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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7.목요일

 

이동섭

 

 

 

 

 

 

 

 

 

 

 

이 글은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15분정도부터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던 질문, ‘도대체, 나에게 <노무현> 무엇이었을까?’, 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라할 수있다. 즉, 앞으로 다른 답들도 계속 될 예정이란 말이다. 그래서, 여기는 노무현의 어떤 특정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총론으로써 그와 그가 살다간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프롤로그


 


며칠전 까페를 지나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을 보았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좋아하는 그 화가를 나는 특별한 이유없이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순간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 그림은 내 발을 붙들어 세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그림속 인물은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내 온몸은 그 무엇인가에 홀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없었다. 마치, 막다른 길목에서 시베리안 허스키와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만약 움직이면, 날카로운 송곳니로 나를 물어버릴 것같았다. 몇 사람이 바보처럼 거리에 가만히 서있는 나를 흘끗 보고,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 그 그림을 흘끗 보고, 다시 나를 흘끗 보고, 지나쳐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베리안 허스키가 제 집으로 들어가듯, 그 그림의 마력에서 풀려났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피했다. 도대체, 저 그림과 나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이유를 알려주기 전에, 우선 나를 압도한 그 그림을 여러분께 공개한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년. 1888년 12월 24일,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랐다. 하지만, 그림속에는 ‘그것’이 그려져있다.  


 


그렇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다. 예술사의 가장 큰 스캔들중 하나인 고흐의 왼쪽 귀 절단 사건을 두고, 여러 설들이 있다. 고흐는 남불의 아를에 머물던 시절, 동료 화가인 고갱과의 말다툼 후 집으로 돌아와 면도칼로 스스로 왼쪽 귀를 잘랐다. 혹자는 고흐가 미쳐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고, 혹자는 당시 함께 지내고 있던 이기적이고 지랄같은 성격의 고갱의 탓이 크다고도 한다. (고흐가 죽고 난 후 고갱은 이 사건을 단순히 ‘미친’ 고흐의 광기탓이라며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고 있다.)


 


이 사건후, 고흐는 한 번도 자세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없지만, 남불의 작은 도시에서 이 사건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결국, 이 일로 고흐는 정신병원에 자의반 타의반 입원하게 된다. 그래서, 미친 고흐가 그린 그림이니 저런 느낌이 풍기는 것은 당연하지라며 단정지어도 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의 그림이 내뿜는 기묘한 에너지로부터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잘 그렸다 / 못 그렸다가 아니라, 그림속의 고흐는 무언가 너무 멀리 나아가버린 느낌이랄까, 100미터 달리기에서 결승점을 통과한 후에도 계속 달려가고 있는 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뭔가 말로 정확히 비유하기는 힘들지만, ‘저 건너로 이끄는 힘’같은 걸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보기가 두렵지만 보고 싶고, 보지 않으려 할수록 보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있을까? 예술의 영역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걸 아우라Aura라고 부른다.       


 


 


고흐증후군 ? 가난한 예술가의 숭고한 예술혼


 



 

