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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동화] 바람의 파이터

2004.5.8.토요일
딴지 편집국







건강동화의 저자 마태우스님께서 그럴껄님의 오마쥬 기사 <올갱이 해장국의 악몽>에 화답하는 기사를 보내주어 전격 공개한다.


-편집자 주





그의 첫인상은 산적이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가늘게 찢어진 눈, 덥수룩한 수염은 우리가 만화에서 익히 봐온 산적과 너무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명성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럴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태우스의 제자가 되고자 했다. 기생충 탐정이 되는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기에 그간 제자를 받지 않았지만, 이 청년이라면...


"고향이 어딘가?"


"산동성에서 왔습니다. 조선족이죠"


산동성이라면 기생충의 박물관, 그 역시 어려서부터 온갖 기생충의 습격을 받으며 기생충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왔다고 했다. 그 날부터 그는 마태우스 탐정 사무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예비탐정으로서의 계단을 밟아 나갔다.







 
"손을 푹 담구게"
"아니 이건 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난 세숫대야 깊숙이 손을 담궜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그럴껄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니 방송에 나와선 기생충학이 대변 검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하더니, 대변더미에 손을 넣으라는 건 또 뭡니까?"


내 무서운 눈초리를 본 그는 할 수없이 표면에 손을 얹었다.


"더 깊이!"


그는 눈을 꼭 감고 서서히 손을 넣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많이 먹게. 체력은 말이지, 국력이야"


고된 훈련에 지친 그를 위로하기 위해 진수성찬을 차렸지만, 그럴껄은 몇 숟갈 뜨지 못하고 숟가락을 놓았다. 가슴을 쓰다듬는 걸 보니, 넘어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는 듯했다. 뭔가 한마디 해줄 필요가 있었다.


"자네가 속이 거북한 것은, 아까 본 대변을 계속 떠올리기 때문이야. 상상이란 인간이 고통을 견디는 마취약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론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해. 예컨대, 대변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변기에 담긴 길다랗고 굵은 밤색의 물체를 생각하지. 하지만 우린 그래선 안 되. 난 말야, 대변 얘길 들으면 저 파란 하늘을 생각한다네. 우리가 대변 얘기를 하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네"


"아, 아무리 그래도 대변은 똥이고, 똥은 더러운데..."


마태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있던 단무지를 던졌다. "퍽!"


그럴껄은 이마에 붙은 단무지를 떼서 입에 넣었다.


"대변도 우리 몸의 일부야. 자신의 대변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사랑하겠어? 니가 그렇게 깨끗해? 너도 심심할 때면 코를 후비고, 트림을 하고, 항문 주위를 긁잖아?"


그럴껄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흐흑"







 
그 일이 있은 후 그럴껄은 달라졌다.


"흐음. 이 사람은 삼겹살을 먹었군요. 이건 개피향인걸? 쩝쩝? 다른 대변 더 없어요?"


처음엔 회충이 징그럽다고 만지지도 못했지만, 이젠 회충 두 마리를 이어만든 목걸이를 한 채 잠을 잤고, 광절열두조충으로 된 벨트를 착용했다. 그는 천생 기생충탐정이었고, 마태우스는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봤다. 그는 틈나는대로 추리소설을 읽으며 추리력을 길렀고, 마태우스가 이따금씩 해주는 특강을 들었다. 마태우스와 같이 나간 실전 경험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오늘은 대변을 씻는 걸 가르쳐주지"


그럴껄은 놀란 표정이었다. "대변을 씻어요?"


"그러니까 대변에서 기생충을 고를 때, 식염수로 대변을 씻어 시야를 좋게 한 다음에 찾는 거거든. 대변에 물을 넣고 여기 있는 망으로 거른 다음에..."


대변을 망으로 거르면 고춧가루, 파, 깨 같은 것들이 걸러진다. 망을 통과한 물질에 식염수를 넣고 잘 섞은 뒤 상층액을 버린다. 이런 과정을 대략 6-7차례 반복하면 대변이 깨끗해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기생충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이제 현미경을 보면 돼. 어때? 한결 보기가 좋지?"


그럴껄은 마냥 신기한 듯 현미경을 들여다봤다.


"저기 네모난 것들이 다 기생충이어요? 우와, 졸라 많네요!"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네, 마태우스 탐정 사무소의 조수 그럴껄입니다. 네? 수면병이요?"


수면병이라는 말에 마태우스는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남편이 잠만 자고 일어나질 않아요. 병원에서는 바이러스성 뇌염이라는데, 탐정님이 쓰신 책을 보니 아무래도 수면병 같아서요"


수면병이라는 병이 있긴 하다. 하지만 수면병을 매개하는 체체파리가 우리나라에 없으니, 아프리카에 가지 않는 한 그 병에 걸리기란 불가능하다.


