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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주택에 살면 좋은 점 중 하나는, 내 집에 내 차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늦은 밤에 귀가해서 차 댈 곳이 없을까 봐 빙빙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짐도 많은데 주차 공간이 부족해 멀리 차를 댄 날에, 그 짐을 이고 지고 낑낑거리며 들고 오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내 집을 지을 땐, 내 차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꼭 있어야만 한다. 건축법과 주차장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마다 조금씩 규정이 다르다. 보통 신축을 기준으로 15평이 넘어가면 한 대 이상의 주차 공간을 설치하게 되어있다. 서울시 주차장 조례에 의하면, 집의 연면적이 50제곱미터 이상이면 주차 1대에 해당한다. 또 보통 규모의 집에는 면적과 세대에 따라, 차 2대 정도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을 만들어야 한다.

 

주차장법상 단독주택은 주차자리를 두세대를 만들어야 한다_이미지 판교단독주택2.jpg

주차장법상 단독 주택에는 두세 대의 주차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출처 - <적정건축 판교온당>

 

지하 주차장이 있는 아파트에 살다 단독 주택으로 이사 가게 되었을 때, 낯설 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차가 비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주차장 법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할애하라는 것이지 ‘차고’나 ‘지하 주차장’을 만들라는 뜻은 아니다. 차를 위한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전적으로 건축주의 취향과 의지, 그에 따른 공간계획에 달려있다.

 

차를 위한 공간은 전적으로 집주인이 차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이왕이면 차고가 있으면 좋겠다고 해 비 안 맞는 차고를 만들었지만, 길가에 차를 대는 것이 편해서 차는 노상에 주차하고, 만들어둔 차고에서 개를 키우던 건축주도 있었다(개가 쓰기인 너무 큰 집이었다).

 

반면에 처음에는 차고가 필요 없다고 했다가, 차 두 대를 넣을 수 있는 차고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설계 후반에 들어와 고생한 적도 있다. 도심에서 차를 위한 공간을 만들려면 방 한두 개의 자리를 내줘야하는 큰 변수가 된다.

 

보통 건축주들은 예산에 민감하다. 처음에는 막연히 차고를 원했다가 현실적인 이유로 차고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겨울철을 지내보고 차가 언다든지, 노외 주차로 고생한 뒤에 차고를 짓겠다고 결심한다.

 

이때 나는 건축사로서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처음부터 차고 계획이 있었으면 집과 어울리는 조형이나 대지 전체를 야무지게 쓸 수 있는 계획이 따라 올 텐데. 맥락 없는 계획은 이왕 짓는 거 크고 싸게 만들어버려서, 결국 집과 조화롭지 않게 된다.

 

삐뚤빼뚤 번개 모양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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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차고의 첫 계획안

 

‘우주’의 의뢰인은 차에 관해서는 상당히 실용주의자였다. 차를 굉장히 소중히 다루거나 흔히 말하는 ‘모시고’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양평은 교외 지역에 속해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않다. 그래서 의뢰인은 자차를 이용했다. 차는 거의 매일 필요로 하는 이동 수단이었다. 나는 현장에 갈 때 주로 기차를 탔는데, 양평역에 내리면 건축주가 나를 데리러 와줬다.

 

차에 관해서는 의뢰인 부부간에 다소 이견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최소한의 요건만을 원한다는 건 같았다. 남편은 가능하면 차고의 형태를 갖췄으면 했고, 부인은 차가 비나 눈은 피할 정도로 지붕이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싶어 했다.

 

이 정도만 생각한 이유는 대지 조건 때문이다. ‘우주’의 집을 앉힐 집터는 꽤 좋았지만, 진입로가 좁고 대지경계선의 모양이 이상했다.

 

본래 그 땅은 언덕 하나를 여러 개의 필지로 쪼개서 개발한 땅이었다. 개발지의 끝자락. 우주의 터는 개발을 위한 최소의 요건만 갖추고 있었다. 즉, 폭이 4미터인 진입로가 7미터 정도의 길이로 도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길이는 7미터쯤 되었지만, 번개 모양으로 삐뚤빼뚤 해서 쓸 수 있는 땅은 별로 없었다. 진입로는 도로와 같은 레벨로 집터와는 3미터 높이 차이가 났다.

 

'우주'의 집터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주차하고 운동 삼아 걸어 올라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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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와 집터의 차이는 무려 3미터

 

차고와 게이트를 동시에..!

 

아주 빠듯하게라도 채우면, 차고 겸 게이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는 일이야 무형의 그림이니, 그렸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꿀 수 있다. 우주의 주차장 계획은 일단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본채에 붙어 있지 않고, 별도의 공간으로 차고를 지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대지에서 차고와 본채의 관계이다. 한 땅에 두 개의 공간이 생기면, 그사이에 미묘한 자기장처럼 공간의 성격과 역할이 잡힌다. 바둑판의 바둑알처럼 어디에 놓이냐에 따라 영역을 차지하고, 그 영역에 맞는 성격과 역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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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차고 계획안

 

'우주'의 차고는 진입로 좁은 땅에 생길 운명이다. 그래야만 차를 세우고, 사람도 지나갈 수 있었다. 진입로를 꽉 채워 막을 테니, 아예 차고와 게이트를 겸용으로 만들기로 했다. 차고를 통해서 사람이 들어오는 짧은 터널 혹은 큰 대문의 역할을 한다.

