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동현 추천0 비추천0

2009.11.27.금요일


이동현


 


아프로디테는 그리스 신화의 주요 남신 일곱 중 반수 이상과 관계를 맺었다. 남편 헤파이스토스를 포함해 그의 형제 아레스, 헤르메스, 디오니소스와 사랑을 나누었고 숙부가 되는 포세이돈과도 애정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시아버지 제우스와 지옥에 처박혀 있는 하데스 그리고 사랑에는 젬병이었던 아폴론을 제외한 모든 이성애 상대를 공략한 셈이다.


 


남편을 제외한 다른 연애상대들과 자식도 많이 낳았다. 인간의 자식은 제외하고 신의 경우만 따져봐도 아레스와의 사이에 포보스(공포)와 데이모스(패배), 하르모니아(조화)를 낳았고, 헤르메스와 낳은 자식 중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헤르마프로디테가 있다.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는 에릭스가 태어났다고 하며,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는 결혼의 신 히멘과 거대한 남근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정력왕 프리아포스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셰 <아프로디테>


 


[1] 나도 갖고 남도 주고


 


아프로디테는 다양한 신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대에게도 같은 자유를 허용했다. 그녀는 연인이 다른 사람과 맺는 연애사에 질투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질투는커녕 자신의 연인에게 새로운 연인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새로운 연인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아프로디테는 디오니소스와 잠시 사랑을 나누었으나 광기에 빠진 디오니소스는 방랑길에 들어섰고 그가 떠나자 아프로디테는 새로운 연인을 만났다. 이렇게 이들의 관계가 정리되는 것 같았으나 인간계에서 복잡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사건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파시파에의 딸이었던 아리아드네의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크레타의 왕비였던 파시파에는 무척 정력적인 여성이었는데 인간으로는 부족했는지 황소와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뚱이를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미노스 왕은 교묘한 미궁을 만들고 불륜으로 태어난 괴물을 가두어버렸다.


 


당시 크레타의 속국이었던 아테네 사람들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그중에 가장 가혹했던 것이 인신조공으로 매년 일곱 명의 소년소녀를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밥으로 바쳐야 했다. 아테네의 후계자였던 테세우스는 아테네 사람들의 희생을 막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가겠노라 자원했다. 제물이 될 다른 소년소녀들과 함께 미노스 왕 앞에 서게 된 테세우스 왕자는 아리아드네 공주와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구하기 위해 칼과 실타래를 주었고 풀어놓은 실타래를 더듬어 테세우스는 무사히 살아나왔다.


 


사랑은 가장 이성적인 정신착란 상태다. 아리아드네 역시 가슴 아프지만 아버지의 나라를 저버리는 미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호동왕자에게 눈이 멀어 자명고를 찢어버린 낙랑공주도 이와 비슷한 정신상태였을 것이다. 이 죽일 놈의 사랑을 어쩔 텐가? 결국 아리아드네는 조국을 등지고 적국의 왕자 테세우스를 따라 아테네로 가는 배에 오른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낙소스 섬에 정박한 뒤 아리아드네가 잠든 틈을 타 섬에 아리아드네를 남겨두고 몰래 도망쳤다. 테세우스 입장에서는 그녀 덕분에 미궁에서 빠져나온 건 고마운 일이지만 위기가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스토리는 아침 드라마에도 자주 나온다. 고생고생 뒷바라지해서 남편 내조했더니 성공한 이 남자 바람났네.


 


배은망덕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고 망연자실 낙소스 섬에서 울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불쌍하게 여긴 이는 사랑의 여신이었다. 아프로디테가 나서 뒷수습을 시작하자 모든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여신은 울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 인간의 애인 대신 신의 애인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여 청승을 달래준 뒤 디오니소스를 데려왔다.


 


남은 생을 함께하리라 믿었으나 제 잇속만 챙기고 도망가 버린 ‘과거의 남자’를 도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새 남자’를 추천했다는 점은 아프로디테의 연애관을 그대로 나타낸다. 또한 여신은 약속대로 충분히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이미 자신이 검증한 바 있는 남자)를 데려와줬고 말이다.


 



틴토레토 <아리아드네, 아프로디테와 디오니소스>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의 그림을 보자. 그림 왼쪽에는 낙담한 아리아드네가 나무둥치에 앉아 있고, 반대편에는 포도주의 원료로 몸을 장식한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를 들고 손을 내민다. 하늘에서 내려온 아프로디테 여신은 망설이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 한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디오니소스에게 인도한다.


 


결국 아리아드네와 디오니소스는 결혼했고 아프로디테 여신은 아리아드네에게 그림에서 보이듯 반짝이는 금관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외톨이가 된 여자에게 다정다감한 신랑을 데려다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결혼선물까지 준비해 오다니 참으로 성실한 중매꾼이다. 게다가 이 금관은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제작한 것으로 전세계에 하나뿐인 명품이다. 결혼식의 신랑이 술의 신인 만큼 술을 석 잔은 넘게 대접받았을 거다.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아리아드네의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라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인간 아리아드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디오니소스는 연인을 기리기 위해 금관을 하늘로 올려 보내 별자리를 만들었다.


