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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놓는 달력이다. 내 가슴에 4월은 이 세 날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맨 처음은 4월 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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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 사는 동안 난 제주 4·3 학살 사건1)을 마주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학창 시절, 4·3 학살 사건은 5·18 광주 민주 항쟁보다 더 금기였다. 학살 주범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에 이르는 군사 독재도 4·3 학살 사건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 ‘4·3’이라는 두 자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모진 고초를 겪었다.

 

피해자인 제주 사람들은 더더구나 4·3 학살 사건을 입에 담지 못했다. 연좌제가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고 4·3 학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만 나도 독재 권력은 개인의 사회적 삶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유린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폭력성이 극에 달했던 1978년, <순이삼촌>을 발표했던 현기영 선생은 신군부에 의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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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뉴스>

 

상황이 이런 데다 민주화 투쟁으로 매일 최루탄 가루가 뒤덮던 대학가는 5·18 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과 직접 맞서느라 이승만 정권의 4·3 학살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과 당대에 벌어졌던 5·18 광주 민주 항쟁으로 오랫동안 4·3 학살 사건은 우리 시야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나 역시 4·3 학살 사건을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그럴 생각도 갖지 못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주에 오기 전까지 4·3 학살 사건에 대해 나는 백치에 가까웠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 사사오입 같은 기괴한 정치행태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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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출처-<위키피디아>

 

뜬금없는 부채 의식

 

2000년에 제정된 ‘제주 4·3 학살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우리 현대사에 4·3 학살 사건의 제자리를 찾는 첫걸음이었다. 2000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4차례에 걸친 조사로 그 참혹한 진상이 드러나고 희생자의 규모도 얼추 추산하여 공개적으로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식 인정된 희생자 수는 1만 5천 명에 이른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생산된 언론 기사, 각종 보고서의 기록은 희생자 수를 1만 5천 명에서 6만 명까지 큰 차이로 남겼다. 해방 직후 혼란한 때라 제주의 인구도, 희생자 수도 정확히 조사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간의 조사와 자료를 바탕으로 4·3 학살 사건 기간에 최대 3만 명의 제주 도민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본다.2)

 

3만 명은 당시 제주 인구 대비 10%가 넘는 큰 규모다. ‘제주 4·3 학살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희생자 중 80%는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정권이 보낸 군경 토벌대와 서북청년단에 무차별 살해당했다.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 개인 표석_출처 한겨레.jpeg

제주시 4·3평화공원에 설치된 행방불명인 표석의 전경. 4·3 희생자 가운데 주검을 찾지 못한 3806명을 위해 개인 표석을 놓았다(출처-<한겨레>)

 

육백만 명 넘는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나 백만 명을 넘는 민간인을 죽인 폴 포트의 규모에 비하면 3만 명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낙성대연구소에 모인 뉴라이트나 일베들은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3)로 칭송한다. 최근 개봉한 유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도 이런 주장, 아니 이런 괴설의 연장선에 있다.

 

제주에 내려와 살며 어디를 가나 4·3 학살 사건과 마주했다. 중산간, 작고 예쁜 동네를 거닐어도 시들지 않은 새빨간 동백꽃이 봉우리 채 떨어져 주검처럼 수북이 쌓인 4·3의 상흔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내 가슴엔 제주에 대해, 제주 사람에 대해 앞뒤 없는 미안함이 쌓여갔다. 그 위로 죽어도 청산할 수 없을 것 같은 부채 의식이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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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일보>

 

4·3 학살 사건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내 선대도 제주 사람의 피 한 방울 손에 묻힌 적이 없었다. 나나 내 선대는 4·3 학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 딱히 부채 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마음이 자라고 있는 걸까? 제주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주 아닌 서울에서 살았다. 그랬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4·3 학살 사건이라는 비극을 비켜 갈 수 있었다. 비록 박정희 정권의 폭력 시대였던 60년대 태어나긴 했지만 나도 이승만 시절처럼 동포를 대량 학살하는 공포정치 시기를 용케 피했다. 자연의 성 선택이 만든 우연이 나를 살린 셈이다. 제주 사람은 그 우연이 만든 비극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고 나는 운 좋게 피해 갈 수 있었다.

