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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역사는 까마득합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여러 예법을 도입할 때도, 일제강점기 엘리트 집단의 탄압에도 꿋꿋이 살아남았습니다. 결국 ‘신정’을 압도하는 명절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설날 풍경을 스케치해보려 합니다.

 

우리 민족 설 풍습

 

옛날부터, 음력 설을 쇠는 많은 지역에서 설날을 챙겼습니다. 그 전통은 삶의 양식이 뚜렷이 구분되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 모두에게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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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대별왕 소별왕> 중

 

설날에 대한 묘사는 신라시대 기록물에서 처음 발견되었습니다. 『수서(隋書)』에는 “매년 정월 첫날에 서로 인사하며, 왕은 잔치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이 모인다. 이날 일월신(日月神)에게 배례한다.”라는 기록이 있죠. 또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 ‘달도(설날)’을 기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달도는 설날을 칭하는 옛 신라어로 추정됩니다. 또한 그 당시 제사상 음식은 태양신과 달의 신을 위해 차려졌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과 달, 세상의 모든 조화를 만드는 두 천체의 신비에 옛사람들은 모든 경의를 표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두 천체의 조화에서 찾았으니까요. 설날의 기본 틀은 신라시대에 정해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조수삼(趙秀三)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설날 아침에 왕이 잔치는 단향회(檀香會)를 베풀었다. 승려들은 법의를 입고 경전을 외우고, 뜰에서는 떡국을 먹었다. 사람들은 모두 설빔을 입고 서로 보면 절하고, 돈 벌고 아들 낳으라는 등의 말로 서로 인사하였다. 날이 저물면 한 해 동안 모아 두었던 머리털을 태우고 밤에는 신발을 감추었다. 비록 해진 신발짝이라도 남아 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머리털이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 조수삼, 「원조(元朝)」

 

조수삼이 어떤 장면을 보고 이런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 설날 풍경으로 보기엔 글의 꾸밈이 신라스럽지 않은 걸 보니, 아마 고려 풍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윗글에서, 아주 오래전 설날의 기본 형태가 보입니다.

 

‘왕은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은 서로 인사와 덕담을 나누며, 귀신을 쫓는 등의 지역 풍습을 행한다.’

 

현시대 우리가 설날을 보내는 모습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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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TV>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차례상을 받는 존재입니다. ‘일월신’을 ‘조상신’이 대체하고, 제사를 집전하는 사람은 스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그 자리에 유학자들이 치고 들어옵니다. 치열한 사상전은 백성들의 풍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연신이, 때로는 불교가, 때로는 유학이 승리해 풍습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한편, 조선시대 기록은 설날 풍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관청은 사흘 동안 쉰다. 사람들은 모두 일하지 않고 모여서 술 마시며 논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사당에서 절을 드리고 술잔을 올린다. 떡국을 먹으며, 세배를 드린다. 화포를 쏴서 폭죽을 대신한다. 까치집을 문에서 태운다. 도소주(屠蘇酒, 도라지·육계 등을 넣어 빚은 술)를 마신다.

 

- 『증보사시찬요(增補四時纂要)』

 

설날에 3일을 쉬거나 떡국을 먹는 풍습은 조선시대,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단히 견고한 풍습입니다. 특히, 떡국을 소재로 한 시가 제법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여러 문인들에게 떡국은, 새해를 음미하는 기분을 줬나 봅니다. 권용정(權用正, 1801∼?)의 『세시잡영(歲時雜詠)』입니다.

 

백옥처럼 순수하고 동전같이 작은 것 溫如白玉小如錢

새해 음식으로 내오며 좋은 말을 전한다. 歲饌來時賀語傳

인사 온 아이들에게 더 먹도록 권하니 恭喜兒童添喫椀

큰집의 맛있는 음식은 매년 한결같구나. 大家滋味一年年

 

아이들의 재롱 덕분에 웃음이 넘치는 큰집의 풍경. 그것은 조선시대도 같았나 봅니다. 하지만 떡국은 항상 흐뭇한 소재는 아닙니다. 불청객처럼 불쑥 내 앞에 다가오는 ‘나이 먹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설날에 현타온 이덕무 시를 보겠습니다. 똑같은 제목, 『세시잡영(歲時雜詠)』입니다.

 

평생 마음이 거칠고 게을러 一生心疏懶

설 전날만 되면 늘 서글퍼진다. 每於除夕悲

오늘의 마음가짐을 늘 간직하면서 長懷除夕心

다가오는 새해에는 사람 노릇 잘해야지 新年好人爲

 

하는 것 없이 또 한 살 늘었고, 어느덧 가정을 책임질 나이가 됩니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방에서 『논어』를 간신히 읽던 이덕무가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한숨 푹 쉬면서 ‘새해에는 사람 노릇 좀 잘해야지’ 다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새해맞이 풍경입니다.

