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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 중심의 해체팀에서 딱 1년 1개월 일했다. 그만두기 한 달 반쯤 전, 사부가 후리도메(일본말로 ‘振り止め(ふりどめ)’. 수직 부하를 담당하는 서포트를 보강하기 위해 원형 파이프를 수평으로 잡아주는 것)에서 떨어졌다. 발뒤꿈치 뼈가 모두 부러졌고 병원에선 꽤 장시간 수술 끝에 어떻게 접합을 시키긴 했다.

 

하지만 뼛조각 몇 개는 제거하지 못했다. 결국 파이프 같은 곳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당시, 팀장과 총반장은 어떻게든 산재처리를 하지 못하게 했다. 사고가 났을 때부터 그들은 증거인멸을 했다.

 

팀장과 총반장의 사고 은폐에 맞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모으는 것이었다. 사고가 났던 그날, 퇴근길 운전은 내가 했다. 형님이 통증을 호소해 우리가 밥 먹었던 식당에서 얼음을 가져다줬던 것이 기억났다. 네이버 지도를 뒤져 밥 먹었던 식당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식당 주인 동의하에 그날 내가 얼음 가지러 뛰어왔던 것을 녹음했다.

 

사부가 어처구니 없이 다치고, 산재처리조차 막는 꼴을 보면서 분노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내 나이 50. 거의 10년 가까운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귀국했던지라 갈 곳이 없었다.

 

무조건 버텨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언 밥 먹는 사람들

 

그랬던 내 생각은 사고가 날 즈음, 들어온 신입 기공과 한 달 정도 지나 같이 술 먹으면서 깨졌다. 그 녀석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사부가 산재 신청한 것을 두고 팀장이 길길이 날뛰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불법체류자들이 많은 팀인 줄 알았다면 이 팀을 소개해 준 친구를 죽사발 내줬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른 해체팀은 높은 곳에 올라가지만 안전고리 정도는 걸어야 하고, 천둥번개 치는 와중에 외부에서 작업해야 할 일도 없으며, 언 밥 같은 건 먹을 일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언 밥"

 

아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실 게다. 거기서 일하면서 워낙 황당했던 일들이 많아 이제야 꺼내는 이야기인데, 구리시의 어느 상가 건물에 갔을 때 밥을 실외에서 먹어야 했다. 내부에 먹을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12월 중순이었다는 것이고, 배달 온 밥과 반찬은 이미 얼음 과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 얼어버린 밥이었다.  

 

식당에 전화해 욕을 퍼부었더니 그 사장이라는 작자는 “거기 팀원들이 추운 나라에서 온 애들이라며. 그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지”라고 이죽거렸다. 순간 정말 살의가 솟구쳐 올랐다. 그 꼴을 본 현장소장은 우리를 근처 분식점에 데려다줬고, 그 날 점심 즈음부터 소장 직권으로 식당을 바꿔버렸다.

 

언젠가 언 밥은 물론, 그 전에도 배달되어 오던 밥의 상태에 대해 요식업하시는 사장님께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냄새 많이 나던 반찬과 밥, 국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요식업자가 밥을 그렇게 만들면 그건 범죄라고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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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 밥 배달통을 보면 어이 없었던 새벽이 떠오른다.

 

여튼, 그 녀석 이야기에 같이 맞장구 치면서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때 처음으로 다른 팀들의 작업 환경은 물론 내 기능 수준에 따른 적정 일당이 얼마인지도 들을 수 있었다. 그 다음날로 그만 뒀다. 그리고 집 근처 가장 큰 인력사무소로 찾아갔다. ‘나 놈 멍청이’라고 내 머릴 세게 때린 후에.

 

사실 오래 있을 곳이라곤 처음부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탈출구가 애매했다. 노가다에 뛰어들기 전에 만들어뒀던 사회적 기업에 대한 PT자료가 그때도 여기 저기 돌고 있었고 두 달에 한 번 즈음, PT 요청을 받았었다. 더 이상 노가다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고문에서 내 자신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증발한 상태였다. 이곳마저 그만두면 정말 뭘 하겠냐, 그런 압박도 좀 받았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한국 분들이 몇 분 계셔서 해체팀은 다 이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미련하게 일만 하느라 실상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들과 속 터 놓고 술 한 잔만 했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인데 말이다.

 

노가다의 노가다

 

전직 티켓다방 사장, 포주, 사채업자 등은 사무실 근처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지하세계에서 생활하시던 분들만 모여 살았다. 반면 숙소가 아니라 수원이 집인 분들은 그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훈장인 분들이었다. 

 

그 해체팀은 세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아시아 혹은 몽골 어딘가에서 온 이들과 노가다를 처음 시작한다는 사람들이 배치되는 정리팀, 조공팀, 그리고 주로 거푸집을 뜯고 조공팀과 정리팀이 못하는 일을 하는 기공팀. 정리팀은 말 그대로 형틀과 관련된 모든 자재들을 형틀목수들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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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장의 슬라브 뜯고 난 풍경.