 

제주 민중에 대한 빚진 마음은 아마도 내 삶이 순전히 요행의 선물임을 감지했던 순간 싹텄을 것이다. 그냥 운이 좋아 4·3 학살 사건 같은 비극을 나는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빚진 마음이 생기고 시간이 흐르며 점점 크기와 무게를 더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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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 다큐프라임 '바람의 집'의 한 장면>

 

빚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 4·3 학살 사건 관련 책과 보고서를 되는대로 찾아 읽고 마을 하르방(할아버지)을 귀찮게 쫓아다녔다.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빚진 마음은 더 커갔다. 내 자식에게 4·3 학살 사건의 기억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까지 들어 부채 의식은 나날이 무거워졌다.

 

무게를 더는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허나 매일 더해지는 무게를 견딜 힘을 기를 방법은 찾은 듯하다. 내가 누리는 삶이 요행임을 잊지 않고, 제주 사람의 불운과 고통을 되새기고 기억하며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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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에 설치된 제주 4·3 희생자 변병생(호적명:변병옥) 모녀의 기념조각상 비설(飛雪). 이 조각상은 1949년 1월 6일 봉개동 지역에 2연대의 토벌 작전이 펼쳐지면서 군인들에게 쫓겨 두 살 난 젖먹이 딸을 등에 업은 채 피신 도중 총에 맞아 희생된 당시 봉개동 주민 변병생 모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출처-<제주4.3평화재단>)

 

권력으로 강제한 고립이 증폭한 비극, 4·3

 

제주 사람들은 원래 고립무원의 섬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려에 복속하기 전, 탐라국의 제주 사람들은 잘 만든 배를 중국과 일본을 잇는 조류에 띄워 왕성한 해상 무역을 했던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4) 조선 인조 때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제주 사람들은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조선술을 갖고 있었다.

 

12세기 초 정치적 독립성을 포기하고 고려에 복속하는 순간, 제주도와 제주 사람들은 육지의 왕조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 공납과 노역을 착취해도 되는 지배 대상이 되었다. 왕조뿐만 아니라 공납과 노역 징수를 담당하던 탐관오리들까지 부정 축재에 혈안이 되어 제주 사람들을 수탈의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제주 4.3의 직접적 원인_ '서북 청년회'의 실체는|'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JTBC 180411 방송 8-57 screenshot.png

출처-<JTBC>

 

제주 사람들은 할당된 공납과 진상 물량을 맞추고자 시커먼 파도가 넘실대는 거친 바다에도 목숨을 걸고 테우(뗏목)를 띄워야 했다.5) 물량을 맞추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아비를 팔고, 아내를 팔고, 자식과 동생을 팔았다. 진상과 공납은 제주 사람들의 목숨을 뺏는 살인적 약탈이었다. 견디다 못한 제주 사람은 살기 위해 고향 제주를 등지고 스스로 타지를 떠도는 유민이 되었다. 성한 남자들이 바다에서 죽거나 제주도를 떠나는 바람에 고된 포작(鮑作; 조선시대에 전복과 물고기 등을 잡아서 진상하는 역을 맡은 남성)의 빈자리는 잠녀(潛女; 바닷속에 들어가 해삼·전복·미역 따위를 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들이 채워야 했다.

 

돌, 바람과 함께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지만 정확히 말하면 바다에 빠져 죽거나 섬을 떠난 남자가 많아 상대적으로 제주에 남은 여자가 남자에 비해 많아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인구 감소로 인한 부족한 노동력은 오롯이 남은 이들의 몫이었다. 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줄어도 조정과 탐관오리의 요구는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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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곽지해수욕장 해녀상

출처-<한국일보>

 

조선 조정은 제주도의 노동력 감소를 조선의 공납과 진상 구조를 기반부터 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 난국을 타개 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기껏 내놓은 조치는 제주 사람을 섬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인조 7년(1629년) 인조는 출륙금지령을 내렸다.6) 순조 25년(1825년)까지 약 200년 가까이 지속했던 출륙금지령으로 서해, 동해, 중국해를 누비며 자유인으로 살던 제주 사람에게 고향 제주도는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유배지가 되었다. 인조의 무능, 조정과 탐관오리의 욕심이 만든 비인간적 결정이었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이러니하게 출륙금지령 덕분에 지금까지 제주도 고유문화와 언어는 조선 중기 이후 크게 변하지 않고 옛태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말과 문화는 현대의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들의 매우 귀한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력이 강제한 고립이 지킨 제주말의 고유성은 오히려 4·3 학살 사건의 비극성을 키우는 증폭제가 되었다.

 

지금도 고령의 하르방과 할망(할머니)이 하는 제주말은 타지 사람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살고 싶은 마을을 찾아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던 2010년, 제주도 안덕면 화순에서 만난 할망이 하귤을 건네며 했던 말 중 내가 알아들은 유일한 단어는 "셔!"였다.

