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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6.목요일


임종금


 


 


0. 들어가는 말


 


이제 4편을 들어가 보자. 원래 오늘 내용도 3편에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앞선 3편이 순수 텍스트로만 A4 8장 분량이다. 거기에다가 아래 내용까지 포함해 버린다면 짧은 논문 분량이다. 틈새논평을 능가하는 분량이 된다는 말이다. 그나마 틈새논평은 이미지랑 동영상이라도 많지(재미도 있고). 어쨌든 아무튼 그래서 부득이하게 3편과 4편은 러일전쟁 전후를 다룬 같은 얘기에 속하지만 이렇게 따로 구분하였다.


 


 


1. 고종 황제의 몰락


 


불쌍한 고종 황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고종 황제가 전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열강들의 힘의 균형으로 생긴 운신의 폭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었다. 이미 러일전쟁으로 첫 번째 조건은 붕괴되었고, 이제 다룰 내용은 두 번째 조건이 붕괴되면서 고종 황제가 전제 권력을 상실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종 황제는 20세기 다시 보기 1편에서 다뤘던 것처럼,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엄청난 재원을 확보하려 하였고, 이 재원이 바로 고종 황제의 전제 권력의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1904년에 고종 황제의 재원을 끊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전에 한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혹시 ‘이용익’이라는 사람을 아시는가?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하던 ‘이용익’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필자도 그런 드라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이용익. 키180cm 가 넘는 위너였다고 한다.


 


이용익이라는 사람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고종 황제의 오른팔이다. 명박이 옆에는 만수가 항상 붙어 있듯이 고종 황제 곁에도 항상 이용익이 있었다. 이용익은 몰락한 양반 출신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장사를 하면서 잇속에 매우 밝은 사람이 되고, 사업을 통해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주변에 돈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수완이 좋은 영민한 사람이 한 둘은 있을 것이다. 이용익이 딱 그런 사람이다. 그런 이용익이 고종 황제의 눈에 들게 된다. 고종 황제는 이용익에게 명령을 내린다.


 


“용익아, 돈 좀 벌어 오너라. 근대화를 하려면 돈이 좀 많이 깨진다.”


 



이 돈은 아니지만...



이 명령 하나에 이용익은 고종 황제에게 돈을 갖다 주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쓴다. 국가 소유의 토지(역둔토)를 황실 소유로 돌리고, 각종 잡세를 걷고, 광산을 경영하여 이윤을 남겨서 바치고, 홍삼을 통해서 돈을 벌어 바치고, 토지제도를 정비하여 재정을 확보하게 하고, 전환국(조폐국)을 관리하면서 엄청난 화폐를 남발하여 그 이익을 고종에게 바치는 등 그야말로 온갖 잔머리를 다 굴려서 돈을 갖다 바친다.


 


이용익의 노력으로 궁내부 내의 황실재원 관리기구인 내장원의 수입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이 내장원의 돈은 고종 황제가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이렇게 늘어난 내장원의 재원으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려 한 것이다. 내장원의 지출 내역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 바로 ‘내입’금이라는 지출항목이다. 이것은 단지 ‘내입(內入)’이라는 항목 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바로 고종 황제에게 간 돈이라는 뜻이다. 이 내입금이 바로 고종 황제가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내용은 아무 기록이 없다. 황제가 마음대로 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입금의 비율이 내장원 전체 지출의 30%~70%에 달했다.


 


이 외에도 이용익은 고종 황제의 지시를 받아 중립화 노력을 기울이는 등 나름대로 수완을 발휘한다. 이용익은 ‘황제가 이 나라의 주인’이므로 해달라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믿는 절대적 충신이다. 고종 황제에게는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독단적인 재원 운영은 큰 문제를 발생하게 한다. 정부 재정이 약화되어 정부의 집행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정부 재정으로 갈 돈이 황실 재원으로 들어가면서 정부 기관들은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된다. 그리고 화폐 남발로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게다가 이렇게 이용익이 벌어다 준 재원을 고종 황제가 사용하는 방식도 ‘즉흥적, 일회적’인 사용이 대부분이었다. 미래를 보고 체계적으로 재원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생각날 때마다 갑자기 돈을 어딘가 퍼붓고, 수입과 지출이 들쭉날쭉 하는 등 재원의 관리가 허술하였다.


 


어쨌든 고종 황제가 칼자루를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영민한 이용익의 활약이 컸다. 반대로 일본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일본은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해 버렸다(1904년). 고종 황제는 순식간에 오른팔이 날아간 것이다. 게다가 1차 한일 협약으로 고문정치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고종 황제의 돈이 어디서 나오고, 어떻게 지출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고종 황제가 마음대로 황실 재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종 황제는 재정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1897년 이후 가졌던 전제 권력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의병전쟁의 시작


 


일본이 러일전쟁을 구실로 한반도에 진입하자, 온갖 나쁜 짓들은 다 하게 된다. 이미 한일의정서에 의거해서 마음대로 설칠 수 있는 구실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그대로 두고 볼 사람들은 별로 없다. 당시 정부와 개화파 빼고. 제일 먼저 일어난 사람들은 역시 위정척사 계열의 양반들과 유생들이었다. 황제부터 서양 문물에 환장하는 것도 답답해 죽겠는데, 일본이 쳐들어오니 당연히 이들은 분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04년부터 의병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병전쟁은 ‘전쟁’이라 부를 단계로 보기에는 힘들다. 그러던 차에 응원군이 나타난다. 바로 활빈당이다.


