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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7.금요일


파토


 


선덕여왕도 이제 막판으로 치닫는다. 평생 이렇게 열심히 본 한국 드라마는 한편도 없었다. 추리 소설 내지 해리포터를 연상케 하는 끝없는 수 싸움, 미실을 위시로 한 살아있는 다양한 캐릭터들, 드라마틱한 극 전개와 화려한 영상과 복색 등 머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게 없다. 간혹 나오는 질질 끌리는 멜로 설정은 좀 깼지만...


 


여하튼 이제 미실도 죽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덕만. 정치의 현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에 눈을 뜬 덕만은 성격은 물론 외모조차 점점 미실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그 카리스마를 쫓아가는 건 역부족이지만 머 그거야 이요원의 한계일 테고..


 


그건 그렇고, 오늘은 마 선덕여왕 전체를 통틀어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을 갖고 이야기를 할까 싶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작가들의 욕심이 어디까지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데, 첨성대/천신황녀 관련된 덕만과 미실의 독대 장면 되겠다.


 


좀 길게 인용해 보자.


 


 





: (첨성대를 만들면) 신라인이면 누구나 천기의 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누구라도 더 이상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해 불안을 조장하고 사익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 그래서 신권을 포기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 공주님. 세상은 종()으로도 나뉘지만 횡()으로도 나뉩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세상을 종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 또 신라인 안에서는 공주님을 따르는 자들, 이 미실을 따르는 자들. 하지만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와 전 같은 편입니다. 우린 지배하는 자입니다. 미실에게서 신권을 빼앗으셨으면 공주님께서 가지세요.


 




 


(중략)


 


: 백성은 왜 비가 오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일식이 어찌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비를 내려주고 누군가 일식이라는 흉사를 막아주면 그만인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입니다.


 


: 그건 모르기 때문입니다.


 


: . 모릅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 백성이 책력을 알면 스스로 절기를 알게 되고 스스로 파종을 할 때를 알게 됩니다. 그리되면 비가 왜 오는지는 몰라도 비를 자신들의 농사에 어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은 게 백성입니다.


 


: 안다는 것 지혜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에게 안다는 것은 피곤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 희망은 그런 희망과 고통을 감수하게 합니다. 희망과 꿈을 가진 백성은 신국을 부강하게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신라를 만들 것입니다.


 


: 공주님, 미실은 백성들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공주께선 백성들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허나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공주께선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  


 


이 대목이 선덕여왕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훌륭한 명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대화가 단지 미실이나 떡만, 신국 뿐 아니라 2009년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까지 포함하는 민주주의와 근대정신 전반에 걸친 논쟁이기 때문이다(드라마에 이런 메타포를 과감히 집어 넣은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여기서 덕만과 미실은 그 시대적 한계 내에서 좌와 우, 민주와 반민주, 진보와 보수, 근대와 중세 등을 대략 상징한다. 근데 여기서 특기할 것은 미실이 지배와 피지배 계급을 횡으로 나뉜 세상이라는 명확하고도 적절한 문장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횡으로 나뉜 세상은 실은 지금 이 순간도 그대로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횡선을 지우려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를 대놓고 표방한 공산주의는 계급 독재, 당 독재 개념을 거쳐 결국은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 체제로 변했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눈에 띄지는 않지만 더욱 굵은 선을 매일같이 덧칠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실과 덕만이 여기서 횡의 키워드로 공히 논하는 것은 지식,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정보의 공유다. 지식과 정보의 독점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열쇠이며, 그 독점한 정보를 통해 조작된 환상의 행사는 결국 너희들은 할 수 없는 일을 나는 할 수 있다라는, 능력의 차이라는 새로운 환상을 재생산해 낸다.


 


지금까지의 정치/통치 행위는 소소한 차이는 있을망정 기본적으로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 우리 모두는 지금 미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보수는 이 횡으로 나뉜 세상, 미실의 세상을 인정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태생적 조건이나 개인적 능력을 통해, 혹은 지식과 정보에의 배타적 접근을 통해 횡선 위에 있게 된 소수가 지배계급이 되어 권력과 부를 향유한다. 이는 그들에게 자연스럽고도 정당한 행위이며 효율적인 사회 시스템의 요건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능동적 보수는 이 횡선의 위에 속하거나 속함을 목표로 한다.


 


반면 진보의 가치는 이 횡선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고 이를 통해 누구나 중대한 사안들에 접근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지배와 피지배의 구분은 점차 없어지고 권력과 부는 모든 구성원에게 최대한 골고루 분배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불평등과 부의 독점이 극복되고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다.


 


위에 필자의 관점에서라는 전제를 단 이유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친미 친북 등등의 구분과 관계없이 나는 저런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규정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스스로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도 진보가 있을 수도 있고, 좌파 중에서도 얼마든지 극단적 보수가 있을 수 있다.