 

제주도를 제집 드나들 듯하고 TV나 OTT에서 제주 사투리를 듣는 게 어렵지 않지만 나 같은 육지 사람은 나이 드신 하르방이나 할망이 맘먹고 제주 사투리를 뱉기 시작하면 눈만 끔뻑거리게 된다. 하물며 변변한 전파 매체도 없었던 70년 전, 제주 사투리를 육지 출신, 그것도 평안도 출신의 토벌대가 제주 사투리를 알아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테다.

 

제주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갓난아이를 바위 바위에 매쳐 죽이는 반인륜적 범죄도 무심히 자행할 수 있었을 터이다. 이들은 미치광이 살인 기계가 되어 거침없이, 잔인하게 제주 사람의 가슴에 죽창을 꽂고 총알을 쏘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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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vN>

 

변질된 신앙과 맹목적 반공이 만든 살인 기계, 서북청년단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제주 초토화 작전에서 가장 악랄했던 토벌대 주동(柱棟)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서북청년단은 김일성이 38선 이북을 장악하자 1946년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모여 만든 극우 테러 단체다.7) 영락교회의 담임목사였던 한경직은 후일 영락교회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서북청년단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곤 했다.

 

종교 부정과 공산주의를 피해 1946년 월남한 이들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반도에서 가장 무자비한 폭력 집단이 되었다. 한국 전쟁 동안 이들은 북한군과는 싸우지 않고, 전국을 미쳐 돌아다니며 수많은 민중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학살했다. 전쟁 중 20만 명 넘게 학살된 보도연맹 학살도 서북청년단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 있다.

 

제주 4.3의 직접적 원인_ '서북 청년회'의 실체는|'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JTBC 180411 방송 0-41 screenshot.png

출처-<JTBC>

 

4·3 학살 사건 이전부터 제주도에서는 서북청년단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응원경찰(제주도에서 채용된 경찰이 아닌 육지에서 제주도에 내려온 경찰)8)이나 군인 신분으로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단은 제주 민중을 상대로 고문·강간·폭행 같은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제주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1949년 이후에는 더 많은 서북청년단이 토벌대가 되어 제주 민간인을 학살했다.

 

4·3 학살 사건의 빌미가 되었던 무장봉기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조직한 무장대가 주도했다. 군경이 이 무장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장대는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자, 군경은 자신의 무훈을 포장하고자, 무장대 수를 부풀렸다. 그 바람에 무장대 규모는 삼 천명에서 만 명까지 널뛰기를 했다. 실제 무장대의 숫자는 많아야 400명 정도였다. 무장대가 소지했던 무기도 대부분 갈고리·죽창·몽둥이였다. 극히 소수의 인원이 일제가 남긴 소총을 들었다. 더구나 이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군인도 아니었다. 정의감과 의협심만으로 무력 투쟁에 나선 평범한 제주 남자들이었다.

 

제주 4.3의 직접적 원인_ '서북 청년회'의 실체는|'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JTBC 180411 방송 4-48 screenshot.png

출처-<JTBC>

 

이런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들어온 서북청년단은 제주의 젊은 남자를 모두 빨갱이로 낙인찍어 어떻게든 죽이려 했다. 이들이 무서워서 아들이나 남편이 피신하면 서북청년단은 대신 그 가족을 몰살했다. 노인이 누워있는 집에 불을 질러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거센 불길을 피해 갓난아이를 업고 뛰쳐나오는 여인은 총으로 쏴 죽였다. 무장대의 습격에 군인 두 명이 죽자 토벌대는 제주시 북촌 마을 사람 4백 여명을 아무 이유도 없이 생업의 터전이었던 들과 밭으로 끌어내 집단 학살했다.

 

대한민국의 가장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 사랑의 종교,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서 있다. 매주 설교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설파했던 한경직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서북청년단이, 제주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고 그 한가운데 서 있다. 4·3 학살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이 증언하는 이들의 만행은 중세 이후 유럽의 기독교가 벌였던 마녀사냥보다 더 참혹하다.9) 무장대와 한통속이라 여긴 제주 사람을 무자비하게 참살하는 것을 이들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아니라 이 땅에서 빨갱이 악마를 일소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이라 여긴 듯하다.10)

 

제주 4.3의 직접적 원인_ '서북 청년회'의 실체는|'4.3이 머우꽈' 현기영 작가|차이나는 클라스|JTBC 180411 방송 2-25 screenshot.png

출처-<JTBC>

 

그들이 믿은 예수는 극단적으로 폭력을 배제했다. 그런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시늉이라도 하고자 했다면 4·3 학살 사건 같은 만행은 결코 저지르지 못했다. 자칭 목사라는 전광훈이 하나님 내 손에 죽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면 미쳤다는 소리 밖에 안 나오는 것처럼 서북청년단을 보면 미쳤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변질된 신앙과 맹목적인 반공이 만든, 동포의 피를 뒤집어쓰고 미쳐 날뛰는 살인 기계였다. 그 어떤 표현도 이보다 정확하게 서북청년단을 설명할 수 없다.

