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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 일망타진 이너뷰-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2004.4.26.월요일
딴지총수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창하며 신경향파라는 말 자체를 창안했던 소설가 박영희가 오히려 친일단체의 간부가 되어 일제에 부역하기 전, 1934년 자신이 지도적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카프를 떠나며 읊은 전설적 전향의 변이다.


만약, 그가 박영희처럼 문장 하나라도 그럴 듯하게 날리고 갔더라면 이 인터뷰는 없었을 게다. 여하간 마침표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25년 가까운 세월을 한 방향으로 전속 질주하다 한 순간에 급회전 했건만 차량 전복은커녕 노면에 스키드마크 한 줄 없다. 이런 스턴트가 있나. 그로부터 십 년 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 기도로 집단폐사 위기에 처한 한나라 양계장의 새로운 장닭자리에 도전했다 거부당한 그, 김문수를 만났다.




인터뷰는 3월 2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늦은 일곱시, 본지에선 총수와 나뭉기자가 한겨레에선 김소희기자가 출동 배석한 가운데 이뤄졌다. 성마르고 신경질적인 것 같으나 웃으며 반기는 실물은 예상보다 훨씬 순했다. 살짝 당황스러울 만큼. (인터뷰는 한 달여 전에 이뤄졌으나 직후가 선거기간이라 총선 이후로 게재가 연기되었다.)





 


일단, 이해하려 들 것이냐, 야유하고 말 것이냐. 그것부터 정해야 했다. 같은 대사도 정반대의 주석을 달 수 있고 어차피 어디에도 참조할 고해는 없으니 그에게 딱지 붙이기란 죽 먹기다. 이유를 몰라도 야유는 가능하며, 당시 정국이라면 그게 안전하다.


하지만 전자를 택하기로 했다.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가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정말 진지하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도대체 왜? 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했다.


총 : 탄핵사태 이후 지지율은 어떤가요?
김 : 내 지지율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당의 떨어지니까 같이 떨어진 거지. 동반폭락이지.


한겨레 : 그래도 거기 김만수씨 지명도가 워낙 낮아서.. 그 사람 몇이죠?
김 : 서른 아홉이니까, 64년인가 5년인가...
한겨레 : 젊구나. 근데 지지율은 어떻게 나오고 있나요?
김 : 당을 넣고 하면, KBS 지난 번 걸루 내가 10% 뒤지는 걸로 나왔지.


총 : 인물 적합도는여?
김 : 그건 내가 세배 이상 돼지. 50 가까이 되고 거가 십 몇 프로..
한겨레 : 그냥 지지율로는요?
김 : 그 쪽이 십 프로 높던데. 사십 얼마 대 삼십 얼마. KBS 지난 번 거..


총 :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일동 폭소)


(몇 분 후)


총 : 죄송합니다. 미리 빼고 왔어야 했는데.
김 : 허허허
총 : 딴지 인터뷰 보셨어요?
김 : 다 봤지. 워낙에 우리 김선생이 글을 잘 써갔고, 아주 독특하게 쓰시잖아. 그래서 안 보려고 쓱 지나가다가도 보게 되더라고. 허허허.


총 : 한겨레 신문기사로 보셨나요?
김 : 한겨레 봤어요 난. 하도 딴지 딴지 해서 들어가 봤는데.. 단병호, 남경필 것 보고.. 제일 먼저 홍준표부터 봤고.. 근데 전부 저에 대해 한마디씩 해놨더라구. 그래 우리 집사람이 여보 여기 당신 전부 평해놨다고. 그래서 보다가 다 보게 된 거지.


총 : 그러니까 미리 예습 한 건 아니라고 말씀 하시는 거죠? 본의 아니게 살짝 본거지. (일동 웃음)
김 : 예습은 못했는데 어쨌든 저에 대해 많이 언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한겨레 : 그러고 보니 노무현 대통령은 빠진 적 있어도 김문수 의원은 한 번도 없는 거 같네요?
김 : 나도 이상해.
총 : 공천심사 위원장이시기도 했고, 정국상 중요한 키맨이셨죠, 갑자기. 이게 딴지일보에는 풀버젼이 실립니다..
김 : 딴지일보로 볼 걸 내 잘못했네.
총 : 시험 공부 많이 해놓고선 애들이 물어보면 자긴 하나도 못 했다고 하는 필로 대답하시네. (일동 웃음)



충분한 아이스 브레이크. 본격 질문.


총 : 의원님이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김 : 소작은 아니고. 우리 집은 경북 영천 시골이야 아주. 전기가 아마 77년 처음 들어왔으니까, 그 전에는 호롱불. 그러니까 아주 시골이야. 그러고 땅이 아주 안 좋아, 깊은 산에 있으니까. 그런데 양반 행세를 하고 있었지.


총 : 부모님의 직업이..?
김 : 해방되고 부면장까지 하다가 그 다음에 해방 직후, 우리 지역에 10.1 폭동이란 것이 있어요. 좌우익 대립이 아주 심했어요, 대구부터 시작해서 경북 경상도 일대에 도경 부시고 그 여파가 경상도 일대에 다 그랬어요. 그 때에 우리 집에서도 좌익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고. 근데 우리 아버지는 사상 이런 건 없었어요. 그냥 아주 옛날부터 유교적인 집안이니까.


우리 큰집이라든지 작은 아버지 이런 사람들이 좌익에 들어가고 우익도 있고 그래가지고 한 집안 내에서 좌우익이 다 있고 그랬어. 그 무렵 우리 아버지는 교육청 행정 공무원을 했습니다. 부면장 그만두고. 교육청 행정 공무원 하셨는데 정년퇴임은 교육청에.. 요즘 말로는 뭐라 그러나. 행정 실장이라고 그러나 과장이라고 그러나?


총 : 아.. 서무과장?
김 : 응, 서무과장.
총 : 학교에서 계셨던 거예요, 교육청에 계셨던 거예요?
김 : 교육청에 계시다가 학교 가시고. 원래 면에 계시다가 교육청에 행정 하다가 그러다가 학교에 서무과장을 했지.


총 : 마지막 학교는 어디?
김 : 시골에 있는, 경산에 있는 학교에 서무과장하시다가 5.16 난 뒤에 그만 두셨고. 5.16 에 새로운 젊은 박정희 대통령 나오니까 우리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셔, 그래서 그 또래들은 다 그만뒀어. 그래 우리 어릴 때는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그만두셨으니까 그때까지는 전근 많이 다녔어. 우리하고는 많이 떨어져 계셨지.


총 : 공무원이셨네요?
김 : 그렇죠. 교육 공무원이셨죠.
총 : 군면장이라는 건?
김 : 그건 행정공무원.
총 : 쭉 그렇게 공무원하시다가 서무과장으로?


김 : 그렇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그걸 하니까 퇴근하면 농사 짓고 그랬지. 그게 겸업이지. 소작은 아니고 자그마한 땅은 있었는데 우리 할아버지 때는 땅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와서 다 잃어 버렸어. 일제에 협력을 안 해갔고.. 뭐라고 그럴까 일제 말의 양반 집안이니까 종3품 정도 됐어요. 근데 일제에 협력을 안 하니까 우리 집안에서 제가 대학 들어간 게 세 번짼가 네 번짼가 대학 들어왔으니까 개화된 교육을 안 받았죠.


총 : 집안?
김 : 문중. 우리 문중은 경주 김씨거든요, 문중에서 대학교육 받은 사람이 거의 없어. 80호가 다 집성촌, 경주 김씨만 살아요 딱 그 마을은. 그 집성촌의 폐쇄적인 문중에서 살다보니까 새로운 문화라는 건, 전부 왜놈 것이라.. 이래 가지고 안 받아들이지. 왜놈 같은 옷은 입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몰락한 양반의 자존심 이런 거 때문에 집안이 가라 앉은 거지. 이활이란 사람이 있어요. 이활, 이호. 유명한 법무부장관도 하고 고대 이사장 하던 이 집안이 우리 집안하고 가까워. 그 집안은 양반이 아니라 종 집안이야. 근데, 그 집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가지고 장관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왔지. 반면에 우리는 완전에 몰락했지.


