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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당갈>의 레슬러가 거리로 나섰다

 

인도 영화 좀 본다는 영화 팬들이 빼먹지 않고 보는 영화 중에 <당갈(Dangal)>이 있다. 2016년에 개봉해서 3억 달러가 넘게 벌어들이면서 힌디어로 제작한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을 낸 인도 국민 영화이다. 인도 북부의 하리아나주(Haryana) 시골에 사는 아마추어 씨름선수인 아버지가 인도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자기 딸들을 레슬링 선수로 키워내서 결국에는 영연방대회(Commonwealth Games)와 아시안게임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실제 주인공이었던 마하비르 싱 포갓(Mahavir Singh Phogat)은 자신의 딸 네 명을 모두 레슬러로 훈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남동생이 딸 둘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 두 명도 역시 훌륭한 레슬러로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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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당갈'은 힌디어로 레슬링을 뜻한다

출처-<익스트림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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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0일 뉴델리 한 호텔에서 김정숙 여사도 영화 '당갈'의 실제 주인공을 만났다. 왼쪽부터 듀시안 라울 포갓(막내아들), 다야 카우르(어머니), 기타 포갓(장녀), 김 여사, 마하비르싱 포갓(아버지), 바비타 쿠마리 포갓(차녀) [출처-<청와대>]

 

받은 메달의 종류나 개수로 따지면 포갓 자매들 중 장녀이자 영화 <당갈>의 실제 주인공인 기타 포갓(Geeta Phogat)보다 마하비르 싱 포갓의 조카인(Vinesh Phogat)이 조금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안게임, 영연방대회, 세계 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각종 메달을 쓸어 담았기 때문이다. 비네쉬는 2022년 버밍햄에서 열린 영연방대회에서는 53kg급에 출전해서 동 대회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014년과 2018년에는 각각 48kg급과 50kg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따냈으니 3회 연속 체급을 바꿔가며 메달을 사냥해 온 그녀는 그야말로 인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비네쉬 포갓_출처 hindustantimes.jpg

2018년 8월 20일(한국시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레슬링 여자 자유형 50㎏급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뒤 인도 국기를 든 채 기뻐하는 비네쉬 포갓(출처-<hindustantimes>)

 

항상 스포츠 뉴스 메인을 장식하던 그녀가 2023년 1월 갑작스럽게 사회면 뉴스 메인에 등장했다. 인도 레슬링계 유명선수들인 바즈랑 푸니아(Bajrang Punia, 2020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삭쉬 말릭(Sakshi Malik, 2016년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비네쉬 포갓이 연좌시위를 하면서 주장한 내용은 단순하지만 충격적이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인도 레슬링 협회(Wrestling Federation of India) 회장인 브리즈 부샨 샤란 싱(Brij Bhushan Sharan Singh. 이하 부샨 싱)이 지속적으로 여성 레슬러들을 성추행하고 협회 공금을 유용하는 등 전횡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가 여성 선수의 가슴과 복부를 수시로 더듬고, 선수를 스토킹하거나, 특혜를 대가로 성적인 접촉을 요구하면서 여성 레슬러들 사이에서는 '공포와 트라우마'가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 여성 선수에게 한 각종 성추행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그의 사무실, 국내외 경기장, 호텔 등 각종 장소에서 무차별적으로 행해졌다. 심지어 피해자 중 한 명은 사건 발생 당시 미성년자였다. 참고로 부샨 싱은 1957년생, 66세이다.

 

부샨 싱의 성추행이 계속되자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없는 선수들은 선배 선수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하여 비네쉬 포갓과 같은 선배들이 거리로 나선다. 선수들 주장에 인도 레슬링협회 회장 부샨 싱은 그야말로 펄쩍 뛰었다. 선수들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만약 사실이라면 "목매서 자살하겠다"고 오히려 강공으로 나오기 시작했다.2) 더 나아가 "시위에 참여 중인 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해 버리겠다"고 압박하기 시작한다. "극소수의 선수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발언을 슬쩍 흘림으로써 선수들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노력도 빼먹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에 유명한 선수들이 엄청난 주장을 펼치자 인도 중앙정부도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시작된 지 3일도 되지 않아 인도 정부는 성폭행 혐의에 관한 적절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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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부샨 싱

출처-<NDTV>

 

체육부 장관 아누락 타쿠르(Anurag Thakur)가 '조사위원회 결과는 몇 주 안에 나올 거다'라고 발언하자 레슬링 선수들도 한발 물러섰다. 레슬링 선수들이 이렇게 쉽게 물러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024년에 열릴 파리 올림픽 참가 자격을 두고 각종 지역 예선과 국가대표 선발전이 2023년 인도 전역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선발전을 위한 훈련을 앞두고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선수들은 순순히 시위를 풀고 훈련장으로 돌아간다.

