵에서 일본의 카운터 공격이 통할 상대는 없다. 혼다, 오카자키, 오쿠보가 네덜란드와 카메룬, 덴마크의 엄청난 피지컬, 혹은 유연한 디펜스 진영을 뚫을 수 있다는 상상은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말은 오카다 감독 스스로가 아직도 자신만의 전술을 확립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일본축구는 중원의 세밀한 패스웍을 중시하는 축구인데 스스로 중원을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휘관은 아무리 농담이라도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해선 안된다. 그 많은 중원자원, 이를테면 나카무라 순스케, 나카무라 겐고, 엔도, 하세베, 이나모토 등을 무시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공격 포메이션이다. 시합직전 연막전술을 편 거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할 정도로 공격적인 포메이션이다. 전술적으로만 보자면 4백에 보란치 2명의 4-5-1이다. 흔히 4-5-1은 양날의 검이라 한다. 극히 수비적이거나 극히 공격적이거나.
 
오늘 일본은 후자를 선택했다. 보란치 2명 때문이다. 선발멤버로 등장한 엔도와 하세베는 소속팀에서도 매우 공격적인 보란치다. 이들 앞에 늘어선 오쿠보, 혼다, 나카무라 역시 수비와 별 상관없는 공격적인 미드필더다. 그리고 원톱 오카자키.
 
즉 오카다 감독은 필드 플레이어 6명이 언제든지 골을 노릴 수 있는 공격적인 선수들로 시합에 나섰다. 왼쪽 윙백으로 나선 아베도 공격형 선수로 분류된다. 이 선수 면면을 보는 순간 필자는 오카다 감독이 얼마나 절박해 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아! 오카다 감독은 배수진을 쳤구나. 이 경기에서 못 이기면 월드컵 본대회도 끝이라는 걸 느꼈구나라는 초조함과 다급함이 전해져 온다.


 




난 오카다. 월드컵 4강을 꿈꾸는 남자...


 


급작스럽게 짠, 지금까지 수비적인 전술을 짜왔던 팀이 공격형 팀으로 하루아침에 전환될 리 없다. 중원 볼다툼에서 한국의 기성용, 이청용, 김정우, 박지성 등에 일일히 컷트 당하거나 밀렸던 건 이런데서 비롯된다. 수비 경험이 거의 없는 선수들이 프리미어 등 해외리그와 상무에서 단련된 이들을 견뎌낼 수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몇 년간 나카자와와 함께 일본 중원을 지켜온 든든한 센터백 콤비 투리오는 아예 출전조차 못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포백 시스템을 완성시켰다는 팀이, 근 8년간 해 온 포백을 홈 마지막 경기에서 쓰리백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전반 6분, 센터백의 한 축을 담당한 곤노가 박지성을 놓친 순간 골문이 열렸다. 박지성도 대단했지만 곤노의 수비위치가 너무 올라갔다. 일본대표팀 센터백의 수비위치가 아니다. 투리오라면 마주보고 받았을 박지성의 공격을 곤노는 옆에서 차단하려 했고 그 순간 골이 터졌다. 1-0.
 
포메이션의 변경은 이래서 무섭다. 포백이 쓰리백으로 바뀌면서 센터백이 대인방어를 해야 하는 순간 위치선정에 곤란을 겪게 되고 그 곤란은 쉬이 파악된다. 하물며 프리미어 리그 최고 명문팀의 주전 스쿼드를 꿰차고 있는 박지성이 그걸 놓칠리 없다.
 
그리고 그 골이 터지는 순간 일본TV의 해설자들이 신음섞인 탄성을 내 뱉었다.
 
"에이스의 힘이 이런 거군요. 공을 잡자마자 풀 스피드로 달려나가 바로 골을 기록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슛입니다. 타이밍이 완벽하네요. 셋이나 달라 불었는데... 정말 박지성 대단합니다."
 
세르지오 에치고가 덧붙인다.
 
"세계(큰 무대)를 제대로 경험한 선수는 역시 그 실력향상이 상상을 초월하네요."
 





박지성이 골을 잡을 때마다 감탄사를 내 뱉는 실황진들. 다른 한국선수들이 중원에서 모조리 공을 커트할 때도 그들은 신음했고 자학모드에 빠졌다.
 
"한국선수들은 공을 잡는 순간 다음 동작에 바로 들어가네요."
"그렇지요. 일본선수들은 주위가 움직이지 않아요. 상대편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골을 넣지 못하는데 그냥 멈춰 버립니다."
"세컨드 볼을 그냥 보고만 있지요."
"측면으로 전개하지도 않네요. 중앙만 고집하는 단조로움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세르지오 에치고의 비수같은 비평이 꽂힌다.
 