총 : 그럼 어릴 때 천자문 배우고 그러셨겠네요?
김 : 저는 대학에 다닐 때까지도 사서삼경, 또 서당, 서당도 다녔어요.
총 : 서당도 다니시고?
김 : 85년까지도 서당이 있었어요. 나는 방학 때 서당 다니고 그랬어요. 내가 대학 때 그때도 시골에 서당 다녔어요. 논어 배우고 그랬지.


총 :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도?
김 : 내가 제적 됐으니까. 제적 되고 나서 시골에 있었으니까. 71년에 제적됐는데 그 때 고향에서 농사 지으면서 그 때 저녁에 서당에 가서 논어 배우고 그랬죠.


총 : 대학교 때 처음 고향 떠나 유학..?
김 :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났어요. 영천읍이라는 데가 있었는데 읍내에서 한 30리 떨어져 있어. 아주 시골인데 읍내에 나와서 교육청에 다니셨어 우리 아버지가. 그래서 내가 읍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죠. 영천 초등학교 나왔어요. 중학교 때부터는 경북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대구.


총 : 아버님이 교육공무원이라 교육에 대한 열의나 남다르셨던 건가요?
김 : 우리 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열의는 없으셨어요.
총 : 그럼 그냥 스스로 공부를 잘해서?
김 : 그냥 선생님들이 나를 잘 봐주시데. 우리 집에서 대학은 저밖에 안 나왔습니다. 대학 나온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일곱 남매가 있는데 대학은 저만 갔어요..


총 : 선생님들이 진학해라..?
김 : 선생님들이 공부도 많이 가르쳐 주셔가지고. 우리 아버지는 교육에 관심이 적으시고 주로 문중에 봉건적인 제사 지내는 거라든지 할아버지 문지.. 글 쓰는 거 상소 이런 거.. 문지 편찬하는 거, 그 다음에 비석 세우는 거 여기에 관심 많으셨지 봉제사접빈객이란 말도 있어. 제사 베풀고 손님 맞이하고 이런 거에 관심 있었지 자식들한테 공부하라고 이런 말 하시는 분이 아니야. 가치가 달라요. 그니까 봉건적 가치에 충실했던 분이야.


총 : 어릴 때 집안 분위기 영향을 많이 받으셨겠어요?
김 : 많이 받았어요. 묻지도 못하게 하고 우리는 형제가 많아 가지고..
총 : 형제가 어떻게 되시죠?
김 : 일곱 명 중에 나는 여섯째.


총 : 거의 막내시네요?
김 : 밑에서 두 번째, 동생 하나 있고. 우리 형제들끼리도 모여 가지고 웃고 히히덕 거리고 노는 걸, 그걸 못 하게 했어요. 많이 웃으면 바보라고, 치인다소라고 있어. 어리석을 치 자, 사람 인 자, 많을 다 자, 웃을 소 자. 치인다소라 해서 어리석은 자가 많이 웃는다 해 가지고 절대 못 웃게 했어요. 나는 원래가 웃음이 많은 사람인데 하도 그런 교육을 받아 가지고 웃음이 없어졌지.


총 : 어릴 때는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지 한다든가 정반대의..
김 :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어요.
총 : 싫어해도 닮는데, 존경하셨다면..
김 : 우리 어머니는 내가 별로 안 좋아했고 우리 아버지는 좋아했어.


총 : 특이하시네요. 보통 어릴 땐 어머니를 좋아하는데.. 아버진 엄하셨나요..
김 : 안 엄하셨어요. 완전히 내 버려 둬. 아버지는 봉건적인 교육만 시키지 매 한번 들지 않으셨어요. 화도 내시지 않고. 간섭을 안 하셨지 일체. 다만 말씀을 해 주시지. 우리가 물으면 사전 딱 갖다 놓고 딱딱 펴주시지 절대 설명 안 해주시고 사전 찾아보라 그러지.. 절대로 모 가르쳐 주신 적이 없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안 좋아했던 게.. 어머니가 몸이 약하셨어. 그래서 일찍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안 편찮으시면 좋겠는데.. 편찮으시니까 좀 싫지..


총 : 돌봐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김 : 편챦으시니까 이렇게 좀 신경질도 부리시고 짜증도 내시고 하니까 어린 마음에 싫었던 거지. 아버지는 전혀 반대였지요. 아주 대범하시니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개인적인 희생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개인을 위해 하는 일이 없어요. 무슨 옷을 사 입는다, 뭐 돈을 쓴다 이런 게 없어. 어려운 사람들한테 잘해 주신다거나.. 그래서 보고 있으면 정말로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죠.


한겨레 : 아버지 땜에 속상해서 어머니가 더 병 나신 거 아니에요?
김 : 그렇지. 화가 나지. 월급도 안 주고 우리 어머니는 노고산 죽 먹고 그랬어. 근데 공직에 있으면서도 월급이 적다기 보다는 모든 걸 다 쓰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오시니까. 다 써 버리니까.


총 : 남편으로선 굉장히 나쁜...
김 : 먹을 것도 없고 그 말이 맞아. 애는 일곱이나 되는데 원래는 여덟 명인데 하나는 죽고, 그러니까 애는 일곱 명인데 먹여 살릴 건 없지.. 돈은 없지 바가지 긁어도 나오는 건 없지. 근데 우리 어머니도 양반집 출신이셔 가지고 너무 힘들면 보통 시장에 나가서 콩나물도 팔고 이러는데 일체 안 하셔. 바느질 이런 거나 조금 하셨지 절대 모 그런 장사를 안 하셔. 그니까 내외분이 다 봉건적인 사람이지.



사사로운 이익에 무심했던 아버지의 봉건적 도덕률.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코드 중 하나다.







총 : 중고등학교 시절 계속 공부를 잘 하셨습니까?
김 : 상당한 수준으로 잘했지.
총 : 상당한 수준으로 으허허허. 구체적으로?
김 : 전교 1등이니까... 경북 중학교를 들어간다는 건 시골에서 어려운 거지. 시골에선 잘 못 들어가지. 대학도 과외 같은 거 그 당시에는 일체 없으니까. 공부 때문에 무슨 소리는 안 들어봤어요.


총 : 공부에 취미가 있으셨어요?
김 : 그렇죠 공부에 취미가 있었던 셈이죠 비교적.
총 :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든가..?
김 : 부모님은 내가 공부 잘 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


총 : 공부가 자기한테 맞아서 잘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김 : 전 좀 맞았어요. 그래서 저는 원래 학자나 이런 거 됐으면 했는데 내 고등학교 때 꿈이 국사학자 되는 게 꿈이었어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민족주의 같은 게 강했던 것 같애.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제적이 됐지. 삼선개헌 반대한다고 해가지고.
총 : 고등학교 때 제적을?
김 : 아, 아니 제적이 아니라 무기정학을 받았지. 입시 직전 무기정학을 받았지. 그 때가 9월인가 그랬을 거야.


총 : 삼선개헌 반대?
김 : 삼선개헌 반대해서. 멋도 모르고 한 거죠. 그때 교과서에서 개헌 많이 하면 좋은 게 아니다 해서 그래서 그랬지 딴 거 없었어요. 애들하고 어울려 가지고 그렇게 됐는데.. 국사학자를 해서 민족주의 같은 관점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 이래 생각을 했는데.. 상과대학 경영과에 들어오게 된 게 우리 사촌 형님께서 경영과를 다니시던 분이 있었어 대구 영남대에서. 요즘도 친하지. 나보다 두 살이 많지.


그 양반이 우리 집안에서 대학을 다니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물어보니까 국가를 사랑하려면 경영학을 해야 한다고 해서, 허허허. 그렇게 선택했고. 나는 전공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데모하는 거에만 관심이 많았지. 허허허.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죠..



국가를 사랑하려면 경영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과 선택의 이유가 그랬단다.