 

2. 부샨 싱 = 폭력배+체육인+정치인

 

몇 달 전 인도의 정치와 폭력조직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쓴 기사가 있다. (참고기사 링크: <인도인이 살인, 강간 전과자에게 투표하는 이유> 참고). 기사의 요는 인도에서는 범죄자 그것도 심각한 중범죄자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재선에 재선을 거듭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인이 '정치폭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지역은 어디일까? 인도 북부에 소재한 우타르 프라데시(Uttar Pradesh)주이다. 우타르 프라데시 중에서도 동부 지역이 가장 악명 높다. 우타르 프라데시는 인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정치면에서 보수적이며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주이다.

 

우타르 프라데시의 주도인 러크나우(Lucknow)에서 동쪽 방향으로 흙먼지 날리는 도로를 몇 시간 달리다 보면 곤다(Gonda) 지역이 나온다. 기차가 이 지역을 지날 때면 창문을 닫아야 한다. 낡디낡은 철도 위를 천천히 달리는 기차의 창문 밖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차창 밖에 소매치기가 나타나 목걸이나 지갑 등을 약탈해 가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가난과 무질서로 찌든 동네이다 보니 조직범죄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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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르 프라데시주 위치

출처-<두피디아>

 

우타르 프라데시 동부에 있는 곤다 지역, 바로 부샨 싱은 1991년 이 살벌한 동네에서 최초로 연방하원(Lok Sabha) 의원에 당선된 이래 6선에 성공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다. 정치에 몸담기 전에는 동네에서 상당히 이름깨나 날리던 폭력배였다. 우선, 인도에서 어깨빵 쫌 한다는 폭력배들이 꼭 한번은 거쳐 간다는 주류 밀매를 통해 착실하게 부를 축적했고, 자신을 지지하는 지지기반도 탄탄히 다졌다. 그는 주류 밀매 이외에도 살인미수, 불법무기 소지 등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심각한 범죄 혐의에 연루됐다. 그중에서 가장 압권은 극렬 힌두주의자들이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라 불리는 유명 이슬람 사원을 습격하여 때려 부순 사건을 주동한 것이다.3) 그는 자기가 주동자였으며,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긴다. 결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바브리 마스지드 사건이 아닌 또 다른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 그 뒤 자신의 지역구에 자기 아내를 내세워 손쉽게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2억 명이 넘는 많은 인구와 열성적인 힌두교도를 가진 우타르 프라데시는 집권당(BJP; Bharatiya Janata Party. 인도인민당)에는 빼앗길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샨 싱의 무법적인 행위가 계속되어도 BJP는 그와 쉽사리 결별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부샨 싱을 고향인 곤다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지역구에 공천하는 방법이었다. 2004년 제14대 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BJP는 부샨 싱의 정치적 근거지인 곤다 지역구에 부샨 싱 대신 다른 사람을 공천하고 부샨 싱을 40km쯤 떨어진 발람푸르(Balrampur) 지역구에 공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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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매체인 'The Lallan'과 인터뷰 도중 부샨 싱이 자기가 어떻게 방아쇠를 당겼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출처 -<The Lallan>)

 

그런데 부샨 싱 대신에 곤다 지역구에 공천을 받았던 후보가 공교롭게 선거 당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겉보기에는 사고였지만 실제로는 자기 텃밭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부샨 싱이 저지른 보복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청부살인의 냄새가 풀풀 풍기자 BJP 원로정치인이면서 전직 인도 총리였던 아탈 비하리(Atal Bihari)가 부샨 싱에게 '네 놈이 죽였지(You got him killed)'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4) 그럼에도 BJP는 우타르 프라데시 내 부샨 싱의 영향력을 놓치기 아까웠다. 청부살인의 의혹은 컸지만 어떠한 징계나 처벌도 그에게 내려지지 않았다. 출당 조치도 없었고, 의원직 박탈도 없었다. 그야말로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명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샨 싱이 다음과 같이 위세를 부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는 어떤 당도 필요 없지만 당은 내가 필요하다"5)

