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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6. 금요일

이제 좀 쉬려하는 카인












지난 두 시간에 걸쳐, 환상문학의 동서양 대표 장르인 무협과 판타지를 입문자용으로 디벼보았다. 단순한 이정표에 불과하나, 새로이 장르에 입문하는 이들에게는 필요한 이정표가 되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착하게 서두를 쓰면 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입문자를 위한 글이라 복잡하고 심도 깊은 정보는 전달하지 않으니 구원 받을 수 없는 덕후 동족들의 아우성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원체 재수 없는 놈인 이유도 있다.


그리고, 오늘 다룰 장르인 SF는 나만큼이나 재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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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 장르 중에선 가장 입문 장벽이 높다. 


환상문학에서 동서양을 대표하는 양날개, 무협과 판타지는 각각의 문명이 보유한 역사에서 자신의 환상 요소를 퍼온다. 동서양 문명의 역사/신화/전설/종교/민담 등이 무협과 판타지의 창고다. 요약하면, 무협과 판타지를 낳은 것은 인간 문명의 과거다.


SF는 여기서 변별점이 있다. 환상성의 기초는 곧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무협과 판타지는 그런 요소를 과거에서 퍼오고, SF는 주로 미래에서 퍼온다. 그리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학문인 과학이 SF의 정체성과 관련된 분야다.


무협과 판타지의 작중 세계를 구성하고 서사를 작동시키는 비현실적 환상 요소들은, 결국 인류의 과거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직관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입문 장벽이 높지 않다. 문화적 코드만 파악한다면 낯선 설정을 받아들여 즐길 수 있다. 이미 존재했던 문화 요소를 가져와 사용했기 때문이다. SF는 정반대다. 상상된 적이 없는 요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작가의 창작과 독자가 동기화 되는 과정이 더 어렵다. 게다가 그 요소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과학 이론이나 기술에서 설득력을 빌어온다면 장벽은 더 높아진다. 과학 이론과 기술이 문명과 생활을 변화시킨 모습 등이 주된 요소다 보니 그 이론/기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경우 해당 세계의 기초적인 설정을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이게 SF의 특징이자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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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술은 발전하면 문명 자체를 바꿔버린다. 운송 기술, 생산 기술, 통신 기술이 그랬다.

'이제 무엇이 우리 문명을 바꿀까' 라는 질문이 SF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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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SF의 포뮬라 하나가 만들어졌다.

무협의 작중 세계가 주로 중근세의 중국이고 판타지의 작중 세계가 주로 중세의 서유럽이 되었듯

SF의 작중 세계는 주로 미래의 은하계 우주가 된다. 


장르를 이루는 근간이 미래와 기술 발전에 대한 질문에 있으니, 미래에 대한 고찰이 빠질 수 없다.


조지 오웰의 [1984]가 그 예다. 기술 발전을 지배층이 독점하여 지배 기술에 응용해 완벽히 성공한 파시즘 사회를 만든 디스토피아를 가정하고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인간 사회에 대한 철학적 시선을 던진다. 오웰의 상상력이 철학 쪽이라면, 게임 편에서 다뤘던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상상력은 기술 쪽이다. [매스 이펙트]의 인류는 명왕성 궤도에서 '매스 릴레이'라는 은하간 워프 장치를 발견하고, 이미 이를 이용하고 있는 종족들이 구성하고 있던 은하계 사회에 편입한다. 인간을 비롯한 은하계 사회의 종족들은 우주에서 '제0원소'라는 별칭이 붙은 '이조(eezo)'라는 광물을 발견해 사용하고 있다. 이조를 이용하면 다른 물건의 질량을 임시로 낮출 수 있고 그 주변에 '매스 이펙트 필드'라는 역장을 생성해주기 때문에, 일상 생활부터 우주 항해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사용한다. 매스 릴레이와 이조를 기반으로 한 은하계 사회의 생활이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세계다. 매스 이펙트 필드를 발생시켜 근접 격투에 이용하는 군인과 건물 하중을 줄이는 건축가의 이야기를, 게임 내의 문서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매스 릴레이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대 종족 프로시안의 멸망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1984]는 '텔레 스크린'과 같은 통신 기술을 상상했고, 이를 통해 완전하게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를 상상했다. [매스 이펙트]의 제작진은 매스 릴레이라는 은하간 이동 수단과 이조라는 독특한 광물로 인해 형성된 은하계 사회를 상상했고, 각 종족들의 습성과 특성을 통해 다양성을 구체화한 작중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런 것이 SF의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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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된 세계'라는 공통점과, 발생 문명이 서구 사회라는 공통점 때문에,

판타지와 SF는 종종 겹치기도 한다.