총 : 공부가 취향에 맞으셨는데 왜 데모를 하게 됐나요?
김 : 나는 가치지향적인 공부를 좋아했어요. 그 때는 민족주의적 가치를 상당히 지향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봉건적인 가치, 자기 문중이란 말이지 문중, 일가친척 그런 거에 중시하는 가치를 가졌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나는 거기서 한 단계 나아가 민족에 대한 가치가 굉장히 강했어요.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근데 그런 성향이 많았어요. 애국적인 시 같은 걸 어릴 적부터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헌책방에 가서 사상 이런 책들을 많이 사다 봤어.


그래서 내 친구를 헌책방가서 사상계 사보는 게 그라고 둘이 토론하는데.. 모 별 볼 일 없는 토론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토론이었는데.. 그 때는 심각해서 사람은 걸을 때 하늘을 보고 걸어야 한다는 둥 황당한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는 그런 식이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방향도 없고 막연히 이상주의적 민족주의 성향이 많았던 거 같애.


그 대신 수학이나 과학 이런 건 별 취미가 없었어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성적도 안 좋았어. 근데 국어나 사회 같은 과목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던 거 같애. 근데 대학 들어오니까 이념 서클.. 심재권씨 저 사람이 후진국사회연구회를 만들었다고 그 때. 심재권 의원이. 대학교 1학년 때 와가지고 그냥 레크레이숀 한다고 우리한테 와서 연설을 하는데 눈에서 불똥이 부부북 튀고 저 하늘에 별이 안 보이냐고 선동을 하는데 제가 훼까닥 했지요.


총 : 흐흐흐.
김 : 저거 괜찮다 해가지고 바로 가입해서 나갔죠. 그 전에 딴 모임에 가입해 있었는데 그거는 좀 재미없는 서클이었어. 근데 그거 치우고 야 여기 들어와 이래가지고 내가 좋다고 따라갔지. 그래서 멋도 모르고 데모하는데 따라다니고 그 땐 전부 반일데모야. 그 때 일본 수상이 오면 데모하러 가자고 그러고 그 때가 70년댄데 내내 반일 강연부터 해가지고 김지하의 오적 이런 거까지 다했지. 그리고 광주 대단지 폭동사태 나면 그런 거 하고 전태일 죽으면 그런데 참여하고. 공부는 하나도 안 했죠.


총 : 데모 자체 보다는 데모를 뒷받침하는 이념에 대해서 토론하고 하는 게 성향에 맞으셨군요?


김 : 제대로 딱 맞은 거죠. 내가 대학에 처음 들어가서 시험을 한 번 쳤어요. 첫 시험을 봤는데 이게 고등학교 시험보다도 더 시시하더라구. 영어도 조잡한 단어 몇 개 써놓고. 모든 시험이 다 그래. 난 이거 배우러 안 들어왔는데.. 대학 1학년 때 교양과정 이거 너무 한심했어. 뭐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시험 치는데 그 수준도 낮지.. 모 이거는 대학도 아니라고 봤죠.


근데 서클에 들어가서 대학이 모냐, 사회가 모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런 거창한 거.. 그걸 논하다가 한국사회의 과제가 어떻냐느니 권력사회의 부패 이러니까 솔깃해지는 거지. 완전히 몸에 맞는 거지. 거기 쏙 빠져 버린 거에요. 강의시간에는 잘 듣지도 않아 별 가치도 없고. 이상적인 그런 게 없으니까.


근데 서클에 가면 선배들이 주는 게, 들어라 양키들아.. 반미 반일 거기다가 노동자나 소외층에 대한 애정이 중요하다는 둥 서울대학교 졸업장이 모가 중요하냐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진짜 중요한 사람이지. 자기 출세, 입시 공부, 사법 시험, 성적 올리기 이런 거는 아니지. 그냥 쫌팽이들이나 하는 거고 소인배들이나 하는 거지 제대로 된 사람들은 진짜 국가과 민족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위해서 자기를 무한히 희생하고 전태열처럼 죽고 이런 게 훌륭한 거지...


이렇게 말하는 데 나는 딱 몸에 맞더라고.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는 가정이 모가 필요하냐는 거지. 새끼가 굶어 죽건 말건 월급 받으면 문지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 다 주고 이래 버리니까. 어머니는 싫어하셨지만 나는 좋다 싶어 가지고 아르바이트 하면 그 돈 다 써 버리고.. 하여튼 그런 식이 됐어요 사는 것이.


총 : 아버님의 문중이 의원님에서 국가와 민족으로 확장됐군요?
김 : 그게 이론으로, 공부를 자꾸 이런 쪽으로 시켜주니까 서클에서. 딱 맞드라니까. 양반.. 이런 게 남아있기 때문에 봉건적 가치라든지 이런 것도 남아있었죠.


총 : 그러시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에서 제적 당하셨죠?
김 : 처음엔 그게 아니고 71년에 제적 당했는데, 저는 라이프 스토리가 워낙 많아요, 복잡하니까 그렇게 들어가지고는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총 : 그럼 71년 죄목은 모죠?
김 : 71년 때는 부정부패 반대와 교련 반대 데모를 했는데 대학에 군이 들어와서 징계 해 버려 가지고 확 잘라 버렸어요. 190명 자를 때. 그 때 1차 제적됐고 복학 됐다가 그 다음에 2차 제적이 들어오니까 민청학련은 관여 안 하려 했는데..


제적 당한 놈끼리 모이니까 유인태, 김근태 이런 사람들이 수작을 해가지고 전부 끌어들이니까 거기에도 관여했다가 나중에 손을 뗐어요. 그 전에는 난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청계천에 죽 관여를 했다고. 청계노조도 하고 노조에서 소위 한자도 가르쳐 주고 노동법도 가르쳐 주고 이렇게..



총 : 피복노조?
김 : 청계 피복노조 간부로 배후에서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했어요. 그랬는데 복학이 딱 되니까 또 민청학련에 관련이 되니까 저녁에 한 번은 노조쪽 사람을 만나다가 또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도 왔다 가고 복잡하게 삼중생활 이런 걸 하고 있었지. 그런데 민청학련이 빡! 터지면서 수배돼 가지고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피신해 있다가 나중에.. 근데 민청학련은 빨리 끝나 버렸어요.


총 : 연애는 언제 하셨습니까?
김 : 그 때 연애는 제대로 하지도 않았지. 그런 건 별로 하는 거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총 : 전혀 안 하셨어요?
김 : 그냥 미팅 같은 거 그런 건 했지만..
총 : 미팅 나가서 인기 있으셨나요?


김 : 없지 모. 내가 잘 생겼나, 돈이 있나. 그리고 우리 경상도 사람들은 매너가 형편없잖아. 여자들 보면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거야. 여자들한테 완전히 인기 하나도 없지. 우린 그 때 대학 다녀도 까만 고무신 신고 우린 서울 사람들 보면 멀리 생각했으니까 말도 간질간질하고 그래서 귀가 간질간질해서 못 듣겠더라고.


총 : 하하하..
김 : 그러니까 서울 사람들의 매너나 그런 것들을 혐오를 했어요, 오랫동안.
총 : 너무 간지럽고 남자답지 못하다?
김 : 응. 모라고 그럴까 체질적으로 잘 안 맞더라고. 우리들은 마 촌놈들이 볼 때는 그 억양부터 시작해서 경상도 말로 하면 가시나 같이.. 아유.. 마 체질에 안 맞는 거지. 그니까 여자는 무시해야 되는 걸로 그리 생각하고 여자들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해야 되는 거고 모 이런 거 있잖아요. 우린 그런 식이었지 허허허. 그러다가 내가 운동을 하면서 고쳤어요. 공부하다 보니까 이론적으로 볼 때 이게 아니야 여자도 굉장히 중요한 거야.


총 : 이론적으로 볼 때.. 움화하하하.
김 : 그러고 내가 딸을 낳고 보니까, 난 지금 딸 하나 밖에 없어. 그 때문에 우리 집사람하고 충돌도 많았지. 우리 집사람도 노조 하는데 깔보면 안 좋아했지.


총 : 어떻게 만나셨어요.
김 : 우리 집사람은 78년에 노조위원장을 했으니까 그 때 금속고철 영등포지부에 우리 집사람이 부녀부장 나는 청년부장이었어. 나는 도루코위원장이고 집사람은 세진전자라는, 컴퓨터 자판보면 세진이라고 있어요, 그 공장의 노조위원장이었어요. 모 자주 만나고 이랬는데 우리 집사람도 내가 끌리고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기도 나한테 끌리고 이런 것도 없어. 근데 죽 하면서 보니까..


