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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6.목요일


미스와플


 


언젠가 삼십 대 여자들이 두서없이 모인 자리가 있었다. 적립식 펀드와 갑상선 질환, 최근 연예가 동향이 한 바퀴 돌고 나서 당연하다는 듯 섹스 스토리가 두서없이 고백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부에 적이 있었다. 바로 '처녀'라고 주장하는 후배 봉순이었다.
봉순이를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 건 봉순이가 처녀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건 분위기가 무르익고 깊어지면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봉순이의 실체 때문이다.


 


봉순이에게는 3년 사귄 애인이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이 그동안 여행도 꽤 많이 다녔고 봉순이가 애인 집에도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께 인사도 마쳤고 늦어도 내년엔 결혼을 할 거라고 했으니 당연히 넘어야 할 고지는 모두 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봉순이는 아니라고 했다. 아직 섹스를 안 한 이유, 그건 서로 땡기기는 무지하게 땡겼으나 결혼하기 전까지 서로가 지켜줘야 할 것은 지켜주기로 약조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치고 손만 잡고 자거나 입만 맞춘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내 예상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봉순이의 이야기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경험 많은 인간들이 떠벌리는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럴 때마다 은근히 ‘네가 뭘 알겠냐’ 는 분위기가 한 번씩 조장되니 봉순이가 발끈한 것이다. 키스하고 손만 잡고 잤다던 봉순이는, 어느새 서로 만질 건 다 만져 봤다고 하더니, 결국은 오럴섹스까지는 한다고 실토를 하고 말았다.



아마 그 자리에 봉순이를 제외하고 다른 한 명이라도 처녀가 있었다면, 봉순이는 끝까지 그런 실토는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을 두고 '처녀들의 연대'라 부른다.)



그러나 거기엔 모두 선수들만 있었던 탓에 왠지 소외되는 기분을 참지 못한 데다 그들의 경험담이 봉순이의 숨겨진 경쟁력을 은근히 유발시킨 모양이었다.



그러나 봉순이의 고백은 그 자리에서만 진실할 뿐이다. 또 내 경험상,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봉순이는 다시 경험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결혼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처녀라는 사실을 스스로 굳게 믿을 것이다.
그렇다고 봉순이가 처녀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봉순이에게 궁금한 것이 있을 뿐이다.



'결혼하기 전까지 서로가 지켜줘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봉순이의 생각대로라면 그것의 실체는 아마 처녀막일 것이다. 처녀막은 생물학적으로 처녀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상징이니까.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랫동안 사람들은 처녀막의 유무에 관해 꽤 관심 있어 했다. 그것이 한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 기준에서 오럴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차지하는 것일까?



선배는 또 교실, 복도론을 주장했다. 오럴이란 이를테면 교실에는 절대 안 들어가고 복도에서 놀다 문고리만 실컷 만지작거리고 나온 것이란다.



그럼 그것으로 출석을 안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 처녀막을 지키기 위해 항문성교를 했다면 그것 역시 안 한거나 마찬가지가 되고, 그들의 처녀성은 지켜지는 것일까?



물론 순결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열 남자를 거느린 뒤에 처녀막 재생수술을 하고 처녀라며 시집가는 여자가, 열심히 오럴을 즐기면서도 나는 처녀라고 주장하는 여자보다 더 낫다고 본다. 온 교실을 다 뒤집어 놓고, 그러니까 관계의 끝까지 가 보고 학교 안 갔다고 하는 것 보다 복도에서 어물쩍거리다가 슬슬 뒷걸음질 치고는 학교 안 갔다고 하는 게 더 싫기 때문이다.


 


내가 남자와 처음 자게 된 데에도 이런 심정과 비슷한 배후가 있었다.
그와 사귀면서 한 가지 배우게 된 명언이 있는데 바로 '스킨쉽에는 후퇴가 없다'는 명언이다. 그런데 스킨쉽에 후퇴는 없지만 한계는 있더라.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을 때 한계가 온다. 그리고 그 마지막 고지는 언제나 오럴이다. 그러니 오럴섹스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내가 처음 잤던 그 남자는, 오럴 이후에는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허구헌날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 걸 보면서 과연 이게 진정한 배려일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배려란, 여관보다는 영화관이나 맛있는 밥집을 찾는 것이지 여관에 데려가서 오럴까지만 하고 끝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먼저 말했다. 오럴만 하니 입만 아프다. 오늘은 끝까지 가 보자. 남자의 얼굴에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네가 상처받을까봐.”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이러는 건 뭐 상처가 안 되는 줄 아니?”



내 반박에 그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상처의 한계란 것이 그렇게 구간별로 결정이 되는 것일까?


 


너는 가슴만 만졌으니 너랑 헤어지면 이주 정도 슬플 예정. 너는 젖꼭지도 깨물었으니 이주 반, 너는 섹스 10회에다 오르가즘 6회 제공자니 석 달.



이런 건 없다. 그것보단 차라리 얼마나 자주 전화하고, 얼마나 자주 밥먹었냐고 물어봤느냐가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랑의 질량을 결정하고, 그 질량이 상처의 크기를 결정하는 거 아닌가?


 




이런 마음가짐의 남자라면 하루라도 더 빨리 헤어지는 게 나았겠지만, 나는 반대로 그와 꼭 섹스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순전히 오기 때문이었다.



그가 정말 육체적 관계의 정도로 상처의 정도를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이대로 헤어지면 나는 그의 기억속에 남지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섹스가 서로를 각인시키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당연히 큰 작용을 한다. 다만 그 섹스의 정의를 '삽입'에 국한시켜 생각하지는 말자는 말이다.



법정에서는 그것이 형량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나는 적어도 책임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변명의 한계치로, 여자가 남자에게 ‘나는 적어도 순결은 지켜왔다’는 고백의 마지노선으로, 결국 그 ‘적어도’를 위해 '삽입'을 이용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와 그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끝까지 가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비겁한 건 부끄러운 일이다. 밤마다 여관으로 기어들어가면서도 서로를 지켜준다는 이상한 논리로 도망갈 구멍을 파 놓는 건 분명 비겁한 짓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든, 나는 그런 식으로 연애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 버렸다. 


 


인생에 한번밖에 오지 않을 순간을 위해, 그래서 아껴놓겠다는 사람들까지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오럴만 했다고 해서 그가 나를 지켜주었다거나, 그가 내게 책임져야 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삽입을 하지 않았다고 내가 처녀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첫 섹스의 경험이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하고 거창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완벽하고 완전한 사랑의 결말을 담보로 하는 순간에 '삽입'을 허용한다고 해서, 그 사랑이 완벽하고 완전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랄만 하자고 하는 남자와는 오래 만나지 말기 바란다. 오랄만 하자고 하는 여자와도 오래 만나지 말기 바란다. 순결을 지키고 싶다면, 제대로 지키는 쪽을 권하고 싶다. 어설프게 지키면, 아니 지킨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자부심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공산이 크다.


 





#오럴만 하자는 남자에게 한 방을 날리는 방법집요하게 물어라. 왜 그래야 하는지.


오럴만 하자는 마음의 배후에는 재미는 보되 책임은지지 않겠다는 얄팍한 심리가 분명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남자에게 오랄은 섹스나 진배없다. 그에 비해 여자는 대부분 그렇지 않다. 신체 구조상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저만 좋자고 저러는 거라고 오해해도 무방하다.  
그런 남자에게는 한 마디를 날려라. 



“너는 먼저 정말 여자를 위하는 방법부터 배워라. 그리고 다시 연락해라.”





 





<쉿!(She it!)> 저자 미스와플(marun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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