"저, 남편 분은 수면병이 아닐 확률이 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목 뒤의 림프절이 만져진다구요!"


목 뒤의 림프절이 만져지는 것, 이것은 윈터보톰 사인(Winterbottoms sign)이라 불리는, 수면병의 특징적인 병변이었다. 25년 전 TV에서 방영된 <뿌리>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목을 만진 뒤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수면병을 감별하기 위함이었다.


"어서 장비를 챙기게. 급히 가봐야겠어"








마태우스는 그럴껄과 S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여자 하나가 남자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는데, 그녀가 탐정사무소에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수면병의 확진은 혈액 속에서 병원체를 발견하는 것, 간단한 소개를 한 뒤 마태우스는 조심스럽게 환자의 손에서 피를 뽑았다. 슬라이드에 피 한방울을 떨어뜨려 도말한 후, DQ 시약으로 염색했다.


"이럴 수가!"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올리자마자 편모를 움직이며 헤엄을 치는 수면병 원충들이 수없이 관찰되었다. 이 정도로 밀도가 높다면, 환자는 위험했다.


"정말 아프리카에 가신 적이 없나요? 수단이나 잠비아 같은 나라..."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저랑 같이 중국에 다녀온 이후 밖에 나간 적이 없어요"


수면병은 일단 혼수상태가 시작되면 치료에 잘 듣지 않아, 감염 경로가 어떻든간에 되도록 빨리 치료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간 듯했다.


"국립보건원에 가면 희귀한 질병에 대비한 상비약이 보관되어 있거든요. 일단 빨리 약을 드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진단서를 써 드릴테니, 오늘 중으로 다녀오세요. 약 이름은 슈라민(suramin)이구..."


서둘러서 약을 먹였지만, 환자는 사흘을 더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장례식장에서 마태우스는 여인의 손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그 대신 제가 진상은 꼭 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프리카에 가지 않고 수면병에 걸렸다면 다른 사람에 의해 파리가 옮겨졌음을 뜻했다. 환자가 사는 지역은 서교동, 마태우스와 그럴껄은 그 지역 사람들 중 아프리카 서부에 간 사람이 있는지를 뒤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파리를 가져올 수도 있나요?"


마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지. 말라리아가 발생하지 않는 지역에서 환자가 발생했어. 알고보니 그 옆집 사람이 아프리카에 다녀왔는데, 모기가 그 사람의 가방에 실려 그 나라까지 온 거였어. 의도적인 게 아니라면, 이번 경우도 그럴 확률이 높아"


"네, 그렇군요" 그럴껄은 꽤 감동한 눈치였다.


서교동 주민 3만4천명 중 두 달 전에 아프리카를 다녀온 사람은 총 11명, 그 중 1명이 수면병의 유행지인 수단에 다녀왔는데, 그의 이름은 윤경식이었다. 놀랄만한 사실은 또 있었다. 그 지역 주민 중 두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염으로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







 
"이거 놔요!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전 피살자와 일면식도 없다구요!"


경찰에 끌려가면서 윤경식은 거칠게 저항했다.


경찰 : 두 달 전에 수단에 갔다왔지?"
윤 : 네, 갔습니다. 그게 무슨 죄가 되나요?
경찰 : 왜 갔어?
윤 : .........


윤경식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경찰은 그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단정짓고 구치소에 가뒀다.


"알고 그랬으면 살인이고, 모르고 그래도 과실치사야!"


그는 나중에 "채팅해서 알게된 수단 여자를 만나러 갔다"고 주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 잘한다!"


사무실에서 메이져리그 야구를 보고있던 마태우스에게 그럴껄이 다가왔다.


"저...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뭐가?"


마태우스는 야구볼 때 말시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윤경식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범인이 아닌 것 같아서요."


끝난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다니, 그것도 한창 야구를 보는데.


"이봐, 정 궁금하면 자네가 조사해 봐. 참, 어제 맡긴 대변은 잘 다져 놨나?"
"네, 냉장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럼 저 좀 나가보겠습니다"


그럴껄은 장비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저저저, 저녀석... 수사를 감으로 하나? 수사는 말야, 과학이라고!"







 
그럴껄은 열심히 그 사건에 매달렸다. 좋아하던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잠도 거의 안자는 듯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피부도 꺼질해져, 이젠 길거리를 걸으면 다들 피할 정도였다. 그렇게 2주가 지났을 무렵, 그가 마태우스에게 입을 열었다.


"윤경식은 역시 범인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누가 범인이지?"
"그러니까..."