총 : 그럼 프로포즈는 누가 하셨는데요?
김 : 제가 했죠.
총 : 모라고 하셨어요?
김 : 그냥 우리 좀 잘 지내보자. 결혼하자 이랬는데 아주 싫어하더라고.(폭소)
총 : 처음에는?
김 : 별로 관심 없다고.


총 : 그럼 어떻게 결혼 하셨어요?
김 : 80년도에 5.17이 일어났어요. 그 때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농성도 맨날 같이 했어. 그니까 80년대 초에 서울의 봄에 노조에서 어용노총 물러가라, 어용노조 지도부 물러가라 농성을 영등포 노조사무실에서 인자 한 20명 모여서 열흘씩 계속 농성을 하고 했는데.. 그래하다가 5.17이 일어나가지고 삼청교육 보내는데 내가 대상이 됐어요. 삼청교육 대상이 돼 가지고 우리 간부들 다 잡혀갔어요. 그 때 노동부 간부가 귀뜸을 해 줬어요. 삼청교육대 잡혀가니까 고향에 빨리 가라, 그래서 딱 피했다고. 피했는데 우리 밑에 간부들 싹 다 잡혀가고 용산에 빵카에다가 집어 넣고 조져가지고...


어쨌든 그래서 피하는데 어디로 피하냐 하면 그 때 우리 집사람이 자기 동생들한테 얘기해서 자취하는 그 방에 숨어 있었다고.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거지. 그래서 결혼하게 됐지. 계엄 풀리고 인자 우리 집사람은 회사 그대로 계속 다니고 그 사람은 잘리지 않고 나는 잘렸고 우리 집사람은 노조위원장만 잘리고 회사는 계속 다니는 그런 조건으로 해 줬어요. 그대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러고 나는 서울대 앞에 81년에 계엄 풀리고 나서 우리 공장에 해고된 노조간부들하고 조그만 책방을 내 가지고 그러면서 인자 왔다갔다하다가 그 해 말에 결혼했지.


총 : 결혼할 때 모라고 하셨어요?
김 : 모 프로포즈보다는 서로 충분히 잘 알고 그러니까 결혼이 쉽게 된 거지. 처음에는 별로 모르다가 어려울 때 한 번 같이 살다 이러다 보니까 결혼이 된 거지 모.
총 : 결정적인 단어는 없었구요?
김 : 결혼 하자고 이래 되가지고 모.
총 : 혹시 자취방에서 덤비셨나요? (폭소)
김 : 그런 거까지 포함해서.
총 : 아니 그럼 자취방에서 게임이 끝났군요?
김 : 그거는 모 게임이 끝났다고 해야 되나? 하여튼 그냥 피신해 있는 동안에 서로 불가피하게 그렇게 결혼할 상태까지 가게 된 거예요.
총 : 불가피하게 결혼할 상태까지(폭소). 얼마나 피신해 계셨어요?


김 : 어.. 그 때가 한 4~5개월 넘은 거 같은데.
총 : 4개월 정도 피해있다가 불가피하게 결혼까지?(웃음)
김 :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제 결혼하는데 나도 형식 이런 걸 싫어하고 우리 집사람도 싫어해요. 그래서 서울대 앞에 있는 작은 봉천동 교회에서 했어요. 근데 장로가 누구냐 하면 우리 노조 지부장 한달수씨라고 대한전선, 지금은 대우전자가 됐잖아. 그 대한전선 노조위원장이 그 때 인자 우리 노조가 함께 잡혀갔을 때 짤리고 그랬는데 그 양반이 장로로 있는 교회에서 결혼을 하는데.. 나는 청첩장도 없고 아무것도 안 만들었다고.. 일체 그런 건 안 만들고.. 그런 거 알리고 예복 입고 이런 거 나 엄청 싫어했었어요.


그래서 교회 강당 같은 거 빌려가지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이 새끼 하는 짓이 완전히 위장결혼이다, 데모 하려구 위장 결혼하는 거다.. 이래가지고 경찰차가 와가지고 그 앞에, 봉천동 사거리 서울대 전철역 그 앞에 몇 대가 와 있고.. 노조간부 노조위원장 하다가 짤린 사림이 주례지 또 거기다 짤린 동양강철 노조위원장 최홍배씨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사회 보지, 전부 그런 무리들이 와서 하니까 분명히 데모하고 반정부 집회 하는 줄 알았던 거지. 경찰이 둘러싸고 이랬지.. 우리 집사람이 드레스 입지도 않았어. 그냥 정장 입고 결혼했지.. .


총 : 꾸미는 걸 싫어하셨군요?
김 : 우리는 싫어했어요. 지금도 모 우리 집에 와보면 너무 삭막하다고 할까.. 그런 편이지요. 우리 집사람은 그래도 나보다는 그런 거 조금 생각하는 집안인데 우리는 아주 그냥 시골의 삭막한 집안에서 커 가지고 그런 거 별로 안 챙겨.


총 : 티 내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김 : 먹고 살기가 어렵게 살아서 그런 거 같아요. 어렸을 때 죽 한 그릇을 제대로 못 먹고 살았어요.
총 : 돈 문제인가요?
김 : 돈도 없고 또 그런 걸 사치스럽게 생각하고 그럴 여력이 있으면 이념적인 그런 게 가미돼서 인지 딴 사람을 도와줘야겠다.. 내가 좀 잘 먹고 잘 사는 건 많이 찝찝하다.. 도덕적이지 않다.. 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자기절제를 통해서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죠. 우리 아버지도 사치하고 모 그런 거 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우리 그렇게 살았습니다. 또 옛날 사람들 대체로 그렇잖아요, 우리만 그런 거 아니고. 그 때 시골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더라고.


옛날에 그 우리 어른들 보면은 아주 부자라도, 정주영씨도 그랬다 그러더만, 난닝구도 빵꾸 난 거 입고 다니고. 그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몸에 밴 거 있잖아요, 그런 게 있었어요. 정치 시작하면서 그래도 이젠 옷도 몇 벌 있지만, 정치권에 들어오기까지 그런 면에선 난 참 한심한 생활이었지.



그의 이념은 봉건적 도덕률의 확장이었고 그의 민족주의는 몰락한 양반의 가풍이었으며 그의 국가는 롤모델인 아버지의 문중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그 시절의 그를 읽는 문법 기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과거 운동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왜에 초점을 맞춰. 


총 : 운동도 여러 가지인데 왜 노조운동을 하셨어요?
김 : 좌파적인 영향이 컸어요. 당시에는 노조 운동이라고 하면 좌익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서경석 목사, 서경석 목사 쪽이 도시산업선교예요. 통해가지고 외국에 오글 목사라고 있어요. 그런 외국의 산업 선교하는 목사들이 와 가지고 국내 조화순 목사, 조지송 목사 이런 기독교 감리교 목사들이 인천에 공장 같은데 취업을 해가지고 노동사무국을 했다고.


이런 거에 영향을 일부 받고 한편으로는 좌파적인 사상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노동 조합쪽으로 갔는데 김근태 선배가 우리를 상당히 가르쳤습니다. 심재권 선배가 감옥에 가고 잠적하고 난 다음에 제가 가장 영향을 받은 게 김근태 선배지. 김근태 선배가 심재권 선배보다 대학 4년 선배거든요, 나이는 비슷하지만. 그래서 김근태 선배가 우리 구로동 공장에 취직하는 걸 전부 안내를 해가지고 됐죠.


총 : 교회와 이념의 복합 영향?
김 : 교회의 영향보다는 사상적 이념적 서클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 돼요. 그 다음에 학습효과와 그리고 나는 모 우리 집안이 농사를 짓거나 주변을 보면 공장에 다니는 사람도 많고 그러니까 공장이라는 거 자체가 생소한 문화가 아니었죠.