서양 미술사에서 고흐는 마르셀 뒤상, 앤디 워홀, 백남준처럼 시대를 바꾼 혁신적인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의 이름은 그렇다. 말인즉슨, 그는 서양예술사에서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로서 기록되었다. 잘 알다시피, 그는 평생 물질적으로는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그에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만의 그림을 추구해서 아주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생전에는 소수의 예술애호가나 비평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그림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가 죽고나서 10여년이 지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뀐다. 모든 사람들이 고흐의 작품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비참하게 살다간 고흐는 아주 독창적인 화가, 위대한 예술가를 넘어서, 이제는 종교적인 성인처럼 대접받게 되었다. 이렇듯, 시대와의 불화속에서도 꿋꿋히 꽃피워낸 고흐의 숭고한 예술혼을 가리켜 ‘고흐증후군’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일례로, 19살무렵에 이미 두각을 드러내 여러 후원자들의 경제적 도움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에곤 실레도 왠지 자기 작품이 위대해보이려고 겉으로는 가난한 척했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고흐란 이름은 어떤 이들에게는 울컥이는 죄책감, 어떤 이들에게는 분노의 좌절감을 안겨준다. 전자는 ‘지못미’ 이고, 후자는 ‘질투’이다. 물론, 우리같은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화가의 비참한 삶과 훌륭한 작품은 다소 로맨틱한 느낌을 형성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현상은 전적으로 그들의 문제이지 고흐의 잘못은 아니다. 고흐는 그저 그가 믿은 대로, 그가 추구하는 그림을 평생에 걸쳐 치열하게 그렸을 뿐이다. 그 결과, 우리는 고흐의 삶과 그림을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없게 되었고, 서서히 고흐개인의 아우라는 고흐작품의 아우라와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고흐의 삶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 한 켠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바람은  불어오는 것일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것은 두 방향에서 불어온다. 초기의 고흐를 사로잡았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 이라는 예술관이 하나이고,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이 팔릴 정도로 (예술시장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평생토록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해야했던 그의 현실이 또다른 하나이다.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무능, 전자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달라고 말해야하고, 후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여곡절끝에 찾은 자기 삶의 존재 이유인 예술(그림)을 포기해야했다. 하지만, 고흐는 포기할 수없었던 전자를 추구하면서 경제적 무능함이 주는 고통을 속으로 삭였다. 바로, 그런 그의 고통을 우리는 노란 해바라기와 불꽃처럼 피워오르는 남불의 풍경화, 현기증처럼 피어오르는 자화상과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밀밭의 풍경등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는 꼭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예를 들면, 초기의 고흐에게 갤러리스트들이 조언한 것처럼, 대중적으로 팔릴만한 작은 사이즈의 풍경화같은 걸 그리면서 지방의 그저 그런 화가로는 살 수는 없었을까? 불행하게도, 고흐는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갈 수는 있지만, 갈 필요가 없는 혹은 가서는 안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는 서로 양립할 수없는 두 길을 다리가 찢어질 정도로 힘겹게, 또 힘겹게 내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통속에서 몸부림칠수록, 아이러니하게 그의 캔버스는 점점 위대해져갔다. 하지만 더이상 그 불화를 감당할 수없게 되었을 때,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몸을 쏘았다. 이런 고흐의 삶을 생각할수록, 자꾸만 누군가 떠오른다. 내가 어떤 의지를 갖고 일부러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마음속으로 그가 떠오르는 것이다. 고흐처럼, 그 사람도 한국사회와는 양립할 수없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결국, 쓰러졌기 때문이다.


 


 
 


            <검찰청 앞에 선 노무현>  (5월 23일 MBC 텔레비젼촬영)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오전 9시경. 그 날은 파리에서 유학중인 나는 곧 출판될 책의 최종 교정을 위해, 한국에 잠시 들어왔던 차였고, 오랜만에 누나 가족들과 함께 경남 양산에 위치한 콘도로 1박 2일간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택시를 타자마자, 다급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뉴스를 다급하게 말하고 있었고, 여자 기사분께서 ‘노무현이가 조금전에 죽었다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네?’라고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별로 그 소식에 개의치않은 우리 가족들은 예정된 여행을 예정대로 떠났고, 나는 예정대로 떠난 그 여행 내내 예정과는 달리 불안과 짜증으로 멍한 상태였다. 어린 조카가 잔다는 이유로, 라디오는 줄곧 꺼진 상태였고, 나는 그 소식의 전말이 궁금했지만 더욱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통약을 먹고, 물을 마셨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혼자 거실로 나와 텔레비젼을 켰다. 볼륨을 모두 죽이고, 화면만 보았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눈물은 나질 않았다. 고향 마을에서 밀짚모자를 쓴 노무현대통령은 자전거를 타고 논두렁을 달리고 있었고, 사저 근처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채널을 바꾸었다. 권양숙 여사와 청와대를 걷고, 새로운 대통령과 웃으며 악수를 한 후, 버스를 타고 검찰에 소환되고 있었다. 채널을 바꾸었다. 황망한 표정의 유시민과 분노로 무언가를 소리치는 안희정이 보였다. 내 머리속으로 검은 구름들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다시, 채널을 돌렸다. 굳은 얼굴로 무언가를 담담히 말하는 문재인이 보였다. 문득, 하루 종일 내 머리속을 떠다니던 검은 구름이 비가 되어 코로, 눈으로 쏟아졌다. 텔레비젼을 껐다. 화면이 사라진 텔레비젼을 보니, 지금 이 모든 일이 도무지 현실같지가 않았다.



