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근육병아리는
요리에 관한 어떤 정식 교육도 받은 적 없으며,
오직 유튜브와 만화책으로만 수련 중인 야매 수산인으로
기사에 담긴 그 어떤 레시피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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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량진 답사기
내가 노량진 새벽 경매장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3년 전 어느 늦은 가을날이었다.
기사 마감하느라 당과 멘탈을 모두 소진한 새벽. 융털에 있는 에너지까지 쥐어짜 기사를 송고하고,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와 허벅지를 긁으며 지멋대로 자동 재생되는 유튜브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구글의 알고리즘이 난데없이 나를 노량진 수산시장 경매장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었다.
제정신이라면 컴터 끄고 발 닦고 잠이나 잤겠지만, 이틀 밤을 새고 캔맥주 세 캔을 때린 나는 당시에 상당히 맛이 간 상태였다. 무작정 새벽에 택시를 잡아타고 노량진에 가서 경매장을 구경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컨디션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처음 들어선 새벽 경매장은,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졸라 신나 보였고,
이후 심심할 때마다 뻔질나게 드나들게 된다.
정들면 장사 없다고, 처음에는 이색히는 뭐하는색히인가 의아해하던 중도매인 형님들도 점점 안면을 내주었고,
새벽의 검투사들과,
커피도 때리고,
밥도 묵고,
싸우나도 가고 마 다 해써 하다 보니,
노량진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자꾸 뭘 더 하고 싶어진다.
급기야는 생선을 집에까지 들고와,
회를 치는 짓을 일삼게 되는데,
이게 또 하다 보니 개꿀잼이었던 것.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으며,
강호의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온/오프라인의 여러 스승님을 찾아뵈며,
수련에 매진하게 되는데,
물지게를 져나르듯 해를 거듭한 결과,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바다의 온도에 따라 바뀌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였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들어갈 때가 되면 다음 타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미련 없이 떠나는 그 개쿨함.
그렇게 몇 해를 보내다 보니 진열된 물건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처지가 되었고,
어느샌가부터 그 익숙함에 시장의 풍경이 무뎌져가고 있던 요즘.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수산물 권태기에 빠져있는 근병을, 3년 전 처음 노량진에 들어선 그날의 압도적 흥분으로 완벽히 되돌려 놓게 된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고
생선의 이름은 지역마다, 시장마다, 그리고 개체 크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노량진에서 '딱돔'으로 통용되는 이 녀석의 정식 명칭은 '군평선이'지만,
주산지인 여수와 고흥 일대의 식당에서는 '금풍생이'로 더 유명하다.
이 녀석은 시장에서 '병어돔'이라고 불리는데, 사실 병어나 도미와는 별 관계없는 '무점매가리'라는 생선으로 전갱이에 더 가깝다. 체형과 대가리가 뭔가 고급 어종인 병어랑 좀 비슷하게 생긴 김에, 기왕이면 더 있어 보이게 도미까지 붙이자! 해서, 병어+돔 이라는 네이밍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원 근처 아파트에 '메트로 파크뷰'를 붙이거나 거실에서 물이 보이면 '센트럴 리버사이드'가 되는 세상에, 병어돔이라고 못될 게 뭐 있나. 맛만 좋으면 되었지.
장르를 낚시로 옮기면 생선의 명칭은 좀 더 다양해진다.
참돔배에서 작은 쁘띠 참돔이 걸리면 주변 조사님들이
"에이 상사리네 상사리여."
하며 코웃음을 치지만,
'빠가'라고 불리는 대물 참돔이 바늘을 물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줄이 터지기 전에 얼른 건져내기 위해 선장님들이 뜰채를 들고 호다닥 뛰어오신다. 출중한 사이즈의 '빠가'는 모든 참돔 낚시꾼들의 꿈이자 로망인 것.
어? 이 짤이 아닌디..
아 이거네.
아무튼, 빠가는 좋나 좋은 것. 좋빠가!
이처럼 한 생선이 여러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 이 녀석은 어획량이 적어서인지 제주에서 '며느리돔'이라 불린다는 것 이외엔 도감에 있는 명칭도 모르겠고, 노량진 형님들도 딱히 아는 정보가 없다.
