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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생존자 장애진 씨의 아빠, 장동원 팀장

 

사고 당일 애진이한테 전화가 왔어요. 배가 기울어진다는 거예요. 다들 가만히 있으라고 했대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구명조끼 입었냐. 그러니 애가 입었대요. 그래서 당장 소리쳤죠. 12번이나 고함쳤어요. 애진이는 그렇게 나왔어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죠.

 

사고 직후, 진도로 달려가 애진이를 만났어요. 애진이가 저를 보자마자 한 말이 뭔 줄 아세요?

 

“아빠 꼭 진상규명 해 줄 거지?”였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그렇다고 했어요.

 

그렇게 이 일을 시작했어요. 올해로 꼬박 십 년이네요. 지난 십 년간 주말에도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없어요.

 

애진이는 생존 학생 중에 유독 미디어 노출이 많았어요. 심지어 나무위키에도 우리 애가 등록됐더라고요. 최근에 알았어요. 그러니 애진이는 온몸으로 그 모든 걸 받아들여야 했죠.

 

아니요. 말리다니요. 이 일뿐 아니라 저희 부부는 여태 애들 키우면서 뭐 하라 말라 한 적 없어요. 뭐든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아마 애진이가 이런 식의 정면 돌파를 선택한 건 본인이 타고난 기질도 있을 테지만, 아마 집안의 분위기도 한몫했을 거예요. 제가 이곳에 와서 일하기 전에 이미 시민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학생 운동에서 노동 운동까지. 그런 아빠를 보고 자랐으니 아무래도 영향이 있었겠죠.

 

많은 공격을 받았죠. 특히나 정원 외 전형으로 대학 간다는 거 발표됐을 때 다들 “참사가 벼슬이냐?” 했어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요. 애들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정부에서 먼저 제안한 거예요. 그리고 그해 특별전형으로 대학 간 애들 전부 전교에서 일이 등 하던 애들입니다. 그런 애들이 4월에 그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거예요.

 

6월에나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중요한 시기에 학사일정에 큰 차질이 있었던 거죠. 게다가 같은 반 친구에 선생님까지 전부 사고를 당했어요. 이전처럼 수능 준비에 매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정원 외 입학 얘기가 나온 겁니다.

 

만약에 말이죠, 걔들이 실력이 안 되는 애들인데 학교에 갔으면 학교에 적응 못해요. 하지만 다들 잘 해냈습니다.

 

배를 몰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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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이라… 저희는 여태 안 해본 투쟁이 없어요. 삭발에 단식에 오체투지에 도보 행진에 피케팅에 점거 농성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드네요.

 

그뿐인가요, 가두집회 나가서 저는 어느 날 최루액 맞고 백남기 농민처럼 뒤로 그대로 자빠진 적도 있어요. 다행히 그때 제가 배낭을 메고 있어서 머리를 크게 안 다쳤을 뿐이지. 아찔했죠. 옆에 있던 애진 엄마가 많이 놀랐죠.

 

한참 정부와 대치가 심할 때는 유가족들이 말도 못 하게 다쳤어요. 우리가 탄 차 유리창을 깨고 전경들이 운전자를 끌어내기도 했어요. 그런 건 언론에 안 나왔죠? 유가족이 때렸네 어쩌고 하는 건 봤어요. 그때 유가족들 얼마나 많이 다쳤는데. 말도 마세요.

 

저는요. 심지어 배 운전까지 했어요. 왜냐고요? 유가족들이 참사 지역을 가 보고 싶어 했거든요. 처음엔 인근 주민분들 배를 빌려 탔어요. 그런데 그걸 해경들이 막아섰어요. 선장한테 알게 모르게 협박을 한 거죠. 유가족들한테 배 빌려주지 말라고요.

 

그래서 제가 레저용으로 면허를 따고 배를 하나 마련해서, 배에 가족 깃발을 딱 달고 참사 해역을 돌았어요. 그러니 경찰들도 아무 말 못 하더라고요. 불법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기자들도 막 싣고 가고 그랬어요.

 

그러는 동안 살이 12킬로 빠졌어요. 정말 힘들죠. 여기서 목포 갔다 다시 배 몰고 나가고 또 안산 오고. 그런데 어떡해요. 아무래도 우리 애는 살았으니까. 제가 앞장서야죠. 유가족들을 시킬 수는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고 싶기도 했고요.