아파트 1층 출입구 쪽이다 보니 아주 소박한 수준.

상가 건물 정도만 되어도 난리가 난다. 

 

대략 저렇게 난리인 상황에서 각종 자재들을 형틀목수들이 다시 쓸 수 있도록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이 정리팀이 하는 일이다. 각종 자재들을 쓸 수 있게 다시 만들어놓으면 아래와 같은 사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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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가장 앞쪽에 있는 건 인코너라고 건물 내부의 벽 코너에 끼우는 자재다. 이것도 길이와 폭 별로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걸 규격별로 모아서 각진 나무로 만든 틀(현장에선 ‘다이’라고 부른다)에 넣어야 했 다. 그 뒤로 있는 게 서포트(현장 용어론 삿뽀도). 얘네도 규격들이 있어서 따로 쌓아야 했다. 특히 크레인을 이용해서 옮겨야 했기에 각 맞춰 쌓아야 했다.

 

저 멀리에 높이 쌓여 있는 것이 상용 거푸집(주로 유로폼이라고 부른다. 독일의 KHK Eurochalung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규격이라는데 현장에선 앞뒤 다 잘라먹고 ‘Euro’만 따서 ‘유로폼’이라 부르고 있다)들이다.

 

저걸 사진처럼 정리해 줘야 형틀목수들이 일을 빨리 할 수 있다. 건설 현장에선 꽤 고급인력인 형틀목수가 자재 찾는다고 돌아다니고 있으면 관리직들은 속이 탄다. 그래서 해체 정리팀을 들들 볶는다.

 

위의 난리인 상황에서 아래와 같이 깔끔하게 하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길을 만든다’다. 길을 만들어서 각종 자재들을 종류별로, 세울 것은 세워놓고 눕힐 것은 눕혀 가며 작업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정리가 되어 있다.

 

A 형님의 사정

 

벌교 사투리 징하게 쓰던 정리 반장, A 형님. 나보다 여섯 살 위였다. 그는 내가 처음 일하는 것을 두고 맨날 

 

‘넌 아무리 봐도 안전요원해야 해’

 

라고 놀렸다. 자재들이 쌓여 있으면 발로 한 번씩 밟아보면서 걷고, 각종 안전규정들을 말 그대로 지키려고 했으니까. 처음 갔던 현장인 학교에서 아침 조회하는 동안에는 뒤에서 뭉친 근육들을 마사지해 주면서 생각보다 근육이 좀 붙고 있다고 격려 해주기도 했다.

 

그 형님과는 두 개 현장만 같이 일했다. 용인시 외곽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있었던 초등학교와 동탄 근처에 있었던 학교 하나. 그 다음 현장부턴 내가 해체팀으로 가서 거푸집 사이를 붙잡는 웨지핀만 열심히 망치로 때려 뽑았다.

 

형틀목수들이 일을 해야 우리 팀의 기공과 준기공이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리팀은 다른 팀보다 일하는 속도에 대한 압박이 상당히 심했다.

 

그 즈음엔 다른 압력도 심해지고 있었다. 골조를 만드는 전문건설회사(현장에선 지금도 이들을 ‘단종회사’ 라고 부른다)들은 갑님인 종합건설회사로부터 항상 단가 압박을 받는다. 그 즈음에 단종회사들은 해체팀과 정리를 나누려고 했다. 일당 12만 원이면 인력사무소를 통해 정리 인원들을 구할 수 있는데, 해체팀이 정리까지 하게 되면 해체팀 일당에 준해서 일당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웃긴 건 내가 정리를  A 형님 밑에서 배운 게 세 달이 안 됐다. 그럼에도 해체팀을 그만두고 갔던 인력사무소에서 몇 주 만에 정리팀 반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력에서 운용하는 정리팀은 50대가 가장 어린 팀이다. 17kg에,  접힌 길이가 3미터 조금 안되는 V4 서포트 하나 빼는 것도 힘들어 하던 분들이 인력의 정리팀이었다. 반면 내가 일을 시작했던 곳은 젊고 힘 좋은 분들이 넘쳐 나던 곳이다. 바이락은 그걸 한 손으로 들어서 2층으로 올렸다. 팀장은 그걸 모두에게 따라하라 했었고.