 

3. 살인 자백을 했음에도

 

부샨 싱이 대놓고 위세를 부릴 만도 하다. 1990년대 초반 최초로 인도 하원에 입성한 이후 그는 선거에서 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2022년 한 온라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라이벌 갱조직과의 충돌 와중에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는데도 아무런 조사도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6) 이외에도 40개에 육박하는 범죄에 연루되었지만, 대부분 경우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거나 재판에 증인이 나타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폭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양손에 거머쥔 인간에게 인도의 사법 시스템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일 뿐이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인간과 레슬링계의 첫 인연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부터는 인도 레슬링협회 회장에 연달아 선출되어 십 년이 넘게 회장직에 있었다. 그는 인도에서 벌어지는 레슬링 경기에도 꼬박꼬박 참관하는데, 멀쩡하게 끝난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을 뒤집고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에게 승리를 선언하기도 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선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공개 장소에서 두들겨 패는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 정도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7) 이쯤 되면 레슬링협회를 후원하는 기업들의 지원금 상당 부분을 개인적으로 착복하고 있다는 혐의는 귀여운 수준이다.

 

_출처 AP연하뷰스.jpg

인도의 유명 레슬러 바지랑 푸니아, 비네시 포가트, 삭시 말리크(왼쪽부터 차례대로) 선수가 지난 2023년 5월23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발언하고 있다(출처-<AP연합뉴스>)

 

게다가 뜻밖에도 그는 자기 동네와 인근 지역에 50여 개 달하는 각종 학교와 교육시설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교육자이다. 학점을 대가로 대학생들로부터 뇌물을 받는다는 소문, 수백 명에 달하는 대학교 교직원들은 자기 선거운동에 강제로 동원하고 있다는 갖가지 소문이 돌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4. 선수보다 그들의 메달을 챙기다

 

인도 정부가 선수들에게 약속한 진상 조사를 진행하기는 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혔다. 2023년 4월, 한 인도 언론사의 특종 보도에 따르면 (역시나 예상한 대로) 부샨 싱에게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정부의 약속이 공염불인 것이 밝혀지자 선수들이 직접 델리 경찰청에 부샨 싱을 고발했다. 하지만 델리 경찰청은 영장도 청구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화가 난 레슬링 선수들이 인도 대법원에 달려가 읍소하자 결국 인도 대법원이 델리 경찰청에 조속한 조처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제야 델리 경찰청은 그를 기소했다.8) 성추행 혐의가 불거진 지 3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부샨 싱에 대한 혐의에는 미성년자 성추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 형법에서 이 혐의는 법원의 체포영장 없이도 즉시 구속이 가능하다. 과연 부샨 싱은 인도 형법에 따라 즉각 구속되었을까? 아마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대부분 독자가 생각한대로이지 싶다. 부샨 싱은 그 이후로도 거리를 활보했다.

 

부샨 싱_출처 연합뉴스.jpg

2023년 1월 20일

성적 학대 의혹 관련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인도 곤다에 도착한 싱(출처-<연합뉴스>)

 

2023년 5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뉴델리 한복판에 멋들어지게 완공된 새로운 의회 건물의 준공식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지자 레슬링 선수들은 의사당 건물까지 시가행진한 후 모디 총리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델리 경찰은 이들의 행진을 무지막지하게 진압했다. 선수들은 이런저런 부상까지 당한다. 그 와중에 부샨 싱은 말끔한 의사당에 편안하게 앉아 준공식을 지켜보았다. 보다 못한 세계레슬링연맹과 세계올림픽위원회까지 나서서 선수들에 대한 인도 경찰의 폭력적 대응을 비난하고 선수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인도 국내 소동이 국제적인 망신으로 변모해 가기 시작한 터이다.9)

 

