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김 과장, 잠깐 회의실에서 커피 한잔하지

 

[#미생] 조곤조곤 팩트로 빌런 처리하는 임시완👊  회사 돈 횡령하고 발뺌하던 비리 과장의 최후 5-30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5살 많은 선임. 직급은 나와 같은 과장이다. 가끔 이렇게 웃으면서 말을 걸어온다.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한잔하자는 티 타임. 본능적으로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지 알고 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언젠가처럼 내가 무슨 잘못한 것이라도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누른 채 회의실로 따라 들어간다.

 

"김 과장 딸이 이제 3학년이지?"

 

본론부터 들어가는 일은 없다. 연극의 플롯을 짜듯 서서히 시작한다.

 

"예. 이제 친구들도 만나고 혼자서 잘 놀아요."

 

"OO는 다 컸나 봐. 형 딸은 아직도 같이 놀아달라 그런다?"

 

우리 딸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 딸 10살 되도록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람이다. 왜 자꾸 본인에 대한 일인칭 대명사를 ‘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우애를 느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5분 정도 쓸데없는 일상다반사 이야기를 계속한다. 익숙한 패턴이다.

 

최근에 낚시를 시작했다는 둥, 요즘 자기 부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 알바를 시작했다는 둥, 자기 고향에 큰 산사태가 나서 친척들이 다 대피했다는 둥. 자잘한 이야기가 계속된다.

 

"아. 그런데 김 과장. 형이 어제 술자리에서 들었는데 그냥 참고만 했으면 해서 말해주는 거야. 들어보고 생각나는 거나 형한테 공유해줄 부분이 있으면 편하게 이야기했으면 해서."

 

이제 시작이다.

 

"요즘 김 과장이 진행하는 TS 16949 신규 프로젝트 있잖아. 다른 팀하고 연계해서 잘하고 있고, 초청한 위원들하고 일정도 잘 짜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한참 뜸을 들인다.

 

"하... 사람들이 참. 형은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왜 오고 가는지 잘 이해가 안 가긴 해. 김 과장도 이미 과장 위치이고, 업무에 대해서는 너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극도로 답답하게 만든 뒤, 입을 떼는 익숙한 패턴. 하지만 매번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런 심리 공격에 잘 당하는 타입이다.

 

"과장님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내가 필요한 말을 던져줘야 이야기에 진척이 있을 것 같아서 싫지만, 대응을 해 준다. 그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인다. 드디어 입이 열린다.

 

"그래. 오해하지 말고 들어. 김 과장 잘하는데 말이야. 그...초빙한 외부 사람들한테 뭐냐...일단은 너무 굽실거린다는 이야기가 있어."

 

"누가 그래요?"

 

아뿔싸…이렇게 반응하면 안 되는데...

 

"허허... 지금은 누가 그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형 말끝까지 잘 들어봐."

 

순간 물고기가 떡밥을 물었다는 강태공의 눈빛으로 내 말꼬리를 낚아챈다.

 

"김 과장이 말이야 외부 위원들이 오면 문도 달려가서 열어주고 위원님 위원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모양이 우리 내부 사람들한테는 별로 보기 좋지 않았나 봐. 그런데 우리 쪽 사람들이나 팀에 내용 전달할 때는 성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다른 팀에서도 말이 많이 나왔나 봐. 아니 근데, 형이 보기엔 별거 아니거든? 근데 그걸로 어제 2차 술자리에서 계속 이야기하더라고."

 

명백한 모순. 그야말로 모순으로 가득 찬 이야기다.

 

첫째, 내 프로젝트 일로 회사를 방문하는 ‘위원’들은 슈퍼 ‘갑’의 위치이다.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기껏 큰돈을 내고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인증이 떨어지지 않는다. 경영진이 보기에는, 크게 술대접도 못 하는 회사 형편에 담당자인 내가 나서서 굽실거리는 건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

 

둘째, ‘사람들’, ‘타 팀에서’ 이런 어휘들을 강조하는 것. 마치 회사의 대다수 사람이 나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불만들이 뭉게뭉게 커져서 결국 술자리까지 내 이야기가 퍼졌다는 뉘앙스로 말한다.

 

근데, 내가 알기로 저 인간이 같이 술 먹는 멤버는 정해져 있다.

 

[#미생] (1시간) 부하에게 폭언하고 괴롭히더니 비리까지;;; 박과장 김희원이 빌런이 된 이유 6-20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관리부서 허 팀장, 생산부서 변 팀장까지 총 세 명.