 

하나씩 디테일을 따지면 분명히 차이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평화롭던 우리 설날 풍경도 파괴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 상륙한 그때. 바로 일제강점기입니다.

 

저항의 역사 '음력 설'

 

1895년, 조선의 시간이 바뀝니다. 당시 조선에서 쓰이던 4가지 역법을 모두 태양력(그레고리우스력)으로 통일합니다. ‘개화’가 인텔리 전제 필수 조건이 되던 시대. 점차 태양력은 개화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 결과, 양력 1월 1일의 '신정(新正)'과 음력 1월 1일의 '구정(舊正)'을 모두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이중과세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양력설을 권장했으나, 어디까지나 권장이었습니다. 정부와 궁중에서도 여전히 음력으로 설을 챙겼습니다. 양력을 사용하는 것은 백성들에게도 꽤 긴 적응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가 지나고 본격적인 일제 강점기에 들어섰을 때. ‘권장’은 ‘강요’로 바뀝니다.

 

조선이 세계 대세에 합류하려면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택해야 한다. 부질없이 설에 정치적 색채를 가미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는 데 무슨 다른 의미가 있으랴. 다만 남과 같이 살아가자는 필연적 요구에 의해 이러한 개혁이 생겼을 뿐이다. (중략) (양력설과 음력설은) 내버려 두면 다음 세대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양력설이 보급될 것이다.

- 이단구, 『신민(新民)』 64호

 

잡지 『신민』은 20년대 말, 총독부가 원하는 ‘근대적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개화에 친일을 섞어내던 잡지입니다. ‘놔두면 음력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비교적 온건한 논조로 양력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치적 색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어떻게 설에 정치적 색채가 담길 수 있을까요?

 

경성시가도1933-서울아카이브.jpg

경성시가도(1933)

출처 - <서울 아카이브>

 

그것은 서울(당시 경성)에 살던 사람들의 집단 문화 차이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종로와 광교 일대의 조선인 상가 밀집 지역을 ‘북촌’, 일본인 상가가 집결되어 있던 충무로 일대와 명동 일대를 ‘남촌’이라 불렀습니다. 즉, 남과 북의 지역적 정체성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지역마다 설을 쇠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남촌의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자리 잡은 양력설을, 북촌의 조선인들은 기존에 사용하던 음력설을 챙겼습니다.

 

식민지 상황과 맞물려, 음력설을 쇠는 일은 특별한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바로, ‘저항’의 메시지입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마다, ‘조선의 음력설, 일본의 양력설’이라는 두 집단의 라이벌 매치가 벌어집니다. 총독부와 일제 강점기 인텔리는 음력설을 ‘옛것’으로, 더 나아가 ‘낡은 것’으로 혹은 ‘진보하지 못하는 정체된 조선인의 상징’으로 묘사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인들은 음력설을 사용합니다. 윤치호의 일기를 보겠습니다.

 

1939년 2월 19일. 오늘은 음력으로 기묘년 1월 1일이다. 총독부와 특정 사회계몽단체들 및 개인들이 음력을 기준으로 ‘설날’을 쇠는 풍습을 철폐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람들은 그저 잠자코 이날을 진짜 명절로 지키기를 선호한다. 그러고 보면 감성이 이성보다 더 강하다.

 

‘조선인의 미개함’을 혐오하고 ‘일본의 번영’을 부러워하던 윤치호. 그의 시선에서 음력설을 꿋꿋이 쇠는 조선인은 ‘감성’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근대를 지탱하는 이성의 영역과 거리가 먼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총독부와 인텔리가 양력설을 도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언급합니다. 하지만 ‘노력’은 순화된 표현입니다. 부드러운 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한 노력과는 거리가 먼, 탄압의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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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남촌에 위치한 미쓰코시 백화점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연구자 :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절 지내는 것을 금지시켰나요?

 

구술자(1933년생) : 아이고 술도 못 만들고 떡도 못 만들고 감시하고. 여기 칼 찬 순경들이 있어. 그 자식들이 밤에 와서 몰래 봐. 못해. 떡 만드는 거. 술 막걸리 냄새 귀신같이 알어. 걸리면 혼나게 붙잡혀서 직사게 얻어맞는 거지.

 

그때는 쌀이 없었으니까 그런 거 함부로 못 만들었어. 쌀은 자기네가 다 가져가는 거야. 한국 사람들 쌀 멕이나 안 먹이지. 다 공출해가지. 그래서 떡국을 못 먹지.

 

연구자 : 설 명절에는 무엇을 했나요?

 

구술자 : 설 명절에는 입던 옷을 부모님이 깨끗하게 빨아줘. 그리고 차례를 지내는데 깨끗하게만 해놓고 절하고 그랬어. (중략) 일부러 음력설 지냈어. 반항하는 거야.