 

보수 정권의 반복되는 외면, 윤석열의 또 다른 무례

 

2021년 ‘제주 4·3 학살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통과되며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함께 피해 정도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국가 보상이 시작되었다.11) 올해도 제주도 내 지방자치 단체에서는 4·3 희생자 신고 접수를 받고 있다. 희생자로 접수된 이들은 법률에 따라 일정한 심사를 거쳐 국가 보상을 받는다. 이들이 명예 회복을 하는 길은 이와 별도로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한결같이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 그리고 명예 회복이다. 희생자나 희생자의 유족은 지난 70여 년간 사회에서 스스로를 격리하고 숨어 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국가의 진정한 사과와 위로, 실질적인 명예 회복은 금전적 보상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 주권을 위임받은 정부의 행정 수반인 대통령과 각료들,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이 희생자와 유족의 통한과 아픔에 절절히 공감하는 마음을 가질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섣부른 금전적 보상은 아물지 않은 희생자와 유족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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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발생 뒤 산간 지방으로 피신한 어린이들

출처-<제주4.3아카이브>

 

2003년 4·3 학살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보고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4·3 학살 사건을 국가 권력이 자행한 불법 폭력으로 규정하고 희생자, 희생자의 유족, 제주 도민에게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아무리 좋은 법률을 제정해도 법을 집행하는 자의 마음에 자기 부와 안위를 지키려는 사욕만 가득하다면 그 법은 악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없느니만 못한 법이 된다.

 

오랜 세월 아물지 않은 제주 민중의 상처를 치유하고 실질적인 명예 회복을 하려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진심과 노력은 연이어 집권했던 이명박과 박근혜 보수 정권 하에서 철저히 외면 당했다. 다행히 2017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 노무현의 진심과 노력은 다시 생명의 불꽃을 키웠다. 문 대통령은 해마다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제주 도민을 따뜻하게 보듬고 성심으로 위로하고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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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8주년 제주 4·3사건희생자 위령제

출처-<연합뉴스·노무현사료관>

 

역사는 때때로 너무 모질게 퇴행한다. 공감 능력이라곤 흔적조차 찾기 힘든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고 검찰 독재 정권이 들어서자 치유의 시간은 멈추고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막과 막 사이의 짧은 퇴행이라 여기지만 퇴행의 폭이 너무 크다. 모든 국가 정책을 퇴화시키는 재주를 가진 윤석열 정권은 제주 4·3 학살 사건 치유의 시간도 되돌려 놓았다. 이제 겨우 아물기 시작한 희생자와 유족의 상처를 헤집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상처까지 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2022년 4월 3일 74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묵념을 위한 추모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윤 당선자는 묵념하고 있는 참석자들 앞을 지나 식장에 입장했다. 일반인도 이런 무례는 범하지 않는다. 설사 주최 측이 입장 안내를 하더라도 사양한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라면 더더욱 사양했어야 한다. 하지만 윤 당선자는 주최 측의 안내를 받으며 고개 숙여 묵념하는 사람들 앞을 왕처럼 유유히 지나 자기 자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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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헤드라인제주' 기사 캡처>

 

추념식을 지각과 무례로 범벅이 한 윤 당선자의 행동을 비판하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김은혜 대변인은 유가족 대표의 말씀 중에 입장했다는 거짓 해명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윤 정권은 자신들의 실수와 모자람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상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거짓으로 덮으려 한다. 윤 당선자가 묵념하는 사람들 앞을 유유히 지나는 사진이 보란 듯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데도 그렇다.

 

자신의 실수를 덮고 대통령 위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어서 한 거짓말이겠지만 이 거짓말은 4·3 희생자와 유족, 제주 도민에게는 깊은 상처를 주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그다음 해에도 여전히 반복되었다.