 

매주 모여서 술 먹다가 안줏거리 떨어지니, 내가 아니꼬웠던 팀장 한 명이 잠깐 꺼낸 이야기를 회사 전체가 나를 싫어하는 듯한, 마치 그 문제가 심각한 일이었던 것처럼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한 것 같이 포장해서 나에게 전달한 것이다.

 

모순과 거짓말이 뒤엉킨 말이란 걸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가 바라던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래서 과장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하셨는데요?"

 

이제 나에게 남은 패는 없다. 나는 이번 판에서 완전히 졌다.

 

"야, 형은 당연히 아니라고 했지. 형 몰라? 김 과장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말이 빨라진다. 씩씩거리는 표정 너머에서 물고기가 낚였다는 환희의 얼굴이 엿보인다. 완전히 기세를 잡고 낚아채는 강태공의 손아귀에 나는 힘없이 끌려간다.

 

"형이 너 이번 프로젝트로 애쓰는 거 모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가 알게 모르게 고생하는 거 형이 다 안다."

 

그가 날 믿어주고, 구설수에서 내 편이 되어 준다는 달콤하고 의리 있는 말로 대화는 끝이 났다.

 

물론 사원 시절에는 믿었다. 대리 시절에도 믿었다. 정말 병신 같아 보이겠지만, 어릴 때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은 나머지 혼자서 감동해서 눈물도 흘려봤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 사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스라이팅을 꽤 오래 당했다. 대리 시절을 훌쩍 지나서 까지도. 부끄럽지만 이게 가스라이팅이라고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가 말한다.

 

"사람들이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김 과장은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돼."

 

그리고 쐐기를 박는다.

 

"형이 다 커버 치고 있어. 걱정 마."

 

"형 믿지?"

 

이제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먹먹한 실소가 터져 나온다.

 

사회생활의 초년생이라면 꼭 명심하길 바란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절대 신용해선 안 된다. 오히려 삼엄한 경계를 시작해야 한다.

 

1. 나는 믿어도 돼.

 

2. 나한테는 말해도 돼.

 

3. 형 믿지? 언니 믿지?

 

정말 믿을만한 사람은 믿음을 확인받으려 하지 않는다.

 

관대한 선임 코스프레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회사에서 우리 형이라는 사람이 날 위해서 업무 외적인 사회생활을 열심히 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나 믿지?”라고 쐐기를 박으면,

 

"사실은, 제가 이런 생각을 맘속으로 했거든요..."

 

따위의 속마음을 열어주는 대응을 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X신 같았던 날들이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할수록 피해자의 스킬이 느는 것처럼, 나 역시 익숙한 공략에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 물론이죠. 제가 과장님을 얼마나 신뢰하는데요. 근데 뭐 변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이해가 가요. 생각해 보니 제가 좀 오버해서 대응하기는 했었네요. 하하하."

 

머리를 긁적이면서 네 말을 들었지만, 나는 괜찮다는 듯 대응한다.

 

순간 나를 공략하던 하이에나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추가로 떡밥을 던지면서 상황을 강조하고 묘사한다.

 

[#미생] 조곤조곤 팩트로 빌런 처리하는 임시완👊  회사 돈 횡령하고 발뺌하던 비리 과장의 최후 10-49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아 근데… 변 팀장이 참… 우리 김 과장을 그렇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줄이야. 이 형도 듣고 있으니까 답답하더라고. 형이 늘 하는 말이지만,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변 팀장이 너 앞에서는 잘해주는 것 같아도 조심해야 해 항상 알겠지?"

 

쓰레기 같은 놈. 내 뒷담화를 한 사람이 나쁜 놈일까? 아니다. 이렇게 잘 포장해서 전달하는 내 앞에 앉은 인간이 쓰레기 같은 놈이다. 정말 나를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누군가 내 욕을 하는 것을 들었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자리가 있었다고 한들,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고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는 표정을 보여주니, 이제는 친근한 척도 가미된다. 역겹게.

 

"사람들이 겉으로는 너한테 친절해도 회사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그래도 우리끼리는 똘똘 뭉쳐서 신뢰하면서 생활해 보자."

 

어떤 긴말이 필요하겠나.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주자, 그제야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래 김 과장은 하던 대로 하면 돼. 소리 나는 부분은 형이 다 해결해 주고 있으니까."