 


20세기 다시 보기 1편에서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활빈당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 조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었던 조직이다.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이후 많은 농민들이 자각하게 되었고, 이들은 꾸준히 저항운동을 하다가 일단 활빈당 세력으로 재집결하게 된다. 재집결한 활빈당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우리 생각에는 ‘그래봤자, 지들이 도적 집단 연합체 정도 밖에 안 되는데, 무슨 힘이 있겠냐?’ 싶지만 이들의 활동은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어설픈 관군 수십 명은 활빈당 한 무리에게 몰살을 당하기 딱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리고 백주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서 지방관을 협박하고, 아예 대놓고 대로에 방을 붙여서 ‘활빈당 공개 모집!’하는 등 그 위세가 만만찮았다. 사실상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손을 댈 방법이 없었다. 1편에서 살펴본 활빈당이 발표한 ‘대한사민논설’은 그들이 공개조직임을 드러내는 좋은 사례라 할 것이다. 활빈당은 대한사민논설에서 13개조의 ‘대한제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것의 시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 이렇게 잘 나가던 활빈당이 이제 일본과 붙게 되었다. 활빈당은 동학농민운동의 계승 점으로써 ‘반외세’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외국 상선과 상인들을 공격하는 사례가 예전부터 있었다. 뭐, 이것이 일본이 활빈당을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일종의 명분은 되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바로 철도와 전기시설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용익이 별짓을 다 해서 벌어놓은 돈을 고종 황제가 발라서 만든 근대적 시설이 바로 전기와 철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일본군에게 만주까지 물자를 보급하는 데 있어서 철도의 필요성, 전쟁을 수행하면서 신속한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전기와 전신의 필요성은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그걸 활빈당이 때려 부수고 다니니, 일본군의 입장으로서는 돌아버릴 일이었다. 일본군은 바빠 죽겠지만, 별 수 없이 활빈당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매우 참혹하게 활빈당을 공격했고(붙잡은 활빈당은 모조리 사형이고, 그것도 백성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집단 살해하였다.)일본군의 공격을 맞아본 활빈당은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대한제국 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일본군과 제대로 붙어 싸우기 위해서는 활빈당도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그리하여 활빈당은 1905년을 기점으로 의병에 뛰어들게 되었다.


 


활빈당 조직은 의병으로 뛰어들면서 2가지 중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는 기존의 양반 위정척사 계열의 의병군에 합류할 것이냐? 다른 하나는 지역 활빈당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의병군을 조직할 것이냐의 갈림길이었다. 초기에는 기존 의병군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존 의병군은 양반들과 유생들이 중심이다. 얘들은 바로 활빈당에서 많은 재산을 빼앗겼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활빈당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과 얼마 전까지 조선을 지배했던 양반들이 서로 ‘동지’라고 생각하고 연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두 집단은 조선 건국 이래로(솔직히 말하자면 고려시대나, 그 이전에도) 손을 맞잡고 뭔가 해 본 역사가 없는 집단이다. 임진왜란의 의병은 그저 양반들이 수직적 신분체제를 바탕으로 자신들은 총대를 메고, 백성들에게 일종의 지시를 통해 봉기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수평적인 동지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러나 두 세력은 너무나 이질적인 세력이었기에 그 융합의 과정이 매우 거친 것은 말할 것이 없었다.


 


양반 의병장들은 활빈당을 매우 억압했다. 도적질 한다고 처형하고, 군율을 어겼다고 처형하는 등 활빈당은 의병운동 하기도 전에 양반들의 엄청난 억압부터 이겨내야만 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활빈당은 의병부대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들이 의병부대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자, 많은 민중들이 이들을 따라 의병전쟁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의병운동이 점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활빈당은 곳곳에서 의병군을 조직하게 되었다. 양반 의병장 밑에서 개처럼 고생하면서 인정받느니, 차라리 독자적인 의병군을 만드는 것이 활빈당에게는 훨씬 편한 일이었다. 이렇게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활빈당이 전면적으로 의병활동에 투신함에 따라 의병활동은 의병전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활빈당이 의병군에 전면적으로 뛰어드는 1905년부터 사실상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의병전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어 1915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앞으로 의병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할애할 예정이다. 기대하시길 바란다.