내가 한국에 들어온 후부터, 모든 언론들은 그의 비리의혹을 비리로  확정지어 생중계하고 있었다. 법원에 가기도 전에 그의 죄는 확정되었고, 죄가 없는 그는 우리에게서 버려지고, 그들에게 짓밟혔다. 모든 게 너무나 이상했지만, 한국사회는 그 이상함을 너무 자연스럽게 당연시했다. 마치, 그 모습은 발가벗고 거리를 걷던 왕을 보고도 아무말 하지 않던 백성들이 나오는 동화같았다. "야,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벌거벗고 거리를 지나가신다!" 라고 진실을 말한 아이의 목소리는 현실에서는 너무 작았고, 동화와는 달리 대다수의 어른들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옷벗은 왕은 계속 당당히 거리를 설치고 다녔고, 사람들은 침묵했다. 


 


 


노무현증후군, 원칙과 상식



예술과 정치는 여러모로 단순히 비교하기 힘든 분야이다. 하지만, 내가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노무현을 떠올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편의 연극을 쓴다면, 분명 그들은 같은 상징성을 가진 인물로 등장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모두 화해할 수없는 실천적 갈등 상황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페드라, 메데아등등)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고흐의 그것이 가난과 예술이라면, 노무현의 그것은 한국사회와 노무현 정신이라 할 수있다.



노무현정신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마다 떠올릴 가치는 다를 수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없는 사실은 그가 ‘원칙과 상식’을 지키고자 끝까지 노력한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그런 그가 대통령은 되었지만, 원칙과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 자신의 미숙함과 잘못도 있겠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 사회와 노무현이 내세운 ‘원칙과 상식’은 양립할 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등장이 못마땅한 집단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노무현도 고흐처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가 추구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해할 수없는 갈등 상황은 그들의 목숨을 서서히 옥죄어 오기 시작했고, 벼랑끝에 몰린 그들이 선택할 수있는 것은, 자살뿐이었다. 그리고, 서양 예술사에서는 ‘고흐 증후군’이 생겨났고, 한국(정치)사에서는 ‘노무현 증후군’이 부활했다.


 


여기서 ‘태어났다’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노무현이 이회창을 이기고 대통령이 되었던 순간, ‘노무현 증후군’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에 비추어볼수록, 자꾸만 자칭 한국사회의 주류 집단들의 더러운 얼룩이 선명히 드러났다. 이제, 사람들도 그걸 알아챘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그들은 반칙과 부정한 방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도 변화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신, 노무현이 가진 상징성(원칙과 상식)을 없애버리려고 갖가지 교활한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이익앞에서 그들의 결속력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굳건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줄기차게 다양한 방법으로 줄기차게 생산해낸 노무현에 대한 조롱과 증오에 한국 사회가 감염된 것이다. 더이상, 노무현 정신의 긍정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퇴임이후,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었을 때에도 이 ‘노무현 증후군’은 부활하지 못했다. 그저, 한국 사회는 그를 쿨한 시골 할아버지의 이미지로 가두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광우병사태로 촛불정국이 가속화되었고, 한국 보수의 이익 대변자인 (거짓말)1등신문과 (부패한) 큰집은 그들의 무능과 거짓을 덮기 위해, 링밖의 노무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노무현과 몇 남지 않은 그의 세력은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억울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자, ‘노무현 증후군’은 노란색의 500만명이상의 ‘지못미’로 부활했고, 한국역사에서 노무현은 잊을 수없는, 잊혀지지 않을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7년.


 


이런 시대와의 불화를 겪은 공통점외에도 고흐와 노무현은 너무나 많이 닮아 있다. 노란색을 미칠 만큼 좋아했던 고흐와 노무현의 상징이 된 노란색, 당시 미술계의 주류세력들과는 달리 20살넘어서부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고흐와 한국 자칭 주류세력속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부산상고를 나와 노동자, 인권 변호사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죽은 후에는 서양예술사에서 최초로 예술 영웅으로 재탄생되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된 고흐와 대통령직에 있을 때에는 이것도 노무현 탓, 저것도 노무현 탓, 모든 게 다 노무현 탓이라고 조롱받았지만, 봉하마을로 돌아간 후에는 서민적이고 소탈한, 권위의식없는, 국민을 섬겼던 서민 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최초의 정치인이 된 노무현등, 이외에도 고흐와 노무현의 닮은 점은 너무나 많다. 이 이야기는 <고흐의 왼쪽 귀와 이름없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계속 하겠다. 그래도, 살짝 예고편삼아, 다음의 평가를 받은 이는 누구인지 한 번 맞혀봐라. ( )에는 정치(인) 혹은 예술(가)란 단어를 넣어서 읽으시면 되겠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고, 타고난 (   )이었으며 …” “ (   )에 대해 대단히 훌륭한 관점을 가졌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쉬지않고 달렸으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독특하고 강인한 인간성을 가졌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과연, 누구에 대한 평가일까? 사실, 괄호안에 예술이든, 정치를 넣든 별로 상관이 없다. 그래도 답이 궁금하다면, 이 글의 마지막에 알려주겠다. 여하튼,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마지막 순간, 마지막 말씀마저도 아주 닮아있다. 


