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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김진, 그리고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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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MBC 백분토론에서 보수 패널로 나온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진보 패널로 나온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면전에서 이른바 ‘노무현 640만 불’을 언급했다. 지상파 방송에서 실로 오랜만에 부엉이바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정치공학으로 따지면, 당연히 보수 쪽에 좋을 것이 없는 발언이다. 그래서 그런지 4월 3일 하루 동안 이 일을 보도한 언론사의 기사는 극히 적었다.

 

한편 ‘노무현’과 ‘640만 불’을 한 문장에 쓸 수 있게 되어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곳도 존재한다. 해당 보도에서 대부분의 언론사가, 김진 전 위원이 같은 날 남긴 어록인 ‘청년이 망친 나라 노인이 구한다’는 말을 주로 제목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제목부터 당당하게 ‘노무현 640만 불’이었다. 유시민 전 이사장이 무례한 행동(삿대질)을 했고, 김진 전 위원은 당당하게 발언을 이어나간 듯한 교묘한 필치도 제법 눈여겨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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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언쟁

 

방송 직후, 에펨코리아 정치/시사 게시판에 들어가 봤다. 상전벽해. 실로 오래간만에 들어가 본 펨코 정치 게시판은 더 이상 이준석 후보의 홈그라운드가 아니었다. 요즘 이곳 게시글엔 꽤 잘 찍은 소나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잠깐 여담.

 

2015년 더불어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정할 당시, 최종 후보로 오른 이름 다섯 개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희망민주당', '민주소나무당', '새정치민주당'', '함께민주당'. 나는 저 ‘민주소나무당’이라는 이름이 그때나 지금이나 참 흥미롭다. 아마 저 때 아쉽게 당명으로 낙점 보지 못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걸린 누군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십 년 가까이 지나 자아실현의 기회를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철 아닌 소나무를 구경하던 차에, 김진 전 위원의 발언을 비판하는 글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펨코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 일단 ‘나도 노무현은 싫지만’이라는 면죄부성 서두로 시작했다. 유시민 전 이사장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고, 결국 보수에 해만 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내용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물론 이렇게만 끝날 리는 없었다.

 

우리가 모두 예상했던 그 반박. ‘저 말은 ‘팩트’ 아니냐, ‘팩트’를 말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는 댓글들도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진 전 위원을 비판하던 사람도, 팩트 타령이 답답했는지 매서운 재반박이 이어졌다.

 

다들 알다시피, 게시판 언쟁이 여기까지 가면 그 뒤로는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건 지난한 일이다. 그렇게 게시판 곳곳에서 크고 작은 언쟁들이 이어져 갔다.

 

'팩트'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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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꽤 오래전, ‘나는 노예제도에 찬성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우승 상금 10억 원이 걸린 토론도 아니었기에, 나는 반대 입장에서 그저 적당한 열정을 가지고 토론에 임했다.

 

이미 노예제도를 찬성한다는 생각까지 간 사람과의 토론이 생산적일 리도 없고, 이 사람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저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거리 한두 가지 정도 가져가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우선 나는 정석대로 이렇게 시작했다.

 

“누가 너에게 노예가 되길 강요한다면, 넌 싫을 것 아니냐.”

 

사실 여기서 토론은 끝났어야 하지만, 상대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청산유수로 대답을 이어갔다.

 

“태어날 때부터 노예로 길러지면 원래 있던 권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설사 고통을 조금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들이 잃는 것보다 인류 전체의 발전이라는 공공선이 더 중요하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특유의 담담한 태도가 있다. 남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를 먼저 깨닫고, 이를 설파하는 ‘똑똑한 나’에 도취한 듯한 모습. 그는 오래도록 이러한 말투로 주장을 이어갔다.

 

내가 헛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걸 보면, 아마 당시 나는 무던히도 심심했던 것 같다. 그가 주장한 곁가지 몇 개에 대해 적당한 논박을 주고받다가, 결국 최초의 결론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말했다. 누군가가 너를 노예로 삼겠다고 하면 싫지 않나. 그럼 네가 싫은 걸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자, 그는 토론이 시작된 이후 가장 격앙된 목소리로 반박하기 시작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말의 요지는 이랬다.

 

“나는, 이른바 ‘황금률’에 동의할 수 없다. 황금률만 나오면 모든 사람의 사고가 정지하는데, 나는 그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다들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노예제가 훨씬 효율적인 제도라는 건 ‘팩트’다.”

 

토론을 마치면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에 대답했다.

 

“황금률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황금률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귀하는 스스로 남보다 똑똑하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그건 착각이다. 당신은 그냥 상식이 없는 것이다.”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

 

_노무현 전 대통령 딸이_ _그만하시라고요!_…_젊은이들이 망친 나라_ 발언도 (현장영상) _ SBS 0-44 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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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발언은 지극히 무례하다. 정치공학적으로 따져 보아도 보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발언일뿐더러, 유시민 전 이사장의 면전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지성이나 팩트를 향한 순수한 열정 따위가 아니다. 상식이다.

 

상식이란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두 의견으로 나뉘어 토론을 벌일 때도, 그 이상의 논쟁이 불필요해지는 시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상대가 상식을 넘어서는 말을 할 때. 그때는 비상식적인 발언을 한 패널이 대오각성하여 상식의 세계로 돌아오길 기도하기보다는, 당신의 말은 비상식적이라고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 좋다. 그 이상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된 연애 추첨제를 주장한 한 고등학생과 유튜버 주둥이님의 고민 상담도 비슷한 사례이다. 비상식은 설득의 영역이 아니다.

 

[분노주의] 살면서 만나기 싫은 한심한 유형 1위 0-8 screenshot.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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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바로 비상식적인 발언을 하는 자들이 최근 지나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김진 전 위원의 발언이 지극히 무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토론이 필요한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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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찬반 토론’에서 내가 가능한 심드렁한 자세로 임했던 것은, 노예제를 찬성한 사람이 그걸 실현할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지적 유희에 가까운 논박이었고, 그래서 적당히 토론을 주고받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김진 전 위원의 발언을 옹호하며, ‘팩트’라는 금과옥조를 주워섬기는 자들을 목도하는 지금의 나는 결코 그때처럼 여유롭지 않다. 저들이 한국 사회를 당장 멸망시킬 능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비상식의 활개를 방치하는 일은, 사회가 돌이킬 수 없는 퇴보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걸 손 놓고 보고만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비상식에 대해 당당하게 말해 줘야 한다. 이렇게.

 

“그건 상식이 없는 거다.”

 

다가오는 선거는 그 어떤 웅변보다 큰 목소리로, 비상식을 비상식이라 말해줄 기회다. 부디 독자 제위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투표장으로 이끌기를 바란다. 그리고 함께 상식을 외쳐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