자신들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올 때는 떠들썩하게 환호하던 정치권과 대중이 정작 자신들을 보호해 줄 생각조차 없음을 선수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따온 금메달들을 모두 갠지스강에 던져버리겠다고 선수들이 선언하자 이제는 언론과 정치권이 들고 일어나 "그 귀한 메달을 왜 버리냐?"면서 선수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성폭력 위협에 노출된 선수들보다 메달이 귀하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인도 정부와 대중은 선수들이 아닌 그들이 따온 메달에만 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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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비네쉬 포갓(가운데)이

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출처-<뉴욕타임스>

 

이런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이 사건에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쓴 익숙한 전략을 또다시 시전한 것이다. 가장 윗선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데 집권당, 경찰 등 밑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뻔했다. 선수들은 지쳐가기 시작했다.10) 23년 6월, 부샨 싱을 상대로 성추행 의혹을 제기했던 미성년자가 진술을 번복하기에 이른다. 가장 결정적인 증인이 사라진 터이다. 부샨 싱 측이 끈질기게 피해자의 가족을 회유하고 협박했다는 루머가 많았으나 증명이 쉽지 않았다.11)

 

5. 부샨 싱 또는 그의 가족이 공천될 수 있다 

 

성추행 혐의가 불거진 지 약 1년이 지난 2023년 12월, 성추행 관련 조사가 시작되면서 부샨 싱이 물러났던 인도 레슬링협회 회장 자리에는 부샨 싱의 동업자이자 친한 친구인 산제이 싱(Sanjay Singh)이 선출되었다. 자기 꼭두각시가 회장 자리에 앉는 데 성공하자 부샨 싱은 의기양양하게 "선거는 모두가 원하는 대로 치러졌다"는 발언을 남겼다.12) 협회 수뇌부가 제대로 구성되지 못하고 국내 예선 대회도 파행을 거듭하면서 인도 레슬링협회는 세계레슬링연맹으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인도 레슬링 선수들은 그동안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인도 주류 언론들은 '신임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인도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전하기에 바빴다. 성추행을 호소하던 선수들을 향한 보도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시위를 주도했던 선수 중 한 명인 삭쉬 말릭은 이 모든 상황에 절망감을 느끼고 은퇴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부샨 싱은 어떻게 되었을까? 2023년 1월에 성추행 혐의가 처음 불거졌을 때 그는 2024년 5월에 예정된 하원의원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전략이었다. 미성년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하는 등 자신에게 상황이 충분히 유리해진 2023년 9월에 자기 고향 근처에서 열린 정치 집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2024년 선거에 공천받을 가능성이 낮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누가 감히 내 공천을 막는다고?'(Who will cancel my ticket?)

 

라는 자신감에 찬 발언을 내뱉기도 했다.13) 하지만 야당은 물론이고 집권당 내에서도 그의 재출마에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부샨 싱 대신에 다른 사람을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2024년 4월 현재 인도 언론들이 보도한 가장 유력한 대체 후보는 누구일까? 바로 부샨 싱의 부인 또는 아들이다.14)

 

아직 BJP의 공식 발표는 없었다. 제아무리 어메이징한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인도라지만 성범죄자 대신 그의 가족 중 하나를 공천함에 부담을 집권당 BJP도 느끼기는 하나 보다. 왜냐면 선거가 코앞인 2024년 4월 중순 현재까지도 집권당 BJP가 부샨 싱의 지역구에 누구를 공천할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인도를 보면 구설수·막말 한 번에 공천취소, 출마 포기를 하는 한국 사정이 낫다고 해야 하나.

<'쿠마르의 인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1) "Demands for sexual favours, at least 10 cases of molestation detailed in 2 FIRs against Brij Bhushan". Indian Express. 2023. 6. 2자 기사 참조

2) "'If a single allegation against me is proven, I will hang myself,' says Brij Bhushan Sharan Singh". Indian Express. 2023. 6. 1 자 기사 참조