세계를 상상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SF와 판타지의 접점은 상당히 많다.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입문자에게는 아무런 필요 없는 SF의 장르 구분 중에서는, SF와 판타지의 이종교배로 나온 것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가 있다. [스타워즈]와 같이 기술적 상상력보다는 작중 세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경우가 스페이스 오페라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흔적이 적지 않다. 이런 경우를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거 완전히 틀린, 뿌리도 없는 용어다. 무협지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안 쓰는 게 좋다. 판타지 쪽에서는 '스페이스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판타지의 하위 장르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긴 하다. 그래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래 세계의 형태에 대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SF의 하위 장르로 보는 편이 낫다.


스페이스 오페라 외에도 SF의 본질적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크로스오버가 있다. SF의 상상력은 곧 '아직 생기지 않은 기술'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은 원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 유에서 유를 끌어내는 편으로 더 잘 작동한다. 18세기의 SF 작가들이 디지털 문명과 인터넷을 예측하지 못하고 '편지를 원격으로 배달하는 자동 연통' 같은 것을 상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판타지에서나 쓸 법한 요소를 SF에서 쓸 때도 있고, 더 나아가 기술적 요소에 결합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 작가 김창규(본지의 난폭한 어느 기자와 동명이인으로 돌고래가 아닌 인간이다)의 [발푸르기스의 밤] 연작이 그런 경우다. 주인공 빅터 얀센의 직업이 유령과 소통하는 영매인데, 재밌는 것은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한 영매라는 점이다. 인간이 죽은 후 영이 거주하게 되는 가상 공간이 있고 여기에 접속하여 영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제대로 번역하는 직업이 영매라는 설정이다. 빅터는 안드로이드 제작 기술과 영매 기술에 의해 죽은 후 기계 신체를 통해 되살아났기에, 신체의 기능을 이용해 최고의 영매로 성장한 인물이다.


이렇게 전설 요소와 과학 요소를 섞은 경우인 [발푸르기스의 밤] 시리즈는 SF의 여러 특성을 보여준다. 과학 기술을 다루기에 높은 진입 장벽, 기술적 상상력만으로는 채우기 힘들기에 다른 종류의 환상 요소도 섞이는 크로스오버의 성질, 그리고 작가가 모두 조직한 작중 세계.


(김창규의 [발푸르기스의 밤] 연작은 수록된 잡지를 직접 찾지 않는다면 접하기 힘들다. 두 편은 인터넷에서 읽어볼 수 있다. [발푸르기스의 밤] 네이버 문학관 링크. / [발푸르기스의 밤 - Hellogue - 지옥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웹진 거울 링크. 웹진 <거울>에 수록된 버전은 연작 중 하나의 초고 버전이다. 원래 2009년에 출판 예정이었는데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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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판타스틱] 2008년 7월호를 찾을 수 있다면 지면으로도 한 편을 읽을 수 있다.

 

SF, 즉 Science Fiction은 흔히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된다. 제일 앞에 붙은 '공상'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소설이라는 뜻의 'Fiction'을 잘못 번역한 결과라는 설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공상'이라는 단어가 비하의 의미로 보인다는 인상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학 소설'이라고 제대로 번역하자니 너무 어려워 보여 딱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라, 현재는 번역 없이 SF로 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과학' 소설의 정체성이 우선인 SF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같은 장르가 탁구공이 된다. 극성 SF 팬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SF의 하위 장르로 보기 싫어하고, 판타지는 그거 사이언스 판타지로 부르는 게 더 낫지 않냐며 갖고 갈까 하는데, 결국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이라 다시 SF로 돌아가는. 그만큼 SF는 상당히 딱딱해 보이는 장르다. 입문 장벽도 타 장르에 비해 높지 않은가.