 

마지막에 질문 하나를 꼭 덧붙인다.

 

"뭐 추가로 할 말은 없고?"

 

관대하고 여유로운 선임의 포스를 보여주는 단계다.

 

"아니요, 혹시 나중에 생각나는 부분 있으면 따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타 팀에서 뭐라고 해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대신 너 하고 형만큼은 똘똘 뭉쳐서 돈독하게 한 번 지내보자. 형도 노력할 테니… 먼저 나가봐. 형은 집에 전화 한 통만 하고 사무실로 들어 갈게."

 

[#또PLAY] 제목은 미생 박과장 갑질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김희원의 연기력을 곁들인. _ #미생 #디글 1-45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후임을 괴롭힘으로써 자기 입지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 선임은, 여유를 되찾은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인사를 하고 난 먼저 회의실에서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30분이 지나 있었다. 사실 긴 분량의 대화도 아니었다. 용건만 말하면 카톡으로 해도 될 내용을 안부 인사로 서론 깔고 분위기 잡고 뜸 들들이니 시간이 길어졌다.

 

답답한 마음에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흡연을 하지 않기에 1층으로 내려가 음료수 자판기 앞에서 캔 커피를 하나 뽑아 마신다. 차가운 캔 커피를 원샷하고도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든다. 나를 낚아서 끓이기 위한 가스라이팅이라는 걸 이제는 다 알면서도 감정은 동요한다.

 

회사라는 작은 집단에서, 특정 인물이 나를 비판한다는 이야기는 설사 그것이 거짓이거나 과장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물론, 그 인간이 노리고 흘린 말이지만.

 

요즘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 옛날에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몇 날 며칠이고 초조하거나 분노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이 지겨운 착취를 언제부터 당해 왔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를 주기적으로 가스라이팅 하는 5살 많은 선임 과장. 회사 생활을 13년 이상 함께 해오며 정말 죽도록 나를 이용한 인간이다.

 

신입 시절 4년 대졸자인 나와 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그는, 나를 이용해서 직종의 벽을 뛰어넘어 현재는 4년 대졸자 동급의 급여를 받고 있다. 내가 과장이 될 때, 정확히 나보다 호봉을 뛰어넘는 승진을 했다. 철저하게 나를 이용해서.

 

진급 때 엿먹은 썰은 이후 연재에서 차차 풀도록 하겠다.

 

1e5b91d3-d9a0-4b02-ab77-c3ab75a4614f.png

출처 - <왓챠>

 

최근에 TV나 유튜브에 중소기업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몇 번 보았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과는 매우 다르다고 느꼈다. 시청자를 웃기기 위해서 희화화한 부분이 많았다.

 

13년 정도 중소기업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TV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대단한 갈굼이나 군대에서 당한 폭행 수준의 학대는 당하지 않았다. 오늘 소개한 가스라이팅 같은 천천히 누적되는 정신적인 고통이 끊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오늘부터 연재할 내용은,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 그저 그런 평범한 중소기업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결재 서류가 얼굴로 날아다니고, 상사가 직원의 뺨을 때리고, 불륜녀가 일하는데 쳐들어오거나 뭐 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조용히 백스페이스를 눌러 주기를 바란다. 미안하다.

 

아, 참고로 내가 ‘가스라이팅’ 당했다고 확실히 알게 된 건 스스로 느끼고 정의한 명제가 아니다. 가스라이팅의 가장 무서운 점은, 당하는 사람은 퇴사할 때까지 자기가 가스라이팅에 당한 줄 모르고 생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 덕분에 자각할 수 있었다. 정신병을 인정하기 싫어서 10년을 참다가 처음으로 방문한 정신과에서, 의사가 내게 준 답이었다. 나중에 정신과 편만 따로 쓰려고 한다.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언젠가 대리 시절에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내 앞에서 엉엉 울던 동생이 있었다. 논리적으로 뭐가 힘든 지 말은 하지 못했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나는 위로를 해 주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내심 위안을 얻었다. 나만 괴로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만만치 않게 무섭고 끔찍한 현실이다. 하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위로는 조금 되더라. 앞으로 누군가도 내 경험담을 듣고, 약간의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갑자기 강등되는 건 싫지만, 사원 시절 이야기부터 하나씩 써 내려가 보려 한다.

 

근데, 사원 시절이라니! 13년 전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PTSD가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다.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