그럴껄은 그간 밝혀낸 사실을 설명했다. 죽은 남자의 소지품을 뒤지다보니 파라다이스 모텔의 성냥이 나왔다. 다른 모텔이 다 그렇듯, 파라다이스 역시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는 러브호텔, 그렇다면 그 남자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남자의 사진을 들고 파라다이스에 간 그럴껄은 그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자주 호텔에 왔다는 종업원의 증언을 들었고, 경찰의 협조를 받아 휴대폰 통화 내역을 조사한 결과 뻔질나게 전화한 여인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녀의 이름은 박마리, 나이는 33세고, 애가 둘입니다"


그럴껄은 박마리를 찾아갔다.


"이 남자 아시죠?"


남자의 사진을 내밀자 박마리의 얼굴이 흑빛으로 변했다.







 
"피살자가 박마리의 차를 들이받은 적이 있습니다. 둘은 그렇게 만났고, 그때부터 관계를 가져왔던 겁니다. 박마리의 남편은 둘의 관계를 눈치챘고, 소리 없이 남자를 제거할 생각을 했지요"


얘기하다 보니 마태우스는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마선생님, 일어나세요. 제 말을 마저 들으셔야죠!"


화들짝 놀라 잠을 깬 마태우스는 입가의 침을 닦았다. "어, 그래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남편은 대학 때 생물학을 전공해 수면병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체체파리를 구해다 남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최근 석 달 간 그는 수단에 네 번이나 갔다왔는데, 그게 다 체체파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껄의 말을 들은 마태우스는 상념에 잠겼다. 수천 개나 되는 러브호텔이 미어터지는 불륜의 천국 우리나라, 그 불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그로 인한 범죄는 또 얼마인가.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인가?"


그럴껄은 한숨을 푹 쉬었다.


"글쎄요, 미망인에게 말을 하면 좀 문제가 되지요. 몰라도 될 고인의 불륜을 알 게 된다면, 그녀에게 상처로 남을 테니까요. 어쨌든, 억울하게 감옥에 가있는 윤경식부터 구해내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마태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잡아야 하지?"


"그가 그런 짓을 한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 해서 살인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의 집을 뒤지면 아마 증거가 나올 겁니다"


마태우스는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단해! 자넨 이제 내 조수가 아니라, 그럴껄 탐정이네. 사실 나도 윤경식의 무고함을 알고 있었어. 단지 자네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랬던 걸세. 자네, 날 믿지?"


그럴껄이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럼요,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마리의 남편 이달호가 아내의 불륜을 눈치챈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몸이 아파 집에서 쉬는데, 아내 휴대폰에 문자가 뜬다. 호기심이 일어 지갑을 열고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2시에 비가 오니 꽃 271송이가 떨어지다 -흑표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파라다이스 271호에서 2시에 만나자는 뜻이었다. 이달호는 분노했다. 내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용서할 수 없다!


사흘 간 궁리한 끝에 이달호는 수면병 생각을 했고, 연구를 빙자해 수단으로 출장을 갔다. 남자가 아침마다 조깅을 한다는 걸 알아낸 이달호는 수단서 구해온 체체파리를 들고 조깅을 하는 길목에서 남자를 기다렸다. "쉭!" 사흘 간 굶은 체체파리를 날렸지만, 파리는 하늘높이 날라 갔다가 낙하해 엉뚱한 사람을 물고 만다. 그녀가 첫 번째 희생자인 김옥화였다. 두 번째로 구해온 체체파리는 사흘째 굶어죽었고, 그 다음 파리 역시 반대편으로 날라가 마주오던 남자를 물었다. 두 번째 희생자는 그렇게 죽었다.


"에이 쌍, 졸x 안 맞네!"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달호는 기다란 대롱을 만들어 체체파리를 넣은 후, 남자를 향해 힘차게 불었다.


"윽!" 남자가 잠시 목을 만지더니, 이달호 쪽을 한번 흘기고는 계속 뛰어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부터 남자는 더 이상 조깅로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마태우스와 그럴껄은 체체파리의 흔적이 있으면 형광을 내는 시약을 만들어 냈고, 그 약을 통해 이달호의 집 여러 군데서 체체파리의 자취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던 이달호는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마태우스는 차를 몰아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그럴껄이 경찰청장이 주는 탐정 허가증을 받는 날이었다. 그나저나 접촉사고를 내서 눈이 맞았단 말이지. 나도 한번 접촉사고나 내볼까? 혹시 알아? 묘령의 여자라도 만날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데 쾅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마태우스는 목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야?"


"어유,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험상궃게 생긴 남자가 뒷차에서 내렸다. 마태우스의 얼굴이 벌레를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이구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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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 의학부 전문우원 겸
<대통령과 기생충> 저자
마태우스(bbbenji@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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