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27 목요일
충용무쌍
2004년 3월 12일 대통령이 탄핵 당했다.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법안은 가결되었다. 반칙인 물리력까지 동원하고도 여당에겐 그걸 막을 힘이 없었다. 카메라는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김근태의 얼굴만 계속 비췄다. 뉴스를 보며 다들 말이 없었다.
그러나 움직임은 그 말없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손잡고, 거기 193명의 신사숙녀 여러분! 지금 당신들이 국민의 뜻을 대신했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이건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은 국민을 욕보인 거다!
한 달 남은 4월 15일 총선, 이번엔 당신들 차례다!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그때의 기억
더 이상 볼 수 없는 KBS 시사투나잇 방영분
그렇게 신명나고 기다려지던 선거가 또 있을까? 사람들은 노래까지 부르며 4월 15일을 기다렸다. 우리는 무적의 투표부대다, 언제까지 욕 만하며 지켜 볼 텐가, 오라! 투표부대로!
결국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 우리당은 152석을 얻었고 제1당이었던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밀려났다. 자민련은 비례 대표 1번까지 탈락하는 바람에 김종필 총재가 낭인이 됐다. 민주노동당은 불판을 옆구리에 끼고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누가 뭐래도 그 날은 투표부대의 승전 기념일이었다.
정말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뭔가가 이루어졌다는 환상 속에서 황홀했다. 노무현, 보통사람들의 대통령. 여태껏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특정 학벌, 정치적 파벌, 금권과 재력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대통령. 그랬던 그에게 이제 든든한 방패를 달아줬다고 안도했던 거다.
그게 가장 큰 실수였는지도 모르고.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는데.
철따라 우는 철새들이 날아간 벌판에서 152라는 근소한 과반은 어디까지나 산술적인 과반이었다. 하루 아침에 모두 다 바꿨다는 생각은 어리석었다. 작은 걸음이나마 멈추지 않는 꾸준함이 우리에겐 더 절실했던 것인데.
그래서 파도처럼. 늘 파도처럼. 제자리에서 오고 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세 걸음 앞서나간 뒤 두 걸음 밀려났다고 기죽지 말고 한걸음 밀려 났으면 두 걸음 앞서 나가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파도처럼, 파도처럼 바꿔가자. 변화와 개혁이라는 큰 파도도 가까이에서 보면 드나듦을 반복하는 잔물결들의 모임 아닌가.
이제 노무현도 없고 김대중도 없다.
시사투나잇도 없고 돌발영상도 없다.
촛불을 집어삼킨 파도는 역류하려든다.
그러나 아직 우리 손에는 투표용지가 남아 있다.
우리, 파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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