 

그 정도로 속도 차이가 나지만, 건설 현장에선 빠르다고 좋은 게 아니다. 공정끼리 계속 맞아가야 모두가 행복해진다. 빨리 정리해 줬다고 해도 목수들DL 이전에 하던 공정을 끝내지 못한다면 그건 공간만 차지하는 짐 덩어리다. 큰 현장들에선 딱히 그렇게 빨리 끝낼 이유가 없었기에 인력사무소 정리팀을 선호했다. 인건비가 훨씬 낮으니까. 큰 회사가 하는 것을 무조건 복사하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중급 규모 건설업체 현장 관리자들이 그 비슷한 결정들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일했던 해체팀과 물려 있는 형틀목수와 철근공들은 모두 체류 자격상, 건설 현장에선 일하면 안 되는 분들이었다. 빨리빨리만 들리는 현장들이니 빠르게 정리해야만 했다. 결국 이렇게 굴러가던 현장들에선 다시 빨리빨리 정리하는 해체팀 소속의 정리를 다시 불렀다.

 

문제는 일 안 하면 일당 없는 체제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지면 정리에서 원탑을 끊었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잘린다. 노가다 시작한 뒤로 계속 정리일만 했고 팀에 들어와서도 정리 반장으로만 일했던 A 형님은 졸지에 거푸집을 뜯는 해체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이 분이 추락했던 경험이 있어서 높은 곳은 못 올라가셨다. 팀장은 개개인의 그런 사정을 절대로 봐주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에도 한동안 일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팀에서 나갔다.

 

문맹자는 어떻게 착취당하는가    

 

A 형님이 팀을 나간 뒤, 다른 곳에서 만나 술 한 잔 할 일이 있었다. 이야길 듣다가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A 형님,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맹이었다. 기능적 문맹은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만 봐도 그 수를 셀 수 없지만, 말 그대로 글을 잘 못 읽고 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은 태어나서 처음 만났다. 그 형님이 공장을 다니던 시절,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회사 사장은 그 형님과 비슷한 사람들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놓고 튀었다. 그게 21세기에 들어서기 전의 일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본인 명의의 은행 거래도 못한다고 했다.

 

사람을 믿었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은 물론,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도 심대한 불신을 갖기 마련. 형님과 같은 분들을 위한 법률 구조 체제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길 했더니 허탈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 눈빛의 의미는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 깨달았다. 내가 해드리지 않는다면 본인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다. 시간 걸리는 일을 하려면 호구지책을 며칠 포기해야 하는 데다 정리팀 일은 많이 불규칙했다. 나는 그에게 나도, 그도, 할 수 없는 이야길 했던 것이었다. 은행 거래는 할 수도 없고, 건강보험은 언제 마지막으로 냈는지 기억도 못하는 그와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정말 무능하게 느껴졌다.

 

사실 2019년 초여름까진 노가다를 그만두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회로만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보니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제대로 안 보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주의 깊게 봤어도 A 형님이 문맹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남자들이면 항상 나오는 군대 이야길 한 적도 없었고, 다음날 일이 없다고 보낸 단체 문자를 못 읽어서 혼자 출근한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난 네팔 깡촌에서 일하면서 문맹이 어떤 상태인지 꽤 잘 알고 있었는데도... 

 

부모가 문맹이면 아이들의 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가능한 한 많이 낳아서 빨리 일 시키려고 하는 것이 문맹인 부모들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주로 내가 일했던 지역의 소작농들이 그랬다. 하지만 불가촉 천민들의 경우엔 거꾸로 기회균등법에 따라 아이들의 교육과정에 대한 지원을 정부에서 했기에 부모가 좀 더 힘든 일을 하더라도 무조건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려고 했다.

 

당연히 소작농들은 대를 이어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교육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열려있는 불가촉 천민의 아이들은 지역 정치인으로 크기도 했다. 소작농들의 표를 노린 지역 정치인들은 이게 불공정하다고 난리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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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네팔의 중남부 Dang의 마을 풍경

 

가난한 나라에서도 문맹이 얼마나 서글픈 착취의 대상이 되는지 여실히 봤다. 그런 나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사는 대한민국에서 글을 모르는 자의 삶은 더 처참했다. 잘 사는 나라의 문맹자 착취 방식은 훨씬 더 고도화되어 있었다. 사기 당해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식당 주인이 깡깡 언 쉰밥을 먹으라고 내놓고도 당당하게 헛소리하는 꼴을 보며 살아야 한다.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심지어 팀장은 A 형님 같은 이들에게 심심하면 ‘열심히 일해서 나에게 돈 벌어다 줘야 할 것 아니냐’같은 소리를 대놓고 했었다.

 

신입 동생 녀석이 말했다.

 

“형님, 그 형님들은 여기 밖에 있을 곳이 없어요”

 

A 형님의 기구한 팔자는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A 형님 같은 사람들이 받는 말도 안 되는 대우에 대해, 대신 나서거나 도와주기는커녕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바닥에는.

 

각자 그날의 앞가림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사람들 사이에서, 나 또한 내 삶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히 허덕이고 있을 그 즈음, A 형님의 사정은 언제나 내 마음을 잔뜩 어지럽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