 


암튼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수는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으며 추구할 수도 없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던 간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이상을 믿지 않으며 그런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는 선거.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라는 지배자를 선출하지만 그는 일단 당선되고 나면 자기 방식대로 권력을 행사하며 국민의 뜻을 굳이 반영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형식이요 명분이요 대세일 뿐이다. 만약 시대가 허락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는 가차없이 노골적인 중세식 횡선을 다시 그으려 할 것이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좀 그런 꼴이라는 점,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 사실 보수의 이런 속성은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궁금한 것은, 위에 규정한 진보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들은 정말로 횡으로 나뉜 세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걸까?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도 대부분 횡선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거나 이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결국 현실에서는 진보 정치인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이라는 종으로 나눈 세상이 있는 반면, 진보 보수 포함해 모든 정치인들과 나머지 시민이라는 횡으로 나눈 세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실이 지적하고자 했던 포인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 정치인에게는 보수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것보다 훨씬 엄밀한 윤리적 잣대가 적용될 수 밖에 없다. 보수에게서 기대하지 않는 것을 진보에게는 기대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보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아니면 국회의원에 당선되거나 정권을 잡아 스스로 그 횡선의 위로 뛰어 올라가고는 말로만 진보의 생색을 내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보수는 그게 본질이지만 진보는 그러면 사기다.


 


하지만 진보라는 간판 아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현재의 정치 제도와 시스템이 이런 유혹을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잘난 누군가는 넘고 나머지는 지켜만 본다면


그건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두 같이 넘어야,


아니 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의 구분 자체가


사라져야 민주주의의 이상은 완성되는 것이다. 


 


세상에 그어진 횡선을 적극적으로 제거해 가는 노력은 이미 그 위로 올라간 사람이 내려다보며 베푸는 시혜의 방식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대의민주제의 한계이고, 그런 이유로 대의제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횡선을 조장할 수 밖에 없는 제도이다. 


 


신라시대에 덕만이 주고자 했던 희망은 환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세상에선 그런 꿈이 결코 헛된 환상만은 아니다. 국민에게 권력이 돌아가게 하고 길고 지긋지긋한 횡적인 세계의 종지부를 찍어 나가기 위해서는, 직접민주제를 포함해 지금까지의 세상을 뛰어넘는 떡만스러운 과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며칠 전 박원순이 제시한 국민공천제는 기본적으로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그걸 실제로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런 형태의 새롭고 열린 방향성의 제시와 그에 대한 진지한 숙고는 벽에 부딪힌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발상의 전환으로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유시민은 24일 좌담회에서 국민공천제는 불가능하며 제대로 된 정당에서 제대로 된 절차로 좋은 후보를 만드는 방식으로 돌아가야지, 이것이 잘 안 된다고 정당정치를 부정하면 한국 정치는 우주 미아가 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이건 상향식 공천제를 비롯한 혁신적 발상을 내놓았던 과거의 유시민을 기억할 때 실망스러운 반응이다. 박원순의 주장은 기초지방자치선거에 국한되는 것이니 굳이 정당정치를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정당정치가 신이 내린 절대선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그리 제대로 작동해 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한국 정치는 그가 걱정하기 전에


이미 우주 미아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그는 대신 전국적으로 한나라당과 진보연대 1 1의 대결로 선거 구도를 만들면 이긴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국민공천제 이상으로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군정 종식 같은 거대한 명분 앞에서도 연대하지 못했던 우리 야당이다. 게다가 이날 그의 주장처럼 윈-윈의 거래를 통해서만 연대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연대의 주체가 둘이 아닌 4,5개로 나뉘어져 있는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만약 실현한다면 박수를 보내겠지만).


 


또 그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의 고충과 관련하여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이 일종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한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사고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 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비판과 몰이해 등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조직도 기반도 없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의 입장에서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지분이라는 것도 논공행상 식으로 자리나 이권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지지자들이 노무현을 통해 바랬던 정책을 실현하고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었던가.


 


이는 국민들의 정치 참여 의식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벌어지는 현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도 가장 앞서 있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방식은 다르지만 촛불 역시 근본적인 궤에서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통치 행위의 주체인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런 부분에서 고민이 생길 수 밖에 없고 그 모든 압박들이 노무현을 결국 죽음에까지 몰고 간 요인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슬픔과는 별개로,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그런 우리 국민의 권력에 대한 지분 혹은 참여 의식을 비판하는 대신 오히려 양성화 하면서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에너지로 사용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국민참여당이라는 이름을 내건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는 노무현의 유지를 진정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인 국민이 권력의 지분을 요구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행위로 폄하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기에 맞게 정치 제도가, 세상이 바뀌어 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물론 지금 당장 정당정치를 부정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국민공천제나 그와 유사한, 현실 정치가 정당이라는 테두리에 구속되지 않고 국민과 보다 전폭적이고 구체적으로 연계되는 시도는 당장 궁리되고 시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고, 또 궁극적으로도 정당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언젠가는 정당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향해 한걸음씩 나가야 진짜 진보다.


 


이런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정치는 결코 국민의 수준을 따라올 수 없고 결국 MB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는 이런 따우 상황이나 반복될 뿐이다.


 


 




 


...모든 정치인에게는 덕만과 미실의 두 얼굴이 숨어 있다. 맨 처음 말했듯, 극중에서 떡만이 권력을 잡고는 조금씩 미실처럼 변해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그건 권력 구조와 시스템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사람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덕만이 미실과 같은 간교한 정치인이 되지 않으려면 대통령으로서 권위를 내려놓았던 노무현의 길을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는 결국 성공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봤다.


 


이를 넘어서는, 국민의 꿈이 더 이상 꿈에 그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정치와 사회 구조에 대한 끝없는 고민과 적용이 없이는 우린 결국 얼굴만 달라진 또 다른 미실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뿐이다


 


신라시대부터 앞으로도 계속.


 


 


 


딴지 논설위원 파토(pato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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