총 : 강성이었다고 해야 하나요?
김 : 그러니까 인제 제가 70년 말, 71년부터 전태일 노조에 관여를 했으니까, 70년대 십 년 동안은 그리 강성이 아니었어요.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는 노동삼권 중에 노조 결성권, 그걸 단결권이라고 그랬는데 고거 하나만 허용해주고 단체행동하고 교섭은 못하게 했었어요. 그러나 노조자체는 인정을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노조위원장을 했잖아요.


근데 전두환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있는 노조를 다 깨부수는 거야. 우린 그 때 다 부숴졌어요. 우리 한일도루코나 우리 집사람 세진이나 동일방직이나 그게 다 깨져 버렸어요. 또 광주학살 이런 거 보고 우리가 피가 끓어갔고 정말 죽을라고 그랬어요. 세상에 이럴 수가 없는 거야. 박정희 대통령 때는 그래도 학살은 없었어요. 중정에 가서 최정일 교수가 떨어져 죽고 한 건 있었지만, 집단 학살까진 없었어요.


근데 이거는 광주에서 집단학살이 있고 그런 장면을 보면 피가 끓어가지고 급속하게 과격화된 거야. 쫓겨나니까 공장에 들어갈 수도 없어, 그러니까 나는 책도 내려놓고, 쫓겨난 해고자 노동조합, 해고된 노동자들의 노동조직을 시작한 거지. 여기 좌파적 이념과 결부된 거야. 반독재, 반파쇼 이런 거 하다가 내가 잡혀가 버렸어. 거기 가서 심하게 고문 당하고 거의 한 달 동안 안경을 못 쓸 정도로 얼굴이 돌아가 버렸어요. 부어서 안경이 초점이 안 맞아가지고.


총 : 그 사건이 뭐였죠?
김 : 인천 5.3 직선제 개헌할 때. 그때 인천지역 서부지역에 있는 우리 조직들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나 해고된 사람이나 전부 모였어요. 총궐기 하자는 거지. 거기 갔다가 잡혔는데 보안사에 가서 일주일 고문 당하고 대공분실 가서 일주일이상 있고 그러다가 감옥에 가서 2년 6개월 있다 나왔죠. 근데 그 당시에 서노련이라고 서울노동운동회라고 있었어요. 그때 내가 고문 당했던 게 대한변의 인권보고서의 대표적인 고문사례로 많이 나와있어요. 뭐.. 그때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한 거니까.


총 : 왜 그렇게 죽을 각오까지 했을까요?
김 : 우리한테 제일 영향을 끼쳤던 거는 5.17이야 광주항쟁. 직접 죽음을 봐 버렸으니까. 장난이 아니니까. 박정희 때까진 그런 격렬한 생각을 못 가졌었어요. 근데 광주에서 그 때 그렇게 많이 죽는 거 보면서 굉장히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나는 모 술만 마시면 어떻게 해서든 뒤집어 엎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고 우린 죽을 각오를 하고 해야 한다, 이런 학살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난 국민들이 봉기해가지고 전두환 체제가 금방 무너져 버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만 그렇지 무너지지 않더라구. 나만 실컷 터지고. 근데 내가 감옥에 86년 5월 6일에 갔으니까 87년을 감옥에서 보냈지. 87년의 엄청난 6.10항쟁이나 이런 것들을 감옥에서 간접적으로 들었지. 감옥에서 신문도 못 보고 그랬으니까. 그래 엄청난 역사의 전환이 왔는데 참 아깝게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역사의 큰 전환기에 감옥에 갇혀있다가 88올림픽 끝나고..



" 말만 그렇지 무너지지 않더라구. 나만 실컷 터지고.. "
핵심 문장이다.


총 : 국보법 위반이라면?
김 : 서노련이라는 노동단체 자체가 이적단체였으니까.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형법상의 내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수괴지. 그런데 참 그렇게 큰 민중항쟁이 늦게나마 일어났는데 나는 5.17 이후 81년 봄부터 감옥에 들어오니까 허허허, 데모도 잘 안 되더라구. 실제 변화는 내 생각보다는 한 6년이나 늦게 일어난 거지.



" 6년이나 늦게 일어난거지.. "
또 하나의 대목.


총 : 그리고 나오신 다음엔 민중당이죠?
김 : 그래갔고 내가 모 했냐면 보니까 세월이 많이 바뀌었는데.. 88년에 나왔으니까 소련도 붕괴됐으니까.. 동독도 붕괴되고. 소련도 페레스트로이카 이래가지고 사상적인 큰 전환이 왔어. 그래 가지고 공부도 좀 하고 그동안 있었던 바깥이야기도 듣고 그러면서 보니까 이제 사회주의 혁명 이런 거 안 된다.. 그러니까 뭔가 점진적인 거.. 체제 내의 개혁.. 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해서 민중당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이욱재, 이재오, 장기표.. 장기표도 우리하고 같이 갔었지. 그래서 감옥에서 풀려 나갔고 김근태 선배는 아직 정당 만들 때가 아니고 DJ를 비판하면서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였고 우리는 DJ는 아니다, 뭔가 민중적인 기치를 가져야 한다 이래가지고 민중당을 만들고 해보고 나니까 모 92년 선거에서 쫄딱 망해 버린 거지. 의석 1석도 못 얻고 득표도 못하고 해산령이 내려졌지 정당법 상.


해산이 되고 나니까 난 할 일이 없어 가지고 권인숙씨하고 조영숙씨하고 노동인권회라고, 권인숙씨가 소장인데 권인숙씨가 유학 가서 내가 소장을 맡아서 그걸 하는 동안에, 그걸 한 2년 했지. 그걸 하다가 YS가 대통령이 돼 가지고 그 때 초기 개혁을 많이 했어.. 그 때 지부장을 맡아보라고 제안이 왔어요..


총 : 그 때 민중당 출신들이, 당시 민자당이죠, 그 쪽으로 대부분 합류를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김 : 인간관계가 DJ하고 이렇게 양쪽이었는데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었죠.. 갈 수 있었는데 YS쪽에 인간관계가 좀 더 있었던 거 같아요.


총 : 민가협 시절부터 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김 : 네. 그런 인간관계라든가.. 나는 그런 건 없었는데 나는 DR이나 김정남씨가 우리 선배더라고 그래서 잘 알어.. 그런 인간관계를 가지고 저한테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어차피 두 세력간에는 큰 차별성이 없다.. 이래 본거죠.


총 : 상대적으로 선명성을 가졌던 야당도 있고, 제도권 정당으로 유일한 옵션은 아니었는데 근데 왜 하필 민자당이었을까요?
김 : 제안이 먼저 와서. YS는 그랬던 거 같아.. 3당 합당 이후에 민주화 인사를 찾고 있던 단계였어. 그런데, DJ는 비교적 그런 자원이 풍부했고. 그러니까 YS쪽에서 우리한테 제안이 왔어요. 그 때 우리는 상당히 절망, 좌절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안이 와서, 아는 사람도 있고 YS가 또 비교적 잘하는 거 같고.. 초기 개혁은 성공적으로 보였죠. 그래서 합류하게 됐어요.



"제안이 먼저 와서.."





총 : 그럼 만약에 YS가 아니고 민주당 쪽에서 먼저 제안이 왔었다면...?
김 : 민주당 쪽에서 먼저 했으면 아마 민주당 쪽으로 갔었을 수도 있죠.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우리가 한 자리 달라고 한 건 아니에요. 정치는 잘 몰랐어요. 그때는 현실정치는 난 관심도 없었고 별로 알지도 못했어요. 나는 부천이 좋은 덴지 나쁜 덴지 그것도 몰랐어요. 그냥 해보라니까 했고.


다만, 그 때 부천 오정구에 가라고 해서 거기 국회의원은 누구요, 물어보니까 원해효, 내 원해효는 잘 아는 사람인데 옛날에 민중당 때 잠깐 같이 했거든. 아는데 같이 붙어서 싸울 거 있나, 나 안 한다구, 그래서 소사구로 조정해준 거예요. 정치를 그만큼 모른 거지. 나중에 사람들이 야.. 부천 소사구 거기가 민자당 당선안 되는 데다 그러는데.. 나는 모 열심히 하면 되겠지 생각했고.. 그런 정치적인 성향을 모른 거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총 : 현실정치에서 내가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겠다 한 건 아니고..?
김 : 없어. 그저 내가 국가적인 민주개혁에 기여를 좀 하면 안되겠나.. 그 정도 생각을 한 거죠.