일단 돔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 유선형을 가지고 있어서 '돔'이 붙은 것은 쉬이 납득이 가지만,
제주에 어떤 며느리가 살았길래, '며느리'라는 수식이 붙었는지 알 길이 없다. 대체 제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만 선어 상태로 노량진까지 올라왔음을 감안하면, 물속에서 갓 잡아 올렸을 때에 채색은, 갈색과 노란색이 우아하게 섞여 뭔가 기품 있는 모습을 뽐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 볼 뿐이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내장 빛이 아주 좋다. 선어라도 충분히 횟감이 될 느낌.
살도 단단하고 복막 안쪽에 피가 덜 맺혀있는 것으로 보아, 산지에서 피를 잘 빼고 온 것 같다. 한양가서 좋은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어느 제주 어민의 따뜻한 마음씨에 가슴 한구석이 뜨끈해진다.
무엇보다, 돌돔이나 제철 감성돔에 견줄 만큼 살이 단단하고 탄력 있다.
나 쫌 하는 놈이라는 녀석의 명백한 주장을 손끝으로 느끼며 파르르 떨고 있는데, 경매를 마치고 작업장에 내려온 엉클보스가 츤츤하게 뭘 또 하나 건넨다.
엉클보스 : 명색이 여름 횟감 기사라며. 그래도 민어 맛은 봐야 할 거 아녀?
이런 어린 민어는 '통치'라고 부른다. 제사상에 '통째'로 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6~7kg에 육박하는 어른 민어의 감칠맛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전자란 무서운 것. 이 녀석도 충분히 맛이 있다.
있을 건 다 있다. 민어의 코어, 부레.
살려서 오기 쉽지 않은 민어지만, 이 녀석은 용케도 숨이 붙은 상태로 노량진에 도착했다. 즉살시키려는데 신기하게도 꾸룩꾸룩하는 소리를 낸다.
바로 여기 부레에서 나는 공기 빠지는 소리다. 칼을 들이미는데 얘가 꾸룩꾸룩 울어서 뭔가 기분이 되게 이상하고 미안해진다.
민어가 많이 잡히는 임자도에서 '한 여름 민어 떼 우는소리에 잠을 설친다'라는 말이 있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땐, 거 으르신들 뻥이 심하시네 했는데. 이제 보니 그럴싸한 풍문인지도.
제주댁은 강한 사람이었어
며칠 후.
경찰국이 신설되고, 5살짜리 애들을 미리 입학시키려 그러고, 대통령 휴가에 맞춰 죽돌 편집장도 휴가를 떠나 딴지 편집부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통에, 적절히 회 쳐 먹을 때를 놓쳤다.
아마도 숙성이 끝까지 갔을 거 같은데.. 횟감이 되려나.. 구워 먹어야 하나..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일단 날을 세워 본다.
한 가지 믿을 만한 구석은, 며느리돔의 살성이 단단해서 숙성을 꽤나 잘 받아낼 것 같은 재질이라는 거였는데,
과연 과숙성 되었는데도, 살이 무너지지 않고 탄력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제주댁은 강인한 듯.
제주댁의 정식 명칭은 '구갈돔'으로 밝혀졌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엉클보스가 딴지에 협찬해 주고 남은 한 마리를 어느 업장에 보내는 걸 보고,
본업 스킬을 발휘해 추적해 본 결과, 또 어느 랜선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
농어목 갈돔과의 이 녀석은, 물이 따뜻한 연안 암초 사이에 산다. 밤이 되면 뾰족하고 긴 주둥이로 갑각류, 어패류, 두족류 등등 을 청소하듯이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피리 부는 도미(笛吹き鯛)'라고도 불린다고.
아무튼 바닷속에 맛있는 거란 맛있는 거는 다 쓸어먹는 녀석이라면,
필시 그 살맛도 좋을 터.
과연 풍부한 지방이 잔뜩 껴있다.
성게나 전복을 깨먹는 돌돔과 먹이활동이 비슷해서 그런지,
구갈돔도 돌돔 특유의 하얀 기름층이 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좌 돌돔, 우 제주댁.
제주댁도 어쨌든 돔이라 하니,
숙회를 시전해 보자.