"일본은 수비를 중시하는 바람에 수비는 평균이상 스피드를 내도 공격할 때는 그 스피드를 못냅니다. 저렇게 하면 아무리 공격적으로 나서도 점수를 못 뽑죠. 그나마 피지컬이 세다고 하는 혼다가 오늘 시합에서는 어디 있는지 안 보이네요. 결국 저 정도 수준이었던 겁니다."
 
역설적으로 오늘 한일전에서 가장 눈에 띄고 열심히 했던 일본선수는 혼다, 나카무라, 오쿠보, 하세베, 엔도 등 스타선수들이 아니라 오른쪽 풀백으로 나선 나가토모 유토(23, 長友佑都) 였다.
 
그리고 이 FC도쿄의 젊은 영건이 전후반 90분간 보여준 플레이는 지난 8년간 한국이 걸어온 길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팀은 그라운드 전체를 질주하면서 악바리처럼 상대에 엉겨 붙는 나가토모가 열 명이었을 뿐이다.
 
그 악바리 근성을 유럽 축구는 높이 샀고, 그 열 명 중 몇 명을 자기네 클럽으로 끌여 들였다. 짧게는 1년, 길게는 7년씩 그렇게 해외에서 시간을 보낸 우리 한국선수들은 악바리 근성에 유럽의 피지컬과 테크닉을 몸에 익혔고, 무엇보다 시합을 이기는 법을 알아 버렸다.
 
한국선수들은 천천히 프리킥 하며, 쓰러지면 적당히 시간을 끌고, 심판에게 환한 미소를 띠며 자연스럽게 영어로 어필하는 천부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반면 일본선수들은 조급하다. 오쿠보는 엔드라인 바깥의 물병을 걷어차고 하세베는 소리를 지른다. 심약한 나카무라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중원의 사령관 나카다 히데토시는 터키와의 16강전에서 한 골을 내 준 후 다른 선수들이 고개를 숙이자 "그라운드를 쳐다보지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오노가, 이나모토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지만 남아공의 중원 사령관이 될 나카무라 순스케는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교체됐다. 한 때 일본축구를 견인했던 그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세르지오를 비롯한 실황해설자들이 후반 35분 말한다. 공교롭게도 핏치 해설자도 나나미 히로시다. 나나미 역시 한국축구에 경의를 표하는 축구인 중 한 명이다. 왼발의 달인과 일본 최고의 축구해설자가 입을 모은다.
 
"한국은 지금 승점 3점을 어떻게 하면 얻고 또 지킬 수 있는지, 이기는 축구를 보여주고 있네요."
 
후반 45분이다. 일견 일본이 공격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볼 점유율도 높았지만 프로들의 눈을 속일 순 없다. 세르지오의 말이다.
 
"한국 수비가 좀 느슨해지긴 했지만 이럴 때 일수록 카운터 공격을 조심해야..."
 
그 순간 휘슬이 울렸다. 단 한번의 스루패스. 일본팀이 그토록 강조했던 선수비, 후역습의 스루패스에 의한 상대 뒷공간을 노리는 카운터 공격이 한국팀에서 터져 나왔다. 반쯤 넘어지고 있던 박주영. 웬만하면 "저건 시뮬레이션 아닌가요?"라는 말이 나올 법한데 오늘 해설자들은 가차없다.
 
"골키퍼가 먼저 (박주영 선수를) 건드렸네요."
 
2-0.


 


모든 것이 끝났다. 일본축구의 마지막 몸부림은 역설적으로 오카다 감독의 과도한 욕심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난 오카다. 월드컵 4강을 꿈꾸는 남자...


 


차라리 정상적으로 갔어야 했다. 혼다가 중앙을 점령하는 바람에 나카무라와 하세베의 포지션이 겹쳤고 엔도가 중원으로 나서는 바람에 아베가 그 자리를 메꾸느라 오버래핑을 못했다.
 
나가토모 역시 공격적인 선수들 때문에 핏치 곳곳에 생겨버린 구멍을 메우느라 사이드를 못 달렸다. 무한한 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오버래핑을 펴는 것이 주특기인 선수가 수비하느라 정신을 다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세트피스 플레이를 제외한 필드 플레이에서의 크로스가 8개 밖에 안 나왔다. 현대축구에서 이렇게까지 사이드 공격을 죽이는 축구도 오랜만이다.
 
기본기 없는 조직축구가 급조된 전술을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오늘 일본축구가 확실히 보여줬다.
 
사요나라, 사무라이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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