 

전면에 셔터나 문은 달지 않고 열린 채로 둔다. 찌그러진 땅은 밖으로 벌어진 사다리꼴 모양이라 오히려 밖에서 봤을 때, 팔을 벌린 것처럼 시원하게 보였다. 손님을 환대하는 게이트의 기능과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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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차고 계획안

 

피아노 건반 모티브, 난간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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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검은 건반에서 모티브를 따 온 난간살

 

이제, 비를 맞지 않도록 지붕 있는 공간에 차를 세우기만 하면 된다. 최대한 막혀 보이지 않게 열린 기둥으로 받치는 디자인이다. 차도의 동쪽은 이웃집이 만들어 놓은 옹벽이 높게 쌓여 있어서 그 옹벽 상단에 작은 기둥을 올려 구조체가 겹치는 것을 피했다. 반대로 서쪽은 낭떠러지여서 난간이 필요했는데, 여기도 난간과 차고 벽을 따로 세우지 않고 차고의 기둥을 촘촘히 높게 세워 난간이면서 차고 벽면이 되게 했다.

 

난간살은 일률적으로 세우지 않고 3개, 2개 그리고 그사이에 반 정도 빈 여백을 두었다. 피아노 검은 건반에서 따 온 모티브였다. 전면의 난간 여백 사이에 우체통과 초인종을 철제박스로 짜서 끼워 넣기로 했다. 박스에 우주의 이름과 주소 및 준공 일자와 건축사사무소 로고를 넣어서 현판처럼 쓸 것이다.

 

우주의 차고 기능 다이어그램_우편함 수도계량기 차고 강아지 못나가게하는 문까지 멀티박스의 역할을한다.jpg

우편함, 수도계량기, 차고, 강아지 문 역할까지 멀티박스 역할을 한다

 

이쯤 되니 전기 계량기나 각종 검침도 밖에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왠지 어색했던 외부인과의 접촉이 모두 차고라는 중간 영역에서 이뤄질 수 있게 되었다.

 

지붕은 우주 본채의 지붕과 같은 검은색 컬라 강판을 골랐다. 지붕 안쪽의 천장 면과 기둥은 나무로 마감해서, 본채와 시밀러룩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진입로에 강약을 잘 조절한 차고 겸 게이트가 들어서니, 집에 안정감을 더하는 마지막 한 수가 된 것 같았다.

 

이왕 만들 차고, 제대로 쓸모 있게 만들 자는 계획안은 이렇게 완성도 있게 그려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역시 쉽게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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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차고 계획안

 

문제는 '비용'과 '대지'

 

첫 번째 이유는 공사비. 차고의 디자인은 간소한 편이었지만, 기초에 구조와 마감까지 더했을 때 대충 생각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차고가 차 값만큼 나올 수 있다는 말이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꼭 필요한지 의뢰인도 확신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선순위에 밀려난 차고는 일단 본채를 다 만들고 조경공사를 할 때 결정하기로 미뤄두었다. 다만, 차고에 들어가야 할 전기선, 인터폰용 통신선 등은 모두 계획대로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 건축법에서 허용하는 건폐율과 용적률에 해당하는 면적도 계획에 포함되었다. 이런 것들이 계획되지 않으면, 차고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다. 아니면 불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두 번째는 그 이상했던 대지 경계선의 문제다. 요상한 땅 모양은 실제 대지에서는 보이지 않고, 지적도상에만 있는 가상의 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우주 대지의 일부가 침해되어 그 면적을 온전히 찾아 차고를 만들 수 없는 지경이었다.

 

최대한의 공간을 쓰기 위해서는 옆집과 건축 협정을 맺어, 서로 대지 경계선까지 쓸 수 있도록 서로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땅을 서로 주고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 시도하다간 이웃과의 갈등 소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주의 의뢰인은 마지막에 차고 건축을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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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종안은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되었다

 

때론 비우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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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를 없앤 최종안

 

제대로 만든 계획안부터 간소한 계획안까지. 차고 디자인은 대략 열 번쯤 바뀌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하루 날을 잡고, 의뢰인과 차고 워크숍까지 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 차가 비 맞지 않게”.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요청 하나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디자인한 횟수만 봐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계획이 힘들었던 이유는, 그 자리가 차고가 들어가지 않는 자리인데 힘들게 끼워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계획은 자연스러운 법이다. 차고 계획은 자연스러울 수 없었다. 건축주는 건축사를 세차게 흔들어 계획안을 짜냈지만, 결국 짓지 않은 것에 대해 여러 번 미안함을 내비쳤다.

 

첫 번째 계획안이 실현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내겐 아직도 조금 남아 있지만, 차고의 베스트 계획안은 차고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초인종은 그 자리에 잘 만들어졌다. 차고 기둥 대신 담장 울타리 끄트머리에.

 

차고 워크숍의 마지막 생존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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