 

2023년 75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한덕수 총리가 참석해 대통령 추념사를 대독했다. 뒤를 거의 돌아보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은 그 전 해 추념사를 자기 표절하며 희생자와 유족에게 일말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위로하고 슬픔을 달래며 거듭 사과해도 모자란 자리에서 뜬금없이 돈 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전국을 떠돌며 부도 어음을 남발하는 민생 토론에서 하듯 대규모 IT 투자를 해서 제주도가 번영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희생자와 유족은 4·3 학살 사건을 잊지 않고자, 국가의 진심 어린 위로와 사과를 받고자 추념식에 모인 것이지 부도 처리될 어음 쪼가리를 받고자 모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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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향신문' 기사 캡처>

 

대통령이 이렇듯 무례하게 제주 도민을 대하자 작년에는 자칭 서북청년단이라 주장하는 이들까지 4·3 추념식에 난입해 시위하려 했다.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솟았다. 처음에는 그 뜨거운 불덩이를 무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권력에 대한 분노라 생각했다. 그런데 분노만이 아니었다.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슬픔이 화산재처럼 쏟아졌다. 또다시 무시당하고 상처받는 4·3 학살 사건의 희생자와 성큼성큼 퇴행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마주한 슬픔이었다.

 

자칭 보수라 하는 이들이 국가 권력을 잡을 때마다 대한민국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시달린다. 이 잔인한 폭력의 사슬을 끊는 방법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쓰리고 아픈 역사가 아물어도 그 흉터를 보며 애써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가면을 쓰고 가랑비처럼 젖어 드는 폭력도, 우리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피어나는 폭력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계속>

1) 개인적으로 4·3 항쟁이라 부르지만 이 글에서는 미군정, 이승만 정권, 군사독재정권, 윤석열 검찰 독재 정권의 폭력성을 강조하고자 4·3 학살사건이라 썼다.

2) 최근에는 최대 3만 명 정도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인용된 인구통계를 근거로 희생자 수를 추정한 것인데 이때 기사나 보고서들이 인용한 인구통계가 정확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이 숫자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해방이 되자 제주도 인구는 6만 명 정도가 증가해 27만 명 정도가 되었다.

3) 친일의 피가 흐르고 종미의 살덩이를 뒤집어쓴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치켜 세우며 언급하는 인물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다. 미국인들이 조지 워싱턴을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라 부른다. 하지만 워싱턴 만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단수가 아닌 복수(Founding Fathers)로 쓰인다. 복수가 쓰이는 이유는 미국 독립 선언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통칭하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조지 워싱턴은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일 뿐이며 특별히 그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용어가 아니라는 소리다. 뉴라이트들이 굳이 건국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면 김구, 신채호, 이동휘, 안창호, 안중근, 홍범도, 김좌진 등 임정과 무장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섰던 모든 선열들을 포함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을 써야 자신들이 맹종하는 미국의 문화를 제대로 답습하는 게 된다.

4) 제주시의 산지항이나 용담동 유적에서 발굴된 중국 한대의 금속 화폐, 구리거울, 각 종 무기류,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 유물들이 이런 추정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특히 용담동 유적은 330㎡ 남짓한 좁은 지역에서 금동제허리띠 장식이나 유리구슬 같은 값진 물품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한 군데서 대규모로 유물이 발견 된 것은 아마도 용담동이 고대 제주에서 해상 교역을 나설 때 안녕을 기원하던 제사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고 제주 사람의 해상 활동이 왕성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된다.

5) 제주 사람을 사지로 몰아 넣은 것은 왕실 진상이었다. 쌀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던 제주도는 조선 초기 공납을 쌀로 대신 납부하는 대동법이 시행된 후에도 여전히 진상을 해야 했다. 제주 지역 특산품인 말, 해산물, 귤과 같은 과일을 현물로 진상해야 했고 운송에 필요한 노동력도 요역(徭役)으로 직접 감당해야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만에 오고, 배를 타도 하룻밤이면 도착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 진상하기까지 1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말을 키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 귤 같은 과일이나 생물을 변질되지 않고 진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동보다 생산과 채취가 더 큰 문제였다. 오롯이 자연에만 의존해야 하는 생산-채집 활동이라 생산량의 증감은 오직 하늘의 뜻이었다. 생산량이 아무리 감소해도 조정의 가혹한 요구량은 절대 줄지 않았다.