총 : 그러니까 초기에는 YS가 잘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제도권 진입에도 실패하고 좌절도 했었고, 근데 제안이 먼저 와서 이쪽 저쪽 크게 차이도 없으니 제안이 들어오는 곳으로 가서 현실정치를 한 번 해볼까, 가볍게 생각하신 거네요?


김 : 그렇습니다. 내가 그 때 했던 거 하나는, 이건 별로 이야기 안 했는데, 완전히 사업쪽으로 길을 돌리자고 내가 아는 사람이 그... NC라고 수치제어공장 기계가 있어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설계하는 그런 거죠. 그걸 내가 좀 배워서 사업 쪽으로 돌려서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하나의 길 아니냐.. 그것도 몇 달 연습 해 봤고. 


그것도 해 보니까 야, 머리는 안 돌아가고 잘 안 되고. 그 다음 한 번은 또 마침 이후재 선생님 사모님이 스웨덴 한신대 복지사회학과 교순데 스웨덴 같은 데를 한 번 가보라고 해서 스웨덴 유학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이야기가 되서 가기로 했었습니다.


총 : 경제학도로?
김 : 아니 사회변혁이지 모. 나는 그런 경제학도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까 제3의, 사민주의적인 개혁 중에서 가장 우리가 이상적으로 높이 치는 게 스웨덴이었어요. 남녀도 평등하고 복지와 성장도 있고 그래서 스웨덴에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때 무슨 박사더라 의사 중에 한 분이 우리나라 유학생을 초청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초청 케이스로 내가 가기로 이렇게 돼 있었어요.


그 때 제안이 왔어요. 그래서 취소하고 민자당에 들어갔죠. 나는 굉장히 많은 길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뭔가 길을 완전히 바꿔서 운동을 떠나서 기업을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고 운동을 하더라도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 사민주의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민자당에 제안이 와서 민자당을 가게 됐지.


총 : 민자당의 제안이 왜 가장 매력적이었죠?
김 : 매력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이었죠. 그거는 인제 복잡한 과정이 필요 없이 현실적으로 바로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근데 예를 들면 기술을 배워봐도 나이 20이면 모를까 40이 돼 갖고 잘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쉽지도 않은 거고. 또 사민주의도 설이 분분했어. 사민주의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밖에 안 된다.. 등등 설이 많았어요.


그래도 나는 사민주의라도 모색을 해보자 했는데.. 근데 일부에서는 사민주의가 우리 시대에 안 맞다, 유럽 같은 굉장한 배경이 있어야 되지 쉽게 되냐. 그래서 내가 책을 많이 읽어봤어요. 스웨덴어도 배우고 사민주의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근데 봐도 자유민주주의랑 별 차이 있나.. 그런 생각을 결국 하게 되면서 민자당에 참여했지.



"매력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이었죠.."


총 : 당시 서노련의 슬로건을 보면, 정치적 노동운동, 변혁지향적 노동운동.. 이었고, 민자당 갈 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 표현도 했고 해서, 당시 입당하는 걸 보고 한쪽에서는 변절이라 했지만 또 과거 전력를 보자면 의도는 노동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제도 정치를 이용하려 했던 거 아닌가.. 하는 관측도 있었는데.. 사실은 양쪽 다 틀린 거네요?


김 : 그러니까 이렇게 봐야죠. 노동운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사회변혁운동 이렇게 봐야 되겠죠. 그러니까 단순한 민주화 운동하고는 달랐어요, 우리 같은 경우에는. 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꿈 꿨어요. 그러니까 이상적 혁명 이런 것들을 꿈을 꿨어요. 근데 좌절을 많이 했다고. 잘 안 되더라구. 또 세계적으로는 소련 같은 데도 붕괴되고 사회주의 쪽은 모 연속적으로 무너지고 이러니까 야.. 역사적인 실험을 7~80년이나 했는데 안 되는구나.. 또 스웨덴 같은 데하고 우리는 다르고.


그러니까 천상 미국, 일본이나 이런 나라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의 길을 걷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이래 생각을 했는데 그 생각이 큰 변화죠. 이런 상황에서 민자당으로 들어가느냐 3김씨 중에 어느 김씨냐.. 큰 차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YS의 개혁이 비교적 박수를 받고 있었어요. 초기에는 시원하다 이런 평가를 받고 있었어요.


총 : 지금 그 때를 회고해보자면 사실은 변혁운동의 연장이라든가 아니면 계급투쟁의 도구라든가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사실은 진로를 선택하신 거네요?


김 : 그렇죠. 나한테는 큰 전환의 기회였어요. 모든 것이 다 실패하고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의 기회가 온 거죠. 그게 바람직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좌절 속에서 절망 속에서 하나의 기회를 입당하는 것으로 잡은 거죠. 그 때 우리들의 좌절은 엄청나게 컸었어요. 나 혼자의 좌절이 아니라 민중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 참담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완전히 꽉 망해 버렸으니까. 그걸 복원, 재건 해야 되는데..  복원이고 재건이고 마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 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 이걸 재건해가지고 다시 무슨 당이 될 수 있다거나 그러면 모르겠는데 도대체 전망도 없고 체력도 없고..



" 완전히 꽉 망해 버렸으니까.."


총 : 민중당 실패가 결정타..?
김 : 그 전에는 제도자체를 부정했었으니까. 그런데 제도정치에 들어와 쫄딱 망해 버렸으니까. 충격이 컸고. 제가 감옥 갔다 나온 다음에 전노협 고문을 죽 했었잖아요. 단병호 의장 이런 사람이 있을 때 내가 전노협 고문을 했는데 전노협에서는 우리가 필요 없었어요. 왜? 이미 새로운 세대가 많이 올라오니까. 거기에 얹혀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운 거 였어요. 또 노조 하는 거 보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우린 빨리 길을 비껴줘서 후진들한테 맡기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어요...



" 거기에 얹혀 있다는 것이.."







총 : 민중당 실패가 왜 유난히 충격적이었을까요?
김 : 실험을 충분히 해봤으니까. 우리한테 기회를 다 줬다고. 딴 때는 숨어서, 잡혀가서 못 했다고. 좀 하다 보면 잡혀가고, 잡혀가고 이러는데 그때는 우리가 연설도 하고 책도 내고 포스터도 붙이고 마음 놓고 모여 가지고 이랬는데 아무도 지지를 안 준거예요.


이전에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우리가 좀 더 할 수 있었는데.. 이래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 변명을 못 하겠더라고. 실험을 다 해봐도 안되니까. 숨어서 하는 운동이나 비합법적인 운동과 다르게 합법적으로 했는데.. 예전엔 합법화만 되면은 되겠다 싶었는데 합법화된 최초의 거대한 실험이 탁 실패하고 나니까.. 아이고 이건 안 되는 거구나..


총 : 거기서 딱 꺽어졌군요.
김 : 민노당 사람들은 그러겠지. 단병호 위원장 같은 분들이라면, 너희는 기초가 없어서 그래. 우리처럼 대중적인 기초를 닦았으면 괜챦았을 것을. 그렇게 비판하겠지.


총 :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 : 일정하게 맞죠. 민노당은 확고하게 대중적 기반을 닦고 있잖아. 그걸 통해서 이번에 몇 석이고 진출하지 않겠어. 민노당이 한국의 국회의 들어온다는 건 굉장한 의미가 있어요. 그야말로 이념적으로 다르고, 조직기반이 다른 전혀 기성정당과는 체질적으로 다른, 꿈도 다르고 체질도 다르고 양태도 다른 정치세력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다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그의 변절은 사실은 전향이라기 보단 25년간 부여잡았던 이념의 공백을 대신한 진로에 가까웠고, 선택이라기 보단 공항상태의 진공을 비집고 펼쳐진 상황에 가까웠다.





 


여기서부턴 그 진로의 변경 이후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총 : 그 변신, 좌절 후의 전향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걸 두고 사람들은 변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상처가 많이 되셨죠?