 


의병활동 이외에 당시 을사늑약(2차 한일 협약) 전후로 많은 저항들이 있었다. 따로 어디 넣기가 힘들어서 여기 정리하도록 하겠다. 을사늑약 직후 유생들과 위정척사계열 관료들의 조약파기 상소와 을사5적 처단 상소가 줄을 이었고, 민영환·조병세·홍만식·이상철·김봉학·송병선 등이 자결하였다. 서울 시내 모든 상인들은 철시하여 분노를 표출하였고, 각급 학교도 동맹 휴학을 맺었다. 최초로 학생들이 현실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공격하려는 시도, 을사5적들을 살해하려는 시도들이 줄을 이었다.


 


 


3. 기억은 또 다른 망각의 과정이다.


 


자. 이제 다시 러일전쟁으로 돌아가 필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갑자기 러일전쟁 얘기하니까 조금 어색하지만, 좀 들어주면 고맙겠다. 지난 주에 쓴 3편과 오늘 4편을 통해 살펴본 러일전쟁과 전후의 일들은 우리의 명운을 가로지르는 매우 중요한 역사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이 길게 되었다. 필자가 추리고 추려도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시기의 역사를 잘 모른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봐도 대충 넘어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 나타난 각종 조약이니, 그 조약들로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 정도만 짚고 넘어갈 따름이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중요하니까 짚고 넘어가기는 하는데, 최소한만 짚고 넘어가자’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시기를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전쟁으로 지면을 채운 뒤, 일제시대로 훌쩍 넘어간다. 그러다 3.1운동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이건 분명 역사의 망각이다. 러일전쟁과 그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이고, 우리의 운명을 갈린 시기이다. 조약 몇 개만 외우고, 얼렁뚱땅 넘길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약들 몇 개 외우고 나면 그 시간이 끝난다. 왜 이럴까?


 


필자가 단언컨대,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쪽팔리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이라는 존재는 항상 쪽팔리는 역사는 숨기게 마련이고, 조금이라도 내세우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상세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왜 우리가 분단된 나라에서, 왜 지금도 남의 나라 군대가 들어와 있고, 왜 남들이 늘 쳐들어오고, 왜 싸우는 사람과 굴종하는 사람들로 갈라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사를 이상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전후에 있었던 사실만 잘 추려서 가르쳤어도 우리 학생들은 앞에서 말한 '왜?'라는 물음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쪽팔리는 역사는 애써 망각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자랑스러우면 무조건 상세하게 설명해주면서 그 망각의 빈틈을 메우는 식이다. 이런 역사교육을 받고는 그 시대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건 우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일본과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이 이 전쟁의 승리만을 기억하고, 그들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수많은 참혹한 일들을 다루지 않는다면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인 것이다(필자는 청일전쟁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다루는 논문자료를 들고 있다. 우려했던 대로 그들의 승리만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러시아도 ‘극동 지역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전쟁’정도로 애매하게 둘러 넘기고, 그들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저질렀던 수많은 탈법과 침략행동들을 외면한다면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기억은 또 다른 망각의 과정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 일본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자신에게 쪽팔리는 것을 망각하기 위한’ 기억이 아닐 날이 오길 바란다.


 


 


4. 당시 세계사의 흐름


 


러일전쟁이 바빠서 당시 세계사에 대해서 미처 다루지 못했다. 당시 세계는 어떤 분위기였을까?


 


먼저 혁명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1904년에는 중국에서 화흥회가 결성되었고, 이것은 1905년에 중국 혁명 동맹회에 합류하여 신해혁명의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아시다시피 1905년 1월에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민중들이 짜르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고, 혁명 세력들은 1905년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시작하여 러시아를 혁명의 분위기로 몰고 간다. 프랑스는 영국 노동당과 비슷한 과정을 겪는데, 프랑스 사회당이 사회주의 여러 세력들을 결집시킨다. 그리하여 1905년 4월에 통일사회당이 발족한다. 미국에서는 IWW라고 불리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결성된다. 이 단체는 급진적인 노동자 단체이다. 이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은 1920년대 중반까지 미국사회를 흔들게 된다.


 


한편 열강들의 세계 재편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 시기, 열강들이 마지막까지 눈치 보면서 남겨놓았던 지역들을 하나하나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모로코는 프랑스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도미니카도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 노르웨이는 스웨덴에서 분리 독립 하였고,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었던 발칸 반도는 열강의 개입으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드물게도 태국은 고종 황제가 실패한 일종의 중립화를 일구었다. 태국은 1904년에 영국·프랑스 세력권 협정으로 외연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열강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위태로운 역사를 이어나간다.


 


 


5. 예고


 


이제 의병전쟁의 시작이다. 민중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의병전쟁일 일으키게 되었고, 바로 한반도를 먹으려던 일본은 진땀을 흘리게 된다. 한편 개화파는 애국 계몽 운동을 일으키면서 타협주의로 나서게 되고, 고종 황제는 마지막 카드를 빼어 든다. 다음시간에는 1906년~7년까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임종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