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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희생자 권순범 학생의 엄마, 최지영 님

 

우리 순범이는 전주에서 낳았어요. 말하자면 늦둥이지. 큰애가 순범이보다 7살 많고 둘째가 5살 많으니까. 맞아요, 딸 둘에 막내 하나. 그래서 내가 여태 우리 순범이를 애기라고 불렀어요.

 

순범이는 예정일 보다 일찍 나왔어요. 금요일에 배가 아파 병원에 갔거든. 다음날 토요일이 내 생일인데 그때 애가 태어났어요. 그래서 노상 둘이 같이 생일 파티를 했어요. 같이 손잡고 케이크도 자르고.

 

누나 둘이 순범이를 엄청 예뻐했어요. 순범이가 어려서 내가 순범이를 안고 미용을 배워야 했는데, 갓난쟁이를 업고 미용 일을 하려니 도무지 뭐가 돼야 말이죠. 이론이야 어떻게 해 보겠는데 실기는 애 업고는 영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를 악물고 돌도 안 된 애를 놀이방에 맡기고 자격증 따러 다녔어요. 

 

그때부터 우리 순범이를 누나들이 돌봤어요. 맞아요, 애가 애를 봤지. 근데 누나들이 얼마나 순범이를 잘 봤나 몰라요. 목욕까지 시켜 놨다니까. 그래서 그런가 커서도 서로 우애가 깊었어요. 누나들도 순범이를 챙기고 순범이도 누나들을 챙기고…

 

밤늦게 누나들이 회사나 학교 갔다 오면, 애기가 항상 마중 나갔어요.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이. 그러면 또 누나들은 동생 좋아하는 거 바리바리 싸 들고 오고 참 보기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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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더 이상 토스트를 먹지 못한다

 

태몽은 여러 개를 꿨는데, 다 생각나지는 않네요. 어느 날 내가 복숭아가 큰 걸 하나 따는 꿈을 꾼 것만 기억나요.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 순범이는 인물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웃음).

 

그리고 진짜 착했어요. 말도 못 하게 착했어. 엄마하고 누나도 잘 챙기고 다정하고 섬세하고. 그런데 친구들 이야기는 조금 다르더라고. 다들 순범이가 남자다웠다고 하더라고. 아마 엄마가 보는 거랑 밖에서 보는 거랑은 다른가 봐요.

 

그것도 모르고 전에 내가 한번 어디선가, 우리 순범이는 누나들 사이에서 커서 좀 여성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했거든요. 나 아주 그냥 큰 딸한테 디지게 혼났어요(웃음). 우리 순범이가 얼마나 남자다웠는데 그런 말을 하냐고. 딸 얘기 듣고 보니까 또 그래요. 근데 뭐 그땐 정신이 없으니까, 그 말을 누구한테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날은 집에 가면, 우리 애가 엄마 일하고 와서 힘들다고 김치볶음밥도 만들어 놓고 토스트 해주고 그러길래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이제 나는 어디 가서 토스트를 못 먹어요. 애 생각이 나서.

 

일하느라 바빠서 애를 잘 못 챙겼으니까, 내 딴에는 용돈이라도 좀 넉넉하게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절대 안 받아요. 그래서 오죽하면 일부러 심부름시키고 잔돈은 너 가져라 했어요. 그러면 또 그 돈도 안 쓰고 따로 차곡차곡 모았다가 지 필요한 거 있으면 사. 절대 허튼 데 안 쓰고 필요한 것 만사요.

 

수학여행 가기 전에는 신발을 시켜놓고 갔더라고. 애 가고 나서야 신발이 왔네. 나중에 같이 보내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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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라도 안을 수 있다면

 

우리 애는 속을 안 썩였어요. 순범이 키우면서 나는 어디 가서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들어 본 적 없어요. 순범이 중학교 들어가서 얼마 안 가 부곡중학교에서 와동중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을 때, 오죽하면 담임 선생님이 “어머님 순범이는 너무 착해서 보내기 싫은데 어쩌죠” 했을라고. 정말 나는 따로 순범이 때문에 신경 쓴 적이 없어요.