 

왜 침몰했냐가 아니라, 왜 구조하지 않았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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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십 년간 달라진 거라. 글쎄요. 정작 우린 달라진 게 없는데 국가가 달라졌죠. 오송 지하철 참사나 이태원 참사 대응하는 걸 보니까 정부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세월호 때보다 더 철저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사회 분위기도 많이 변했죠. 이제 다들 각자도생 하는 분위기잖아요. 국가나 정부를 믿지 못하니 내 목숨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졌어요. 우리를 보고 깨달은 거죠. 저런 일은 당하면 안 되겠다.

  

답답하죠. 왜 그랬는지 알고 싶죠. 제 마음도 이런데 유가족들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사실 이제는 그 배가 왜 빠졌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맨날 같은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데 더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는요, 대체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거예요. 충분히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누가 왜 그걸 막은 건지 알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국가가 막아서고 있어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사람이 그렇게나 죽어 나갔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니. 말이 됩니까. 제일 만만한 선장 하나 잡아넣은 게 끝이에요. 그때 이후로 더는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죠.

 

그래서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가잖아요. 그럼, 바로 우리보고 전문 시위꾼이래요. 국가의 체제를 위협하는 종북 좌파랍니다. 재밌죠. 국가가 그렇게 유가족에게 프레임을 씌워요. 그때부터 우리는 유가족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고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런 일은 이전에도 있었더라고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더라고요.

 

인현동 화재 참사 때도 그래요. 소방 안전법을 어긴 건물주와 관리자들 때문에 학교 축제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놀던 아이들이 죽었는데, 그 일에 대해 언론은 미성년자가 술 마시러 갔다 죽었다고 대서특필해요. 세월호에는 가난한 집 애들이 배 타고 수학여행 갔다고 하고.

 

또 이태원도 핼러윈 축제에 간 게, 마치 마약하고 술 마시던 사람들이 모여 논 것처럼 프레임을 씌우는 거죠. 마치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은 것처럼.

 

전부 거짓인데 선동은 이 사람들이 하는데, 멀쩡한 우리더러 거짓 선동한다고 하고…

 

유가족을 대하는 국가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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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단식했던 유민 아빠요? 예. 그럭저럭 잘 지내고 계세요. 물론 예전처럼 건강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죠. 단식, 그거 말이 쉽지 보통 사람들은 며칠 못해요. 유민 아빠도 자식 일이니까 그렇게 했을 거예요.

 

유민 아빠에 대한 가짜 뉴스도 많았죠. 어느 정당에 가입돼 있다 하면서 유민 아빠를 종북 좌파로 몰았어요. 유민 아빠는 어떤 특정 정당 소속도 아니에요. 유민아빠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다 헛소리예요.

 

빨갱이라면 오히려 제가 빨갱이죠. 저는 이날 이때까지 학생 운동에서 노동 운동까지 꾸준히 해 온 사람이니까요. 왜 웃으세요, 진짜예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가 이와 관련해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나중에 저희가 국정원의 유가족 사찰 문건을 확인할 수 있었단 말입니다. 그때 제 자료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어요. 저에 대해 아주 그럴듯한 소설 하나를 썼더라고요. 왜 범죄 영화 보면 많이 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가운데 증명사진 하나 붙여두고 그 주변으로 전부 거미줄을 쳐서 가족 친지 친구 지인 관계 싹 다 그려 넣고 이 사람들이 뭘 하는지 알아내는지 어떤 관계인지 기록하는 거. 그걸 해 놨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나는 내 친구 와이프들이 뭐 하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거기엔 다 나와 있어. 그걸 파고 파고 또 파서 엮고 엮어서 누구 하나 학생 조직이든 시민 단체든 어디든 가입 돼있다. 그럼, 그때부터 저는 바로 반정부 세력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프레임을 짜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상부의 지령을 받아 유가족을 데모하라고 부추긴 거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저는 말입니다. 그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딸을 둔 아빠고, 내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겪기 전부터 한 동네 살며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 같이 키운 사람들입니다. 다 건너 건너 아는 마을 사람들이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자식 잃은 사람들을 부추기고 선동합니까. 아니 그리고 막말로 제가 뭐 하러 그래요. 안 그래요?

 

자식만 바라보고 가는 길

 

지난 십 년의 세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 아무래도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됐을 때겠죠. 특별법은 그야말로 온 국민이 함께 만들어준 법이니까요. 천만 명 가까운 분들이 기꺼이 서명해 주셨고요. 또 우리 가족들이 거리로 나가 오래도록 투쟁해서 얻어낸 성과기도 하고요.