SF에서 과학 기술 요소를 우선시하는 입장은 상당히 고전적인 포지션이고, 이런 포지션에서 창작된 SF를 '하드 SF'라고 부른다. 과학 기술적인 요소가 작품의 중심에 들어가고, 따라서 현실 세계의 현재 과학 수준으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SF를 의미한다. 김민영의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은, 달리 해석하면 판타지나 스릴러가 아닌 가상 현실에 대한 하드 SF로 규정될 수도 있다. 당연히 [스타워즈] 류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하드 SF에 들어가지 않고, 반대 의미인 소프트 SF에 들어간다. 소프트 SF의 상상력은 하드 SF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고 더 다양하다. 네트워크 기술과 강령술을 결합한 [발푸르기스의 밤]이 그렇고, 온갖 물리학 이론을 기초 설정에 녹여놨지만 결국 이조와 같은 가상 원소를 설정한 [매스 이펙트] 시리즈도 그렇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 은근한 이공계 천시 풍조 때문인지 부실한 인문학 교육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인문학 창작 능력을 보유한 이공계 인재가 없는 덕에 하드 SF 작가가 전무하다. 소프트 SF가 대부분, 아니 전부라는 것이 한국 SF의 특징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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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하드 SF를 읽으려면 외국 작가의 것 외엔 없다고 보면 된다.


한국 SF의 특징 둘은, 장편 보다는 단편 위주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르의 진입 장벽이 높은 덕에 작가의 수 자체가 월등히 적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한국 SF 역시 PC를 통해 팬덤을 성장시켰다. 90년대는 한국 SF의 전성기였는데, 확장된 팬덤을 바탕으로 하여 상당한 양이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공사, 들녘과 같은 출판사가 동구권 몰락 이후의 활로로 환상문학 분야에 손을 대면서 다양한 작품도 번역되어 나와 시장을 개척했다. 그런데 이 유산을 2000년대가 이어받지 못하고 통신 문학의 주류를 판타지와 무협에 내주고 말았다. 진입 장벽이 높은 장르이기 때문에 원체 작았던 팬덤은 전성기 이전의 수준으로 돌아가버렸다. 창작자의 1차 배출지이자 시장의 주축이 되어야 할 팬덤이 말이다. 당연히 한국 SF는 장르로서 유의미한 움직임을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2000년대 전후하여 데뷔한 최근 작가들은 주로 환상문학 웹진 <거울>(mirror.pe.kr)이나 월간잡지 <판타스틱>을 이용해 작품을 발표한다.


적은 공급자와 낮은 상품성. 이 때문에 한국 SF에는 작가들이 적어지고, 단편 위주로 창작 되고, 깊이 가는 사람이 없어 하드 SF가 창작 되지 않게 되었다. 90년대 전성기에 데뷔했던 작가들은 대부분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는 듀나와 복거일마저도 왕성한 창작은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한국의 SF를 고르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다른 장르보다 수월하다. 작가와 작품 자체가 소수정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중에서 입문자에게 맞을 만큼 좀 더 쉬운 작품을 고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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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

추천작 : [제저벨], [태평양 횡단특급]


철저하게 자신의 신상 정보를 숨겨, 여성으로 추정되지만 그것도 확실치 않은 작가. 심지어 출판 계약조차도 서면으로 하는 사람이라, 개인이 아닌 창작 집단이라는 설도 있다. 출판된 책을 토대로 보면 본명은 이영수지만 역시나 확실치 않다.


SF의 탈을 쓴 세미 판타지 작가라는 평도 있지만, 일단 그 상상력의 기반은 SF가 거의 확실하다. 복거일과 함께 90년대 SF 부흥의 중심에 있었으며 한국에서는 SF 작가의 태산북두로 인식된다. 90년대의 다른 축이었던 복거일의 하락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출간된 작품은 2000년에 출판된 [면세구역]이 훌륭하지만 대부분이 꼽는 최고작은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태평양 횡단특급]이다. 듀나는 장편 쓰기를 엄청나게 싫어하며, 표지에 장편소설이라 찍혀나온 [제저벨]도 원래는 단편의 연작을 모아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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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제저벨]에 등장하는 주요 악당들의 이니셜이 모두 MB다.


사실상 90년대 한국 SF가 남긴 유산 중 가장 가치 있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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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추천작 : [타워], <예비군 로봇>, <세번째 계단>


후일 21세기 한국 SF 초반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이름이다. 특히나 내가 이 사람의 팬인데, 판타지에 가깝게 작중 세계를 구성하는 것에 능한 듀나와 달리 배명훈은 이야기의 시작점인 아이디어 자체가 좋다. 아이디어라는 측면에서, 계단을 내려오던 순간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상실증을 발견하며 시작하는 <세번째 계단>의 결말은 기발하다.