 

애 그렇게 되고 나서는 원래 살던 데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했어요. 어떡해. 우리 딸이 거기서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겠다는데. 그때 나는 한참 청운동에서 노숙하고 있을 때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짐 정리하고 급하게 이사를 했어요. 순범이 쓰던 거 그대로 모아 뒀다가, 이사 와서 따로 순범이 방을 만들어 줬죠. 이불만 새로 하나 사서 깔고 전부 그대로. 그리고 내가 매일 거기 가서 우리 애기한테 일기를 써요. 시답잖은 이야기도 하고 보고 싶다는 말도 하고. 

 

말이라고 해.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애 한 번 안아 보는 거? 나는 거기까지도 안 바래. 꿈에서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어.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 놈의 자식이 꿈에도 안 와.

 

2015년에 내가 차 사고가 났어요. 그때 마지막으로 꿈에 순범이가 나왔어요. 내가 너무 기뻐서 “우리 아들” 하고 반가워서 얼른 안았는데, 그랬더니 애가 두 손에서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지더니 내 몸속으로 들어 오더라고. 영화처럼. 그 뒤로는 애가 꿈에 절대 안 나와. 그렇게 나와달라고 통사정을 해도 안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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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순범이가 왔구나

 

우리 순범이는 5월 5일에 찾았는데, 그날따라 뭔가 내 마음이 이상했어요. 아침에 잠깐 잠들었다 깼는데 어쩐지 갑자기 씻고 싶은 거라. 그래서 내가 같이 있는 언니한테 “나 샤워 좀 하고 싶네” 말하고는 “왠지 모르게 오늘 우리 아들 오늘 만날 거 같아”했어요.

 

그렇게 씻고 와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데 이놈 자식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오늘이 아닌가 보다 하고 있는데, 저녁 7시 10분경에 애가 둘이 올라왔다는 거야. 애들 인적 사항을 누가 저기다 붙여. 그런데 사람 참 희한하지. 저 멀리에 요만한 걸 누가 붙이는데 어머 세상에 안 봐도 딱 알겠는 거야. 아 우리 아들 왔구나 싶더라고.

 

그때부턴 옆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하나도 안 들려. 얼른 달려가 인적 사항 확인하니까 우리 아들이 맞아요. 키, 머리 스타일, 입고 있는 옷. 전부 다 우리 아들이더라고. 그걸 보고 나니까 가슴이 무너지대. 

 

확실하게 하려고 딸한테 인적 사항 찍어 보냈지. 그러니까 딸이 우리 애 맞대. 그래서 애가 입었던 옷 사진을 들고 9시 30분경에 체육관으로 가서 보여주니까 맞다고 확인해 주더라고요.

 

근데 나한테 애를 안 보여주는 거야. 보면 놀란다고 안 된대. 그래서 그 소리 듣고 그만 내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어.

 

나도 노란 머리를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지.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 어떡해. 삭발은 한계가 있어. 그래서 이 머리를 하게 된 거예요. 세상 사람들아, 나 좀 봐라. 나 이렇게 간절하다. 나 우리 아들 진상 규명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서.

 

아니, 하다못해 어디 가다 교통사고가 나도 서로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잖아요. 그런데 왜 이건 안 하냐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놀러 가다 죽은 거라고 쳐. 그래도 잘잘못은 따져 줘야지. 그때 누가 왜 안 구해줬는지는 말해 줘야지… 안 그래요? 나는 그게 너무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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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범이 엄마의 노란 머리

 

청운동 노숙 생활

 

십 년을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언제 한 번은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죄다 후문으로 다니더라고. 정문으로는 코빼기도 안 비쳐. 얼마나 성질이 나던지. 그래서 어느 날은 그 앞에서 내가 막 소리치고 난리치고는 그냥 집으로 확 들어와 버렸어요.

 

한참 집안에 처박혀서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셨어요. 그러다 가만 이왕 굶어 죽을 거면 광화문으로 나가서 굶어 죽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광화문으로 갔어요. 근데 얼마 안 가 유민 아빠가 쓰러지면서 단식이 끝나 버렸어요. 그러고는 청운동으로 가서 76일간 노숙 농성을 이어갔죠.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 비닐 한 장 깔고 앉아 버텼어요. 정말 거기 있으면서 별의별 말을 다 들었지. 빨갱이는 양반이야. 시체 팔이, 자식 장사 같은 말 징글징글하게 들었어요. 멀쩡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듣겠더라고요. 우리한테 욕하는 게 되게 상처가 되더라고.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으면, 청와대 입구 경호원들 붙잡고 하소연을 그렇게 했다니까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눈을 밑으로 착 깔고 내 얘기를 잠자코 들어줘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한테도 미안해요. 근데, 그땐 그랬어. 너무 괴로우니까. 