 

- 안주영,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의 음력설과 양력설」(2019)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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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군산 내항, 일본으로 가는 조선 쌀

출처 - <동국사>

 

총독부는 설날의 정수(精髓)를 없애려 합니다. 그들이 거슬린 건 바로 ‘떡국’이었습니다. 쌀은 죄다 공출해가니 쌀 떡국은 꿈도 못 꾸고, 혹시 술을 빚거나 떡을 만들면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 폭력의 시간이 윤치호에겐 ‘노력’으로 보였나 봅니다.

 

조선인들은 그럴수록 더 몰래 음력설에 맞춰 살고자 했습니다. 비록 쌀과 술은 빼앗길지라도 의식만큼은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 혼을, 우리 의식을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시공간을 조선의 것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총독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 아이들에게 ‘일본의 설 문화’를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연구자 : 일본 사람들이 양력설에는 무얼 줬나요?

 

구술자(1938년생) : 아이들한테는 카라멜 같은 거 있어. 그거 주고 모찌떡 주고. 학생들한테 모찌 2개씩. 카라멜 작은 거 한 개.

 

- 안주영, 「일제강점기 경성(京城)의 음력설과 양력설」(2019)에서 인용

 

설날의 주인공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인사를 다니러 가는 건 설날의 핵심 이벤트였죠. 이제 아이들에게 캐러멜이나 모찌를 주면서 ‘일본인의 시간’을 주입합니다. 그래서 잡지 『신민』에서 ‘놔두면 다음 세대는 자연스레 양력설을 쓸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죠.

 

메이지 유신 이후, 양력설은 일본의 표준 설날로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때 쓰던 수법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음력설에는 ‘민족’과 ‘저항’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총독부의 노력에도 조선인들은 음력설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켜온 음력설이 사라질 뻔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시기가 일제 강점기도 아닌, 대한민국 시절이었다는 것입니다.

 

음력설의 쇠퇴와 부활

 

이승만 정부부터 박정희 정부까지 음력설은 본격적으로 쇠퇴합니다. 한국 정부 수립을 주도한 엘리트들은 일제 강점하에 형성된 근대적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음력설은 낡고 정체된 구시대의 잔재였습니다. 자유당 정권은 총독부가 쓰던 치사하고 졸렬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유신(惟新)으로 근대 일본과의 퓨전을 꿈꾸던 박정희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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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정부에서 작성한 설날의 의미

출처 - <국가기록원>

 

양력설에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특혜가 있었습니다. 1949년부터 1989년까지, 3일 연휴가 이어집니다. 사람을 갈아서 경제를 성장시키던 시절, 연휴는 지금보다 더 달콤하고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7080년을 거치며, 음력설의 인기는 조금씩 사그라들었습니다.

 

음력설이 부활한 건 80년대 중반부터였습니다. 1985년, 음력설이 국가 공휴일인 ‘민속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1989년에는 3일 연휴로 지정되면서 ‘민속의 날’이 아닌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습니다.

 

이것을 민중 저항 의식이 이뤄낸 승리라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엘리트들에게 뿌리 깊던 ‘탈 한국적 근대 정신’이 ‘국풍적 근대정신’으로 바뀐 영향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항일의 상징이었던 음력설이 군사 독재 정권의 손에 의해 부활한 건, 일제강점기 음력설 탄압만큼이나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설 문화

 

옛날엔 설에 뭐했을까_ 80년대 설날의 모습 _ 연날리기,제기차기 추억영상 8-29 screenshot.png

출처 - <KTV>

 

설은 오랫동안 한반도 사람들의 의식 세계에 굳게 자리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얼과 혼, 저항과 투쟁의 역사, 그리고 가족, 연대 같은 전통적 의미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설은 이전과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명절 준비 업무 분담을 기반으로 한 남녀 갈등과 그로 인한 이혼율이 높아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명절은 가정불화의 발화점이 되는 살벌한 순간으로 떠올랐습니다. 

 

설을 쇠는 일에는, 올 한해도 우리 가족이 무탈하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방식으로 설을 쇠는 것이 모두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설 문화는 바뀌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지금껏 해오던 관습이 있어, 바로 능숙하게 조력하지 못하더라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보이는 것만으로 큰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다가올 한 해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우리 모두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수천 년을 이어온 설날의 고유한 전통입니다. 깊은 역사가 담긴 숭고한 설날의 의미를 기억하며, 가족 친지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딴지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참고문헌

 

김문겸, 「설날 이중과세(二重過歲)에 내포된 사회학적 함의」, 『문화와 사회』 제27권, 2019.

김효정, 「조선시대 세시 민속 관련 문헌의 지형도」, 한국학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1.

성범중, 「새해맞이 한시 연구」, 『한국 한시 연구』 18, 2010.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조선의 복지정책에 대해 다방면으로 열심히 담아놓은 책이니, 자신만만하게 말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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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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