배명훈의 주된 장기가 작중 세계의 창조는 아니지만, 출간작 [타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타워]의 작중 세계를 잘 뜯어보면 이 세계가 현재 한국, 그러니까 MB 시절의 한국을 모티브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배명훈은 이런 식으로 시사 풍자를 좋아하며, 출간되지 않은 단편의 곳곳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MB 정부 말에 출간한 [총통각하]에서는 아예 제목부터 가카를 언급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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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추천작 :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녀를 만나다>


카이스트 학부를 5학기만에 졸업한 괴물. 이공계 출신으로 매우 다작(多作)하는 스타일이다. 웹진 <거울>에는 거의 한두 달에 한 편 꼴로 단편을 기고하고 있다.


SF로 분류되는 작가 중에서 가장 SF 색채가 옅다. 때문에 여기서 다룰 작가가 맞는지도 애매하다. 하지만 전공자로서 기술적 요소를 가장 잘 다루는 작가로, 고등한 과학적 설정이나 기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내 큰 부연 설명 없이도 서사가 굴러가게 만드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 가끔 SF로 분류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중에선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우주 여행이라는 요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입문자에게 가장 좋은 첫걸음이기도 하다.


이공계 출신자에 관련한 처우나 정책 등에 대한 관심이 작품 곳곳에 녹아있는데, 반면 곽재식이 진짜 즐겨 사용하는 소재는 연애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그 작품의 장르가 역사소설이든 SF든 세미 판타지든 하이 판타지든 서로 사랑하는 남녀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랑이 주된 서사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는데, 클론의 자의식을 다룬 <그녀를 만나다>의 경우가 그렇다.(이 작품은 황금가지 출판사가 출간하는 앤솔로지 작품집 중에서 2010년의 [아빠의 우주여행]에도 실려 있다.) 또한 최근 출간된 단편집 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에 수록된 <최악의 레이싱>은 이공계의 연애 현실에 대한 농담, 그러니까 '공돌이의 연애'를 유쾌하게 서술한 단편이다. 인터넷 기고본의 링크를 달았으니 맛보기를 권한다.


현재 딴지라디오에 최근 출간작 두 권을 광고하고 있어서 굳이 소개하는 게 아니다. 정말 아니냐고? 어헛, 나를 어떻게 보고!




PC통신의 멸종 이후, 통신 공간에서 창작되고 소비되던 환상 문학은 인터넷으로 옮겨 갔다. 무협의 경우엔 문피아와 고무림을 중심으로 작가와 독자들이 모였고, 판타지의 경우엔 그런 것이 딱히 없었다. 커그에서 양산형 판타지의 원조격인 작가들이 모였을 뿐이다. 반면 SF는 월간 <판타스틱>에 이어 웹진 <거울>이라는 안식처가 생겼다. 어쩌면 '비빌 공간'의 유무가 장르의 현재 운명을 판가름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정적으로 창작과 피드백이 이어지며 팬덤과 시장을 굴리고 있는 무협, 양산형으로 이루어진 시장만 살아남고 황금기의 작가들은 뿔뿔이 흩어진 판타지, 규모는 계속 작지만 꾸준히 수준을 유지하며 명맥을 잇고 있는 SF.


이런 장르의 환상문학은, 사실 '국문학'이라는 범주에 대한 도전이다.


국문학의 정의는 학교에서 배웠으니 알 것이다. 한국인에 의해 쓰여지고, 한국어로 쓰여지고, 한국의 이야기를 다룬 문학. 지금까지 다룬 환상문학들은 국문학의 세 번째 조건을 없애거나 완전히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흐름이다. 그러고 보면 저 국문학의 정의라는 것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기획'의 결과다. 따라서 기획이 달라지고 현실이 달라지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바뀐 것은 없었다. 21세기 들어 환상문학의 창작이 더 많아지고 그 팬덤이 더 눈에 띄인다 뿐이지, 무협과 판타지와 SF는 예전부터 존재했고 그 덕후들도 존재했다. 보지 않으려 하여 투명인간이 되었을 뿐, 환상문학의 덕후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소설에서 영화에서 만화에서 게임에서 잘 놀고 있다. 그리고 환상성의 즐거움도 유사 이래로 계속된 것이다. 무협과 판타지처럼 과거의 유산을 가지고 상상하든 SF처럼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상상하든. 문학의 형태는, 글에서 만화로 영화로 게임으로 계속 변하고 있지만,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이다. 이야기의 한 축인 상상력, 상상력의 한 축인 환상성은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다. 그 역시 인간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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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 되었길 바란다. 이상으로 덕질 비기닝의 모든 회차를 마친다.


조금 쉰 후에, 지금까지 다룬 주제를 좀 더 심화 학습하는 "덕질 익스퍼트"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도둑처럼 갑자기.







카인

@Kain_Sul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