6) ‘제주에 거주하는 백성이 떠나 육지 고을로 이주하는 바람에 세 고을의 군액이 줄어들었다. 이에 비국이 도민의 섬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했다. 왕이 이를 따랐다. 濟州居民流移陸邑, 三邑軍額減縮。 備局請嚴禁島民之出入, 上從之’(조선왕조실록 인조7년 8월 13일)

7) 이들의 신분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소련이 점령한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토지개혁을 하자 월남한 지주와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었다거나 자산가 계층이 아닌 지주 밑에서 소작을 하던 하류 계층 출신이 주축이었다는 설도 있다. 서북청년단의 ‘서북’은 평안도 지방을 일컫는다. 평안도는 조선시대에도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융성한 곳이었다. 공산화는 38선 이북 지역 중에도 특히 평안도 지역 사람들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기본적으로 평안도 출신 월남인만 정식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출신 계급이나 종교를 기준으로 단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직의 규모가 전국적으로 커지자 출신 지역을 막론하고 받아들여 세를 불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름만 서북청년단일 뿐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전국에서 모인 이들이 서북청년단의 이름을 걸고 이승만 독재 구축의 행동대장이자 전위부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8) 미군정은 일제 총독부 경찰 출신인 친일 부역자들을 경찰로 고용해 제주도에 보내 경찰 병력을 강화했다. 이들과 함께 서북청년단도 경찰이 되어 제주도로 보내졌다.

9) 2023년 3월 18일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에서는 제주도 4·3 학살 사건과 관련해 군법회의 수형인 30명에 대한 27차 직권재심이 열렸다. 이 30명은 70년 넘게 무고한 죄인으로 살다 죽거나 행방불명 되었기에 재판에는 유족이 대신 참여했다. 유족 중 한 명은 당시 토벌대는 거동이 불편한 자신의 할아버지가 있는 집에 불을 놓아 산 채로 태워 죽였다고 증언 했다. 과거 유럽의 기독교(천주교 포함)가 악마를 퇴치한다며 일삼던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인 화형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한 때 기독교 신자였던 내게 기독교가 벌인 이런 악행은 진정 누가 악마일까 하는 의문을 들게 했고 사람의 교회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0) 한경직이 과거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영락교회가 서북청년단의 거점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반공의 기치 아래 자행되었던 서북청년단(한경직의 표현은 ‘서북청년회’)의 여러 극우 테러 사건을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그는 사목을 하는 종교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말은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 이념으로만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다. 그보다 종교적 신념과 북한을 장학한 공산주의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강하게 그의 신앙과 의식을 지배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을 절대 악마화하며 철저한 반공을 절대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을 것이다. 당연히 공산주의를 포함해서 자신보다 왼편에 선 모든 사람을 동등한 정치 참여 권리를 가진 경쟁 상대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일소해야 하는 악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이렇게 가정해야 서북청년단의 학살 행위가 설명되고 서북청년단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한경직이 이해가 된다. 히틀러 치하에서 평범한 독일인들이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히틀러가 불러들인 아리안족 제일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한 때 이웃이었던 유대인을 독일인들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닌 열등한 존재로 쉽게 물상화했다. 이들은 히틀러 유대인들을 가스방에 몰아넣어 제균하듯 학살하면서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11) 개정된 4·3 특별법에 따르면 사망하거나 실종된 희생자의 유족에게 지급되는 보상 금액은 9천만 원이다. 신체적 후유 장애는 이 한도 안에서 정도에 따라 이보다 적은 금액을 보상한다. 개정되기 전 법률에는 보상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이 금액은 2021년 행정안전부가 한국법제연구원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에 의뢰해 과거사 배·보상 기준 제도화에 관한 연구 용역’을 토대로 결정되었다. 2021년 8월에 최종보고서가 나올 예정이었으나 이 보고서에는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을 당시 희생자의 평균임금에 취업 가능 기간을 곱한 금액을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제주 4·3 희생자유족회의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차등지급안은 폐기되었다. 이 안은 4·3 학살 사건을 조금이라도 알고 산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터무니없는 안이다. 평균임금을 산정할 수 있으려면 희생자가 고정적인 급여를 받은 직장인이어야 한다. 당시 제주도는 미군의 폭격으로 일제가 운영하던 주정 공장 같은 산업시설이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더구나 많은 희생자가 노인, 갓난아기와 어린이,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희생자를 대상으로 용역을 수행했던 이들은 보험회사의 배상금을 산정하듯 평균임금, 취업가능연한 등을 따지고 있었다는 소리다. 다시 말하지만 이 용역을 수행했던 이들은 법을 다루는 이들이었다. 윤석열 검찰 정권이 공감 능력이 없는 이유를 이 대목에서도 짐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