 

그야말로 노숙이었어요. 하수구에서 가스가 밤새 새까맣게 올라와 아침에 보면 얼굴이 퉁퉁 부어서 서로 몰라볼 정도였어요. 그래도 버텼어요. 동진이 엄마, 웅기 엄마, 영석이 엄마, 그리고 나까지 넷이 거기 붙박이였지.

 

거기 나와서는 팽목항으로 갔어요. 물론,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왜 없었겠어. 일단 괴로우니까. 도저히 뭐가 어떻게 안 되니까, 그런 생각 수 없이 했지. 그리고 애 앞에 가서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할 말이 없는 거야. 시간은 가지. 되는 일은 없지 그러니 힘들었지. 그래서 어쩔 땐 다 때려치우자 하다가도 애 생각하면 어떻게 그래, 도로 일어나게 되더라고... 

 

여태 그러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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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순범이 돌사진,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

 

요전에는 수면제를 많이 먹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냥 잠이 안 오고 너무 힘들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수면 유도제를 그냥 한 번에 한 통 반을 먹어 버렸어요. 아주 죽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죽으려고 했으면 농약 같은 걸 먹었겠죠.

 

보름 넘게 병원에 있을 때, 운동을 했어요. 책도 십 년 만에 읽고, 컬러테라피도 하고, 산책도 하고. 그렇게 또 움직이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런 것들이 나한테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나중에 퇴원하면 하루에 만 보씩 걸어야겠다 싶었어요. 근데 막상 집에 오니까 그게 안 되네요. 왜 안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집에 오면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

 

애가 너무 그리울 땐, 별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냥 막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든가 애기랑 얘기하면서 울든가. 지금은 내 목소리가 다 쉬었는데, 원래 안 그랬어요. 소리를 하도 질렀더니 목소리가 변하더라고요.

 

가슴에 이만한 돌덩이가 들어앉아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초기에는 어디 차 타고 멀리 가서 소리를 빽빽 질렀어요.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난 벌써 죽었어. 

 

친정 식구, 시댁 식구 다 멀어졌어요. 전에 친했던 사람들 하고도 연락 안 해요. 다들 어쩌다 연락하면, “아직도 그러고 있어?“ 그런 말 듣기 싫어서. 그래서 못 만나요. 안 만나는 거지.

 

안전한 세상이 오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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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40킬로. 안산에서 출발해서 광화문까지 두 번 걸었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산에서 팽목까지 19박 20일을 걸은 적도 있는걸.

 

팽목 상주들이 걸을 때 날짜 맞으면 가서 걸어요.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래도 그렇게 걷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나거든요. 우리 애 생각밖에 안 나요.

 

언제 한 번은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려 주저앉은 적이 있어요. 근데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 핫팩 열 개만 갖다 달라고 부탁했어요. 두 시간 동안 잠시 차에서 쉬었다가 바로 일어나서 마저 걸었죠.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엄마니까, 우리 아들 일이니까 하는 거지. 아니면 절대 못 해.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 해.

 

가만히 있으면 애 생각이 자꾸 나거든요. 그러니까 뭐라도 하는 거예요. 나를 괴롭히면 생각이 덜 나 거든. 오죽하면 이 나이에 타투를 다 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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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목에 새긴 세월호 리본

 

누나들은 둘 다 결혼했어요. 걔들은 자식 안 낳는데.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 싫대요. 둘째는 여기서 살기 싫다고 아주 호주로 이민 가 버렸어요. 그래서 더 순범이를 생각하게 되지.

 

대부분 후회가 많아요. 못 해준 거. 그런 것만 자꾸 생각나.  

 

생명 안전 공원이라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을 데려다 놓으면 그다음 뭐가 있을 텐데. 그거조차 쉽지 않으니까, 지금 우리 애들이 여덟 군데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요. 얘네들 외롭지 않게 해 주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니까 괴롭죠.

 

사실 우리 애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그거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고. 그런데 나는 우리 아들한테 창피하지 않은 엄마로 살고 싶어요. 노력을 많이 한 엄마로 남고 싶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라도 바뀐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요. 안전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러는 거야. 다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말이야.

 

 

인터뷰이: 권순범 엄마, 최지영

인터뷰어: 산만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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