뜨거운 물로 도미의 겉면만 살짝 익혀 껍질과 살 사이에 지방층을 활성화시키는 과정을 '마츠카와' 라고 하는데, 익은 도미 껍질이 소나무(마츠まつ [松]) 껍질(카와かわ [皮])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굳이 이렇게 번거롭고 귀찮게 해먹는 이유는,
졸라 맛있기 때문이다.
제주댁 한 접시 완성.
오늘의 마리아주는 울릉도 휴가 굿즈 독도 소주.
까볼까?
오 사쿠라가 아니네?
졸라 마시따.
사실상 방치된 과숙성임에도 불구, 살이 전혀 무너지지 않고 감칠맛을 온전히 담고 있다. 기가 막힘.
하루나 이틀 정도 빨리 먹었으면 식감까지 밸런스가 완벽했을 것으로 추정.
다음 타자 소나무 껍질 팀.
마츠카와 단계에서 껍질의 질감을 알 수 없어, 참돔 기준보다 뜨거운 물을 두어 번 더 부었는데.
안 그래도 될 뻔했다. 껍질이 질기지 않고 콜라겐 가득 쫀득한 식감.
숙성회는 역시, 밥이랑 같이 먹어야 제맛.
작년 겨울 청산도 농협에서 공수해 온 청태김을,
직화로 구워,
뱃살만 따로 모아 세팅.
입안에서 기분 좋게 풀어지는 숙성회의 살점이 밥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단맛을 멱살 잡고 끌어올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탄수화물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는 듯. 식탁 세계관의 최강자.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빠밤
이번엔 여름 횟감계의 셀럽, 민어를 까보자.
활어를 즉시 손질한 덕에, 맑고 깨끗하고 자신 있는 내부를 자랑한다. 아무리 손질을 정성스레 해도, 숙성체에는 미세하게 남은 이물질로 잔향이 남기 마련인데, 마치 방금 바다에서 올라온 마냥 쾌적하다. 기름이 많은데도 비린내가 적은 민어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역시 이름은 괜히 나는 게 아니다.
어리지만 당당한 살밥.
따로 숙성해둔 부레도 역시 상쾌한 컨디션.
어리지만 알 거 다 아는 통치회 한 접시 완성.
며칠 숙성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민씨 집안의 때글때글한 식감.
부레는 야들야들한 게 어쩌면 어른 민어보다 먹기에 더 좋은 거 같기도.
대민어까지 출세해 보지도 못하고, 통치로 삶을 마감한 녀석의 넋을 기리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자. 이것이 이 아이에 대한 예의.
곱게 옷을 입혀주고,
뜨끈하게 지져주면,
민어전 완성.
솔직히 이건 간절하게 맛없게 만들려고 해도 맛없기 힘듦.
보통은 없어서 못 먹는 부위라, 부레로 전을 굽는 경우는 잘 못 봤지만.
근본 없는 근병오마카세에서는 쌉가능하다.
이거 진짜 별미. 구운 인절미 같은 식감.
내는 마. 민어의 진수는, 탕이라고 본다.
무와 민어가 서로 전성기가 다른 관계로, 맛이 아쉬운 여름 무로 민어 맑은 탕을 끓이는 게 항상 안타까울 뿐.
달디 단 겨울 무와 여름 민어의 조합.. 그거슨..
서태웅과 윤대협의 콤비플레이를 보지 못한 능남 감독의 한스러움 같은 걸까.
아무튼 무는 거들 뿐.
서태웅, 아니 민어가 잘해줄 거라 믿는다.
육수가 뽀얗게 올라오면,
이제 마무리해도 좋다는 뜻.
간단하지만 어마 무시한, 민어 맑은 탕 완성.
맑고 고운 자태에 뭔가 마음이,
정갈해지고 겸허해지고 막 그르타.
그나저나.. 뭘 좀 사이즈 있는 걸 잡아와야 할 텐데.
이런 작고 귀여운 녀석들로는, 딴지 회식추진맨으로서 각이 서질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 근데 살점 이거 야들야들하니 쩌네.. 통치짱..
다음 화
<계속>
귀중한 횟감 지원으로
대물 확보 실패로 인한 기사 펑크를 막아주신,
노량진 수산시장 90번 중도매인 엉클마린(링크) 일동 여러분께 폭풍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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