김 :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꾼 거죠. 바꿨기 때문에.. 근데 생각이란 게 그렇게 한꺼번에 안 바뀌지.. 사상적인 전환은 연옥의 고통을 수반한다고 이야기를 하죠. 연옥의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사상적인 전환이 안 되는 거죠. 나는 그 고통을 겪었어요. 그걸 좌파 측에서 변절이다 그렇게 말하면... 전 수긍을 합니다.


총 : 사람들이 과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아직도 변절이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대꾸를 하신다면?
김 : 계속 그렇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우리 사회는 또 그 분들이 반응해야 될 문제와 사회적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또 저처럼 지금 이런 데서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근데 그 쪽에서 나를 비난하는 걸 나는 잘못 됐다고 보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렇게 계속 살 생각은 없고.. 서로 생각이 다른 거죠.


총 : 그럼 개인적으로 변절이란 단어를 바꾸신다면?
김 : 모, 변절이라고 표현해도 되고..
총 : 스스로는 뭐라 생각하시나요 그럼?
김 : 스스로는.. 사상적인 대전환...


총 : 그럼 이제 사상적으로..
김 : 나는 이제 좌파라고 할 수가 없겠죠. 좌파적 경향을 오래 가졌던, 그리고 상당히 중심부에 있었던.. 내가 좌파적 사고를 한 것은 대학 1학년 때부터 94년까지 하면 한 이십 사오 년, 이십 사오 년을 좌파적인 운동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니까 절대 간단치 않죠.. 그러니까 지금 이쪽에 와서도 이 정도까지 버틸 수 있는 것도 그나마 그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렇게 버틴다고 봐요. 안 그랬으면 벌써 도망갔지..


총 : 음.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뭐죠?
김 : 세계 사회주의권의 몰락, 붕괴. 그것은 즉 사회주의적인 생각은 실은 역사적실험이 끝났다, 이렇게 봤어요. 사회주의라는 것은 인류 이상의 높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평등의 가치. 그건 포기될 수 없는 가치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그 평등을 이룩하기까지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발전단계에서 지금 좌파들이 하는 방식으로 평등이라는 게 잘 이루어지겠느냐,


아니면 지금 자유민주주의 이런 걸 통해 가지고 생산성 자체의 발전을 도모해 가지고 기술정신을 통해 가지고 소득을 2만불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인간의 평등을 위해서 더 좋은 거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길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등 평등 한다고 해서 하향평준화가 되는 식이 아니라 일정한 불평등을 인정하지만 사회의 소득수준을 상승시키고 생산력 자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고 있어요.


총 : 그럼 전형적인 우파네요?
김 : 그렇습니까? 어허허허허...



막상 전형적 우파라고 딱 잘라 평하자, 그렇냐고 되물으며 웃는 이 공허하고 어색한 웃음.


총 : 사람들은 납득, 이해되기를 바라는 거든요. 이해가 안 가니까 변절이라고도 하는데. 그 전환의 순간이 잘 이해가 안가는 건데..


김 : 아, 그렇죠. 근데 이해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왜냐하면 좌우간의 대결은 늘 심하니까, 이해하지만 변절이다 비판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근데 제가 해보니까 이게 있더라고. 아직도 저랑 친한 사람들 중에 손호철 교수라든지 김세균 교수, 정백현 교수 다 가깝지. 다 잘 알고 옛날에 도움도 많이 받고 그랬어요. 그 분들은 안 바꾸면서도.. 그 이론을 유지하면서도.. 상당한 기회를 볼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그런 이론들은 우리 사회에서 일정한 부분 필요하다고 봐요. 좌파는 좌파대로 대변할 수 있는 가치가 있고 그 세력이 있고 그 지향이 있고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게 너무 커져 가지고 사회를 주도해 버린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일정 정도 견제력으로 필요하다..


근데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은, 국가를 움직이는 힘은 우파가 움직이면 좋다..고 생각을 해요. 그 이유는 지금 대한민국은 만 달러에서 이 만 달러도 성장하는 것이 국가적인 최대 현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모냐, 성장중심의 경제정책을 취하지 않고서는 2만 달러 선진국 진입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지나친 불평등과 소외가 일어나지 않도록 좌파적인 이념이 잘 조화될 필요가 있는데.. 처음부터 평등 때문에 성장 자체를 억지해 버리면 그건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보면 성정이 없다..


총 : 사람들이 저 사람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변절했다..
김 : 근데 나는 지금도 개인적 영달은 없어.
총 :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김 : 아니 내가 잠을 제대로 잡니까, 밥을 제대로 먹습니까, 제가 재산 모으기를 합니까, 돈을 법니까..?


총 : 노조운동으로 사는 거 보다는 낫다 볼 수도 있는데..
김 : 더 힘들지. 나는 노동운동 할 때 이보다 나았어. 정말로.
총 :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명예 측면에서?


김 : 나는 노동운동 할 때 명예가 이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지금 전 국회의원 도둑놈 아니에요, 죽일 놈. 전 괴로워요.
총 :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 적도 없고 그걸 달성한 적도 없고?
김 : 나도 개인의 영달을 누리라면 누릴 수 있어요. 나도 골프 치고 외국이나 다니고..


총 : 그럼 그런 비판에 대해서 억울하다 생각하시겠네요?
김 : 나보고 그런 비판을 잘 안 하는 거 같더라구요.
총 :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 : 있습니까? 나보고 돈 벌었다든지 잘 먹고 잘 살았다든지?


총 :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일종의 입신양명이니까..
김 : 아.. 국회의원이 되는 것, 그렇죠. 우리 사회에서 보면은 일정한 신분의 상승을 가져오는 것이죠. 이런 여의도의 좋은 곳에 국가의 도움으로 이만한 사무실을 갖는 것도 엄청난 거지.


총 : 어쩄든 그런 비판에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러니까 전향의 동기가 개인적 이익 때문이었다는..
김 : 개인적인 이익을 찾아서 한 건 아니었어요. 그건 틀림없어요. 내가 서울대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인데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면 내가 어디 가서 못 먹고 그러겠어요. 지금보다 더 먹고 더 잘 살 수 있지. 내 지금 재산 해봐야 1억 5천도 안 되는데, 이런 한심한 재산 가지고 내가 자식들을 유학에 보내길 했나, 우리 집사람한테 다이아 반지를 해주길 했나.. 나 일체 그런 거 없어요.


총 : 그럼..
김 :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나는 이 길을 택한 겁니다. 내가 공적인 목적이 있는 사람이지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기를 치고 그런 건 아니다..


총 :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 길을 택한 건 분명히 아니었고 그걸 변절이라고 하든, 사상적 전환이라고 봐주든 그 때 그렇게 하는 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더 좋은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씀이죠?
김 :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들은 그 점은 마 인정해 주지 않겠나 그리 봅니다. 내가 주변에 후원금 달라 소리도 못하는데.. 하지만 그게 제가 갈 길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총 : 지금 말씀대로 이해를 하자면 이데올로기라는 건 결국 이 국가와 민족이 잘 살게 하기 위한 도구였다.. 근데 그 도구가 현실사회 적용에도 실패했고 실험도 실패했다.. 그래서 아~ 이 도구가 아니구나, 다른 도구를 통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봉사해야겠다.. 라고 결정하게 된 거다..


김 : 맞아요. 맞아. 아주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아주 잘.


총 : 이게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아귀를 맞출 수 있긴 한데, 근데 이념이란 게 간단한 도구가 아니라 체질, 천성, 철학, 자란 배경 같은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도구가 안 맞았기 떄문에 버렸다라고 간단히 말을 하면, 이 십 몇 년간 그 도구를 사용했던 건 너의 체질, 가치관과 맞았기 때문이 아니냐, 근데 어떻게 그런 게 하루 아침에 변하냐..