 


1890년 7월 27일 오후, 고흐는 권총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 테오에게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울지마,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 거니까.” 


 


7월 29일 화요일 새벽 1시 30분,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고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소멸했다.


 


“이제, 돌아가고 싶다.” 
           


 


                <버스에서 내려 검찰청으로 걸어들어가는 노무현>


                                5월 23일  MBC 뉴스 속보 촬영


 


2009년 5월 23일 이른 아침, 노무현은 그의 사저 뒷편에 위치한 높이 30m의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유서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같은 날, 경상남도 양산시 부산대병원에서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 문재인은 그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너무 슬퍼하지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보다시피, 고흐와 노무현이 남긴 마지막 말은 너무나 닮아있다. 그들은 죽음을 결심하던 순간, 그리고 죽어가던 순간, 아마도 같은 무엇을 깨닫고 느낀 듯하다. 고흐가 돌아가고 싶다던 그곳이 새로운 삶이었을까 ? 아니면, 평화로웠던 어린시절 그가 사랑했던 고향길이었을까? 어차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이 한조각이라고 믿었기에, 노무현은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있었던 것일까? 


 


 


그림과 역사를 위한 삶



자살할 당시 고흐가 입었던 옷주머니에는 테오에게 보내는 부치지 않은 편지한통이 발견되었다.


 


“그림에 내 삶을 바쳤고,  그래서 내 이성도 반쯤은 망가져버렸다.”   


 


자기 삶과 이성을 바쳐서 고흐가 그림을 통해 얻어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었길래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림을 그렸던 것일까? 1889년 1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것을 알 수있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내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이라도 주겠다.”


 


자신의 그림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고흐, 돈을 갚지 못하면, 영혼이라도 주겠다는 고흐, 그리고 또다시 동생에게 돈을 더 보내달라고 말해야만 하는 고흐, 나는 이런 고흐가 너무 아프다.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89년. 


 


그렇다면, 노무현이 추구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던 그가 말한 역사는 무슨 뜻일까?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즈음, 그는 이런 연설을 남겼다.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셨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
(…)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 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다. 그는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있는 한국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상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니, 확정적이었다. 왜냐면, 그의 앞에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 머리를 짓이기며 부딪혀도 그 벽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00여년동안, 온갖 부정부패로 부귀영화를 누려온 세력들의 벽은 그 혼자 깨기엔 너무나 견고했고, 그와 함께 해줄 친구들은 별로 의리가 없거나, 그의 진심을 몰랐거나,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과 안희정, 그리고 유시민>에서 계속 하겠다.)


 


이렇듯, 노무현은 외형적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가 살았던  천민자본주의의 부패한 한국 사회가 그를 자살시켰다고 볼 수있다. 따라서, 노무현의 죽음은 자살의 형태를 띤 타살이라고 불러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자살은 영원히 수동태로 말해져야한다. 고흐역시 그러하다. 당시 자본주의/부르주아 사회는 국가나 자본가들에게 팔리지 않을 음울한 그림을 그리는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심지어, 정신병자로 낙인찍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렸다(고흐가 실제로 미쳤는지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다. 실제로, 고흐는 광기어린 행동들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아주 정상적인 사고를 했었다).


 


자기 내면의 고민인 가난과 예술의 갈등도 견디기 버거운데, 자신을 광인으로 단정짓고 취급하는 사회적인 시선까지 더해지자, 더이상 그는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살을 강요당했다고 할 수있다. 여기서, 고흐와 노무현을 자살시킨 당시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할 수있는 단어는, 고갱과 조선일보라 할 수있다. (이 이야기는 <노무현과 진보의 신화>에서 계속 하겠다.)