3) 바브리 마스지드는 우타르 프라데시주 아요디야(Ayodhya)에 위치한 이슬람 신전이었다. 힌두교 전설에 따르면 아요디아는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신인 라마(Rama)신 이 탄생한 성스러운 도시이다. 바브리 마스지드는 16세기 초 인도가 무굴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아요디아에 건립되었는데 극렬 힌두주의자들은 '힌두교 성지에 건립된 이교도의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1992년 현 집권당(BJP)과도 깊숙하게 연결된 극렬 힌두교조직인 VHP가 바브리 마스지드를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그 뒤에 이어진 힌두교도와 무슬림 간의 충돌로 인해 약 2,0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 바브리 마스지드 파괴 사건을 사실상 주도한 것이 바로 부샨 싱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2024년 1월 바브리 마스지드가 있던 자리에 엄청난 규모의 힌두 사원이 새롭게 건립되었고, 그 사원의 완공식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직접 참석했다. 길게 보는 바브리 마스지드가 처음 건립된 16세기 초, 짧게는 1992년의 폭력 사태로부터 시작된 아요디야를 둘러싼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충돌이 힌두교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4) 'Who Is BJP MP Brij Bhushan Sharan Singh, at the Heart of Serious Charges By Wrestlers?', The Wire, '23. 4. 25자 기사 참조

5) 'How 'shaktishaali' Brij Bhushan Sharan Singh has ducked mud so far', Indian Express' 23. 1. 21 자 기사 참조

6) 'Watch: When WFI President Brij Bhushan Sharan Singh said on camera that he murdered a person', Daily Bite, '23. 1. 19자 기사 참조

7) 'Ranchi: BJP MP Brij Bhushan Sharan Singh loses cool, slaps young wrestler on stage', The times of india, '21. 12. 18 자 기사 참조

8) 'Wrestler's Protest: Delhi Police files 2 FIRs against Brij Bhushan Sharan Singh, top developments', The Mint, '23. 4. 29자 기사 참조

9) "International Wrestling Governing Body Condemns Treatment of Protesting Wrestlers". The Wire. 2023. 5. 29자 기사 및 "IOC steps in, supports wrestlers: (May 28) treatment very disturbing, protect athletes, conduct unbiased probe". Indian Express. 2023. 5. 31자 기사

10) "'PM's Silence Emotionally Draining', Says Vinesh Phogat; Wrestlers Allege Efforts to Break Them". The Wire. 2023. 6. 11 자 기사 참조

11) 'After 2 statements against him, minor withdraws charges against WFI chief Brij Bhushan', The Indian Express, '23. 6. 7자 기사참조

12) 'Sanjay Singh becomes new president as Brij Bhushan loyalists sweep the polls', The Hindu, 2023. 12. 21 자 기사 참조

13) 'Brij Bhushan Singh's Lok Sabha poll ticket to be cancelled? Ex-WFI chief's reply', Hindustan times, '23. 9. 25자 기사 참조

14) 1981년 결혼한 부샨 싱은 3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 2004년 첫째 아들인 샥티 샤란 싱(Shakti Sharan Singh)은 23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아들 방에서 난 총소리를 듣고 부샨 싱이 달려갔지만, 아들은 이미 현장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발견된 유서에는 아버지의 이기적인 태도를 비난하는 아들의 원망이 담겨 있었다.('BJP MP's son shoots self, blames father', The Times of India, 2004. 6. 18자 기사 참조) 반면, 둘째 아들 프라틱 부샨 싱(Prateek Bhushan Singh)은 아버지를 빼닮아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들어 현지 우타르 프라데시 주의회 의원직을 지내고 있다. 언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샨 싱의 대체 후보는 둘째 아들 프라틱이다.


추신

 

편집자 주: 쿠마르님의 책이 2권 출간되어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 

 

- 전 세계를 이끄는 'G20' 회의의 2023년 의장국 인도!! 이제 세계 1위의 인구 대국이자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으로 등극한 남아시아의 강국 인도를 분석했다. 방송과 유튜브의 자극적 영상이 담지 못한 진짜 인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도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적었다. 특히, 중고등학생 자녀를 가진 학부모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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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인도>
 
- 카레 이야기도 없다. 요가 이야기도 없다. 오로지 세계 5위의 경제 대국 인도의 경제, 산업, 기업 그리고 기업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미래 경제를 알기 위해 이제 인도는 교양 필수!! 인도 경제를 통해 미래 경제 트렌드를 알아보고자 희망하는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