 


아리아드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을 통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규칙을 알고 있는 동시에 아버지의 통치 하에 있는 미로를 빠져나올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그곳을 탈출할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자신을 이끌어줄 어떤 남자가 필요했기에 테세우스와의 미친 사랑을 통해서만 아버지로부터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은 뒤 절망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또다른 남자가 필요했다.


 


이렇게 약점 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법인가. 아프로디테는 디오니소스를 데려왔고 디오니소스는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구원자가 되었다. 현실의 모든 여자에게 이런 행운이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한 남자와 관계가 끝났다고 주저앉아 울고만 있던 아리아드네에게 사랑의 달인 아프로디테 여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명심하자. “너 자신을 사랑하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가 너를 사랑하게 될 거란다.” 스스로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계속’ 사랑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2] 보기에 참 좋더라


 


아프로디테는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혐오증 환자의 사랑에도 축복의 불길을 내려주었다. 사이프러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섬에 있는 여자 중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이상적인 여자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는 현실계의 여자를 창녀 또는 악녀로 취급했고 그중 어느 쪽과도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한 독신으로 살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는 상아로 정교하게 만든 여자 조각상을 곁에 두고 살았다.


 


피그말리온은 상아조각에 입을 맞추고 끌어안기도 했다. 끌어안다가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까 세게 안지도 못했다. 때로는 조각상을 위해 조개껍질이나 조약돌, 꽃, 보석이나 구슬 같은 선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조각상에 옷을 입히고 반지와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채워주었다.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거듭하면서 피그말리온은 깨달았다. 어떤 화려한 옷과 장신구도 상아조각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 태양빛을 가리는 구름처럼 그녀의 빛나는 미모를 가릴 뿐이다. 그래서 그는 조각을 알몸으로 뉘여놓았다. 때로는 상아조각과 함께 눕기도 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현대 오타쿠의 기원을 보여준다. 골방에 애니메이션 주인공의 피규어를 모아놓고 즐거워하는 것과 피그말리온이 다를 게 없다. 일본의 다나카(가명, 21세, 무직) 군은 오늘도 만화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하악하악 다짐한다. “나는 레이랑 결혼할 거야.” 고대 사이프러스의 피그말리온(본명, 나이미상, 조각가 겸 왕) 역시 같은 결심을 했더란다.


 


사이프러스 섬은 아프로디테 신앙의 중심지로 정기적으로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피그말리온은 여신께 제물을 바치면서 간곡하게 고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시여, 부디 제 아내로 저 상아여인……이 아니라 저 상아여인 ‘같은’ 여인을 점지해주소서.”


 


작은 마음의 소유자 피그말리온이 차마 그 상아조각을 아내로 달라고 기도하지는 못했으나 넓은 마음을 가진 아프로디테는 이를 꿰뚫어보았다. 기도가 끝나자 제단의 불길이 세 번이나 치솟아올랐고 계시를 받은 피그말리온은 냅다 집으로 달려왔다. 피그말리온이 상아조각상에 입을 맞추자 코끼리뿔로 만든 조각이 살아 있는 여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이 된 여인의 이름은 갈라테아, 그들의 결혼식에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친히 하객으로 참석해주었다고 한다.


 


신화는 이들의 결혼생활이 어땠는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 완벽한 상아여인 갈라테아가 오타쿠 조각가인 남편과 함께 살면서 ‘집안에 먼지 날리니까 조각 따위 집어치워요’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마누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아프로디테에게 사랑은 자신이 하든 타인이 하든 하면 할수록 즐거운 삶의 축복이었다. 예전에 사랑했던 남자 디오니소스가 방랑길을 떠날 때 매달려 붙잡지 않았고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새로운 연인 아리아드네와의 관계를 축복했다. 아프로디테의 상상력은 연인을 독점하는 기존의 연애법을 벗어나 연인에게 다른 연인을 소개해줄 수도 있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서로를 독점하지 않는 자유로운 다자연애법을 폴리아모리*라 부른다. 이런 관계는 상대방의 시간과 재화와 삶의 방식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굳이 두 사람이 만나서 하나가 될 필요도 없고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이나 그 이상이 관계를 공유해도 무방하다. 이쯤 되면 상대의 성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상상력은 정형화된 관계가 와해되는 틈새에서 자라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거창한 목표를 배제하고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다 보면 사랑의 여신같이 서늘하면서 끈적끈적한 연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상대를 구속하기 위해 계략을 세우느라 고통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 폴리아모리(polyamory) : 비독점적 다자 연애관계. 아프로디테로 상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랑법이다. 세부적으로는 트라이어즈(Triads) : 세 명의 파트너가 느슨한 관계, 비(Vee) : 한 명을 중심으로 두명이 얽혀있는 관계, 트라이앵글(Triangle) : 세 명의 파트너가 서로 얽힌 관계, 폴리피델리티(polyfidelity): 세 명 이상의 집단이 결합한 관계 등으로 나뉜다.


 


 


이동현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