 


 


고흐의 선물



고흐가 죽고 6개월후, 평생토록 물심양면 그를 지원해준 동생 테오도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들의 죽음은 몇몇 예술가그룹에서 동정과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사회적으로 아직 그들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즉, 고흐는 지방의 그저 그런 화가, 혹은 약간 가능성을 인정받던 네오 인상파 화가중 한 명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던 테오의 미망인 조안나가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들을 분류하고 고흐의 작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면서부터 고흐(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차로 고흐는 고흐가 되어갔다. 그리고, 테오의 아들이자 고흐와 이름이 같았던 어린 빈센트가 네덜란드정부와 협의하에 197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고흐 미술관을 건립하였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고흐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동안 그림으로 그려진 적없던 남불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고, 누군가는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추구하다보면 그 결실은 사후에라도 얻게 될 것이라는 교훈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만약 우리가 고흐를 사랑한다면, 당신의 고흐가 어떠하더라도 나는 나의 고흐가 더 우월하다며 당신을 설득할 마음은 없다. 우리 각자가 보는 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고흐를 사랑하면 된다.



고백하자면, 내게 고흐는 모든 것을 유용성으로 판단하는 자본주의 사회제도에 대항한 화가이다. 부자들의 집 벽에 걸릴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당시 사회에서 고흐는 그들에게 팔릴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그림으로 위로하고자 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파리, 아를, 생 레미등을 거치면서 색채가 밝아지기도 했지만, 그는 팔릴 만한 그림보다 그리고 싶은, 그려야한다고 믿은 그림들만을 그렸다. 이걸 노무현식으로 말하자면, 이로움과 의로움이 부딪힐 때, 고흐는 의로움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흐의 예술관은 당시 부르주아사회에서는 아주 낯설고, 불온한 것이다.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 묘지에 함께 안장된 고흐와 동생 테오


 


 


노무현의 선물



노무현의 서거로 받을 수없지만 받아야만 하는 선물이 우리앞에 던져졌다. 잘못 배달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발신자가 그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누구는 포장이 마음에 안든다면, 발로 차버렸고, 누구는 공짜라며 덥석 쥐어들고 기분좋게 흔들어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 선물에 묻은 외로움의 피를 보지 못하다니, 그 선물에 담긴 절망의 냄새를 맡지 못하다니. 나는 선물앞에서 무릎꿇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내미는 손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머니속에서 쉽게 손이 빠져나오질 못했고, 겨우 손을 꺼내었을 때는 꽉 쥔 주먹이 풀리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도망을 쳐도 그 선물은 포장이 뜯기지도 못한 채 또다시 우리앞에 던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피할 수없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기나긴 글을 썼다. 나의 질문은 간단하다. 노무현이 우리에게 준 그 선물을 어떻게 해야하나 ? 예상했겠지만, 나는 그 답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노무현은 우리에게 누가 던져준 답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먼저 그 답뒤에 숨겨진 질문을 먼저 찾아야함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봉하마을 가서 부엉이 바위 보고, 사진 몇장 눈물 몇 방울로 기록되고 말 대상이라면, 이제 당신은 노무현을 잊어도 좋다. 지난 1여년간 슬퍼한 걸로 충분하다. 더이상 그에게 괜한 부채의식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없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문득, 그가 생각나거나 문득, 물기밴 공허함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노무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이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쉽게 그를 잊어서는 안된다.


 


눈물은 쉽게 마른다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물론, 언제까지나 울고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그 눈물을 흘린 이유까지 쉽게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이유로, 지난 1여년동안 서울에서, 파리에서 나는 그 질문을 항상 주머니속에 넣어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 파리의 카페에 걸린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 선물에 대한 나의 질문을 찾았다. 고흐는 그누구도 찾지 못했던 남불의 평야와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올리브 나무, 별이 빛나는 론강의 밤풍경, 누런 밀밭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치열하지만 따뜻하게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곁에서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노무현들을 찾을 수있는 눈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그들을 외롭게 내버려 두지말자. 더이상, 그들을 한국사회가 자살시키도록 방치하지 말자. 무릇, 사랑은 함께 지키는 것이다.  


 


 


                       2009년 5월 27일, 오후 5시 57분. 봉하마을.


 


 



p.s 1 - 소제목들을 노란색, 이미지 설명을 파란색으로 한 이유는, 고흐에게 노랑과 파랑은 행복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노무현의 상징도 노란색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파란색이 되어 노무현의 행복을 완성해보자는 그런 어떤 마음에서….



p.s 2 -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고흐이다. 참고로, 고흐의 가치를 알아챈 최초의 평론가중 한 명인 옥타브 미라보의 글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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