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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만일 이 세상의 최고의 의지를 가지고서도 아이히만에게서 어떠한 극악무도하고 악마적인 심연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직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국민학교 6학년 때 반장은 문재(文才)를 타고났다. 첫 만남부터 패배를 직감했다. 20년 후 녀석은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역시 클라스가 달랐다.


미학적 완성도를 성취하지 못한 글쟁이는 서글프다. 창작의 세계에서는 노력이 타고남을 넘지 못할 때가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쿨한 척이라도 안 하면 명만 짧아진다.


자가용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배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삼도지방 모든 곡물을 실은 세곡선은 강화해협을 통해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강화는 물자가 풍부하고 일 년 내내 기후가 온난하여 예로부터 살기 좋았다. 풍광은 또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인지 풍요로운 땅 강화도에는 작가가 많다. ‘강화도 시인’으로 유명한 함민복을 비롯하여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짱뚱이네 육남매>의 오진희 모두 강화도에 산다.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강화도의 작가들 관련하여 인터뷰를 해볼 요량이다. 추진동력은 200%로 팬심. 딴지 연재를 핑계로 성공한 덕후 한번 되어 봅시다.


이번 편은 ‘강화도의 문인들’ 프리퀄 쯤 된다. 주인공은 고관대작까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 문장가, 중세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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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李奎報, 1168~1241)


듣보잡이라고? 니덜이 모른다고 안 유명할거라는 편견은 버리자. 의무교육을 마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규보’ 석자는 몰라도 <동명왕편>이라는 작품은 가물가물 떠올라야 한다. 동명왕이 뭔데 알아야 하냐고? 송일국이 나온 드라마 <주몽>은 알면서 동명왕은 모르겠다면 난감하다.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에서 간지 작살 고주몽 캐릭터를 그려낸 사람이다.


이쯤 되면 얼마나 대단한 위인인지 감이 오지. 이규보, 한마디로 초천재 작가되시겠다. 강화도의 문인들 프리퀄 대상으로 손색이 없다.


지금부터 이규보편 시작해본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 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즈(camouflage. 위장, 은폐)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문학평론가 김현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 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난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국문학자 조동일


네이X에서 ‘이규보’를 검색하면 상반되는 두 의견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이규보에 대한 인물평은 둘로 나뉜다. 도입부의 한나 아렌트 발언을 통해 짐작했겠지만, 본인은 김현 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편파적인 시각에서 기술될 예정임을 미리 밝힌다.


1168년 12월 16일, 이규보는 황려현(현재 여주)의 토착 호족으로 하급관리를 전전했던 이윤수의 아들로 태어난다. 출생 시 이름은 이인저로, 어릴 적부터 글재주가 좋아 신동취급 받았지만 한미한 가문 출신 99% 개돼지가 1%에 진입할 방책은 과거시험 뿐이었다. 영재의 저주는 이 시절에도 통하는 공식이었다. 이인저는 출제자의 의도파악이 중요한 시험형 인간이 아니었고, 16세부터 시작된 수험생활은 5년을 넘어간다. 고시폐인이 된 청년 이인저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이규보’로 개명, 오매불망 바라던 과거에 드디어 합격한다.


다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제랑 학사께서는 전에 추천한 말은 희롱이라 하지 마시고 기어코 좋은 벼슬을 저에게 내려 주어 그 은혜를 끝내 받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성의 제랑에게 올리다>


과거합격은 1% 입성 만능 치트키가 아니었다. 금수저는 가오 빠지게 출세에 힘쓰지 않는다. 흙수저 출신 이규보는 장원급제 후에도 10년을 ‘닝겐’으로 지낸다. <동명왕편>을 이 시기에 썼으니, 위대한 창작은 결핍에서 탄생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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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이 실린 <동국이상국집>의 일부

(출처: <에듀넷 어린이 신문>)


생활고에 장사 없는 두 아이의 아버지 이규보는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는 구관시(求官詩. ‘나도 관직 함 하자’는 내용의 시) 집필에 재능을 낭비한다.


1196년, 세상이 뒤집혔고 최씨 무인정권이 들어선다. 이규보는 말석 관직 자리 하나 얻지만, 모함을 받고 LTE급으로 파직당한다. 닝겐 이규보의 세월은 또다시 덧없이 흐른다.


1213년, 46세 중늙은이 이규보는 한밤중에 서슬 퍼런 최씨 정권의 후계자 최우가 주최하는 술자리에 불려간다. 이규보는 새파란 애송이 최우에게 시를 바친다. 제법 술이 올라 알딸딸했던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에게 이규보의 시를 전하고, 최충헌은 그날따라 소울 충만했는지 이 시를 읽고 울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그 즉시 정6품으로 임명되었으니, 인생 참 의미 없다.


천도는 예로부터 어렵다 하였건만
하루아침 공 굴리듯 쉽사리도 옮겨 왔네
강산이 안팎에 수만 집 앉아있는
옛 서울터보다 얼마나 더 좋은가


<경사스런 천도를 생각하며>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한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다. 최우의 총애를 받던 이규보는 재상까지 오른다. 고로 강화천도 시기는 이규보의 리즈 시절이다. (이규보 사주를 찾아본 적 없지만, 말년 대운이 장난 아닐 듯하다. 74세에 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규보는 최씨 정권 아래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비 맞으며 논에 엎드려 김을 매니
검게 탄 못생긴 얼굴, 사람 같지도 않겠지
왕족과 귀족이여, 함부로 멸시 마오
그대들의 부귀영화 나로부터 나온다오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부터 세금 걷는다고 성화네
애써 농사지어 나라 잘살게 하는 일 우리에게 달렸거들
어찌 이리 극성스레 수탈하는가


<농부의 말>



호랑이, 이리 사나워도 제 새끼 상치 않는데
어느 아낙이 아이를 길에다 버렸을까
금년에는 조금 풍년이라 궁핍하지 않은데
어느 개가 여인이 남편에게 잘 보이려 함인가


<노상 기아>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민낯을 드러내면서 민중의 비참한 실정을 증언했던 작가가 있었다. 친구와 술을 사랑하고, 유머가 있었으며,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하늘이 내려준 보물 같은 재주를 신념 따윈 개나 줘버린 채 권력자에게 바친다.


이런 인물은 시공간을 초월해 어디에나 존재한다. 작가만 그럴까. 돈과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추잡해 질 수 있는지 21세기 대한민국 같이 좋은 시청각 자료는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새 서울에는 일마다 새롭구나
새해엔 다시 태평세월을 접쳤네
도성 사람들이여 봄빛이 빠르다고 의심치 말라
이것이 강도의 첫 번째 봄이라오


마지막으로 소개한 위의 작품은, 이규보가 강화도 천도 다음해에 쓴 시다. 몽골의 침략으로 반도가 핏빛으로 물들던 바로 그 시기다.


잘나신 너님들아, 정말이지 이러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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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묘다. 동방의 시호(詩豪) 묏자리답게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으로 손꼽히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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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해 보이는 문무석은 무신정권 당신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눈 찢어진… 응?



* 참고자료


동명왕의 노래 / 김상훈 / 보리출판사
이규보연구 / 김열규 / 새문사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정출헌, 고미숙 /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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