 

물론 독소 조항은 있습니다만, 예 아직 미흡하죠. 아무래도 유가족의 실질적 요구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 재발 방지 대책이 제대로 녹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왜냐면 온 국민의 성원으로 만든 일이니까요. 국민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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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시민들의 마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아무래도 진도 군민들이죠. 팽목이랑 동거차도 서거차도 마을 분들,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생존 학생들한테는 애들 옷이 다 젖었으니까, 진도 할머니들께서 고쟁이까지 기꺼이 내주셨어요. 진도체육관도 마찬가지였죠. 프라이팬 없다는 소리에 허리가 다 꼬부라진 할머니가 집에 가서 프라이팬을 직접 들고 와 밥을 해 주시더라고요. 그땐 정신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제대로 못 했죠.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 고마운 거예요. 말해 뭐해요.

 

그래서 요전에는 팽목 주민들한테 백숙 대접을 해 드렸어요. 어떻게 잊어요, 그 마음을. 근데 그때는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한참 싸우는 중이었으니까요.

 

그 후로도 팽목식당에서 계속 저희한테 밥을 해 주셨어요. 특히 ‘계흥엽’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운전도 해주고 음식도 손수 해서 챙겨줬어요. 그 집 딸이 아마 우리 애진이 또래일 거예요.

 

그뿐인가요.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이곳에 오십니다. 416 도봉 모임 분들도 행사 있을 때마다 와서 도와주시고, 서울에서 싸 가져와서 김장 나눔도 해 주시고, 연탄 봉사도 해주시고 그래요.

 

광주 오월 어머니들도 빼놓을 수 없죠. 특히나 돌아가신 배은심 여사님. 한열이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왔다. 해 주신 그 말씀 또 다른 이야기들. 전부 가족들에게 힘이 됐죠.

 

이 싸움 길 거다. 그러니 옆도 앞도 보지 말고 오로지 자식만 바라보고 가라는 그 말씀이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됐죠.

 

416 국민의 약속, 416연대. 이분들이 지난 10년 동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선을 다해 주셨어요. 리본 만드시는 분도 있고, 기억 물품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또 누군지 모르는데 안산으로 매달 8년 동안 커피믹스, 카누, 종이컵을 보내주시는 분이 계세요. 저희가 공식적으로 후원 계좌를 안 열었는데 어떻게 알고 또 큰 금액을 보내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집회 때마다 함께 해 주신 수녀님들도 계시고 또 팽목에서 영가 기도해 주신 스님들도 계시고요.

 

요새는 제주에 청소년들이 전국에 세월호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도보 행진 때 자전거 타고 30여 명이 참여했어요. 간디학교도 매번 편지 써서 보내줘요. 특히나 광주 상주 모임. 한 달에 한 번씩 304명의 희생자를 기리며 순례길을 걸어주시고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진도 임해면에서 팽목까지 걸어주십니다.

 

또 동화 작가들은 팽목에 길들을 만들어 주셨고요. 대구 416연대는 또 매주 피케팅 해 주십니다. 그분들뿐인가요. 해외에서도 참 많은 마음을 보태주셨어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제가 다 열거하지 못할 만큼.

 

그 생각을 하면 고맙죠. 그 응원의 힘으로 어쩌면 여기까지 우리 가족들이 온 걸 수도 있고요.

 

기억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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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여긴 한 집 건너 한 집이 초상집이었어요. 마을 하나가 융단 폭격을 맞은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 후로 십 년이 지났죠. 여기 나오고 나서 저는 하루를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요즘은 더 하죠. 와이프까지 기억상점 일을 하니까요.

 

그러게요,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네요. 일단 사참위 권고 사항 이행을 위해서는 저희 가족들이 또 거리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싸우다 보면 새로운 내용들이 나오지 않겠어요?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랄지.

 

처음에는 저희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막말이나 악플에 대해 법률 대응을 못했지만, 이제 전담팀을 구성해서 바로바로 대응합니다. 하지만 망자 명예 훼손 같은 경우는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유가족들이 해줘야 해서 감정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죠.

 

법적으로 대응하니까 혐오 발언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어린 학생들 같은 경우는 불러서 그냥 분향소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해요. 그러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울고 나옵니다. 몰라서들 그런 거죠 뭐. 알면 함부로 말 못 해요.

 

이번에 방송이 불발됐죠. 어처구니없죠. 세월호 방송이 총선에 영향을 줘서 결방한다니, 명백한 언론탄압이죠. 선거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고, 하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네요.  

 

끝으로 지금까지 믿어 주셨던 만큼 같이 손잡고 걸어줬으면 좋겠다. 각자의 위치에서 잊지 않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날 선 폭력과 냉대 속에서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시민들의 진실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여정에 함께 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이: 장애진 아빠, 장동원

인터뷰어: 산만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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