김 : 아, 그게 저는 인류 역사에서 이념적으로 보자면 큰 전환이 바로 사회주의권의 붕괴라 생각합니다. 사실 중국도 지금 좌파라고 하기 어렵죠. 북한도 봉건적이고. 전세계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이 입증되기 되기 이전의 사고와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살며 보는 거하고 차이가 나지 않을까요? 사업을 하는 제 친구들이 있습니다, 급진좌파적인 생각을 같이 했던 사람들 중에. 이런 분들은 사상적으로 굉장히 좌파적인 생각을, 지금도 정리 안 하고 가지고 있어요. 자본주의에 충실하면서도. 근데 저는 정치권에 와있기 때문에, 그게 안 맞으면 바로 모순으로 팍팍 드러나요...



자본주의 충실하면서도 좌파로 사는 데 문제 없는 사업하는 친구들이 있다.. 근데 난 그게 안 된다..


대전환, 그와 관련한 그의 심정과 처지를 가장 잘 요약한 발언 중 하나다.


총 : 서노련의 슬로건은 정치적 노동운동, 변혁적 지향 노동운동이었고, 소위 임금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연결하신 건데..
김 : 그렇습니다.


총 :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적인 노동운동인데. 이거 모르고 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하셨는데..
김 : 시대적인 감성과 이념적인 지침을 모색하면서 한 거죠. 시대적으로 보자면 상당히 극단적인 노동자의 인권유린과 소외가 있었습니다. 그게 시대적 감성을 형성하고 있었어요.


총 : 그런데 그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려고 한 거였고, 이념은 그 도구였고, 도구는 더 나은 도구로 교체될 수 있다..


김 :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느냐.. 어릴 적부터 식민지 시대를 겪은 어른들 말씀이나 우리의 역사 공부를 하면서... 계속 느낀 게 중국에 천 년 이상 속국으로 살았고 일본에 36년 동안 식민지로 살았고 임진왜란 그것도 사실 식민지 상태였어요.. 점령당한 피점령 상태의 민중 아니었어요? 그래서 약소국가가 가지고 있는 희생이 서럽고 너무나 크다, 적어도 우린 약소국가가 되면 안되겠다.. 그런 생각을 굉장히 크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주변 강대국에게 안 당할 만큼 당당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보태야 한다.. 그런 생각이 어릴 적부터 굉장히 강했던 거 같아요. 그게 대학 입학해서 이념서클 들어가 가지고 좌쪽으로 갔다가 좌절하면서 왔다갔다 그러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지금..


총 : 스스로도, 답을 찾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군요..
김 : 정말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총 : 만족스러운 답을 찾으셨나요?
김 : 만족스럽지 못해요. 저는 지금도 많이 방황하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첨 카톨릭 한 거는 70년부터 시작했으니까 한 34년 됐나.. 중간에 완전히 멀어졌다가 그 뒤로 전두환 정권 들어서면서 카톨릭이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면서 다시 찾게 됐는데.. 요즘엔 현실정치판에 있으니까 상당히 깊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예수의 그 고난, 못 박혀 죽고 죽음으로써 살아나고 또 본인이 가장 비참한 속에서 가장 위대한 구원을 만들어내는 그런 변증법적인 역설.. 예수가 못 박혀 죽은 그것을 보고 숭배하는 서구의 그런 정신은 어디서 올까, 이게 저 사회를 발전시키는 가장 큰 정신적 가치가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도, 이 작은 나라가 무릎을 꿇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큰 정신적인.. 어떤 사상적인 가이드랄까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와야 될 텐데 근데 나는 사상적인 것을 제시할 능력은 없어요.. 그걸 꿈꿔 본 적도 없고.. 다만 그런 것을 실천 속에서 생활 속에서 체현할 수 있는 노력은 내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아무리 부패하고 현실에 몰입해서 타협해서 속물화되고 진흙 탕 속에 뒹군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도록 노력 하는 사람이 있어야겠다.. 현실사회에.. 그렇다면 그런 강한 의지 같은 건 제가 상당히 있다고 봅니다. 예수와 같은 큰 박해와 고난 속에서 다시 부활되는 그런 정신을 통해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총 : 이야기 듣다 보니 우리 사상가들 중에 서구의 대척으로 우리 것이 좋다.. 이런 얘기를 하다가.. 실제론 우리 것이라고 뭐 특별하거나 하지 않으니까.. 결국은 단군까지 가 버리고 그러거든요.. 듣다 보니까 그런 느낌도 듭니다. 이념적 전향의 논리를 찾다가 잘 안 찾아지니 결국 예수까지 이르는..


김 :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럼 점도 있는데.. 우리 시대의, 우리 사회의 큰 사상적 스승이 없는 건 맞아요.. 있으면 나는 좀 배우고 싶은데 나는 스스로가 이 잡동사니 판에서 그런 걸 찾아낼 능력은 없구.. 훌륭한 스승이 있으면 난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갖는 사상적인 목마름, 정신적인 구원을 정말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풀어주길 원합니다. 나는 그런 자격은 없는 사람이니까 그런 욕심은 안 가지지만.. 갈구하고 있습니다.


총 : 그 모순을 어떻게 해결을 하시죠? 사상적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할만큼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그 모순..
김 : 모순이 있지.


총 : 모순에 부딪히면 보통 무시하거나 아니면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하는데.. 어떤 걸로 갈등을 해결하시죠?


김 : 나는 주변에 아는 스승들한테 필요할 때마다 듣죠. 예를 들면 과거에 운동을 하시던 그런 분들한테 듣기도 하고 친구들한테 듣기도 하고 또 나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은 박용균 교수 같은 경우는 상당히 훌륭한 이론갑니다. 찾아가서 듣는다든지 책도 읽는다든지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민거리를 해소하지만은 그러나 그게 체계가 있는 건 아니겠죠. 뒤죽박죽이죠. 저 자신 뒤죽박죽인 모습이 많다고 봐요.



뒤죽박죽. 대전환 이후 그 머리 속 이념적 질서를 요약한 단어.


총 : 의원님, 지금 한나라당 하고 맞습니까?
김 : 잘 안 맞는 것도 많아요. 근데 나라의 성장이 필요하다, 기업이 중요하다, 그리고 전문가가 상당히 중요하다, 어느 정도 인간의 차이나 차별이 불가피하다.. 하는 생각은 맞다고 봅니다. 물론 차떼기다 이런 건 참 경악스러운 일이죠. 이건 굉장히 실망스럽고.



총 : 차이나 차별을 인정하고 전통을 존중하는 게 보수의 기본 논리인데..
김 : 보수주의지. 근데 저는 우리 시대의 진보라는 게 만 달러를 이 만 달러로 끌어 올리는 게 반은 진보라고 봐요. 나는 민주화 운동을 했거든요, 민주화도 진보지. 그러나 근대화도 진보다. 지금은 선진화라고 내가 표현을 하지만 선진화 하는 게 진보다..  민주화나 선진화다 다 진보다..


총 : 음.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전 민주화 운동도 사실은 보수의 정치철학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김 : 민주화 가요?


총 : 정치철학적인 측면에서 보수라는 게 공동체가 축적한 경험으로서의 전통을 중시하고 자유라는 원칙을 존중하는 거라고 하면 구테타에 의해 헌정질서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시민들의 자유가 구속 받는 그런 상황을 제대로 된 보수주의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 그런 면에서 민주화 운동은 사실은 보수철학의 지향일 수도 있다.. 민주화 운동은 보다 크게는 정상과 비정상의 대결이지만..


김 : 고 시점에서 고렇게 표현을 할 수도 있겠네..
총 :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을 종합하자면 개인적 성향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계신 거 같은데..


김 : 어릴 때 습득한 유교적인 이런 가치.. 그런 부분에서 본다면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지.
총 : 그럼 꺼꾸로 전체 삶에서 볼 때 노동운동을 했던 시절이 오히려 의외의 선택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겁니까?


김 : 아.. 그렇게 표현 하실 수도 있어요.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 인생이라는 것이 시대와 떼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는 제 삶에서 적어도 20여 년 간을 각성하고 살았는데, 그 시대와 비추어 볼 때는 저는 필연이라고 봅니다. 제가 박근혜 대표처럼 박정희의 아들이었다면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한 집의, 별 볼 일 없는 집에 태어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산 사람으로서 내가 대학에 와서 서울이 이런 덴 줄 몰랐어, 야~ 건물도 많고, 빌딩도 많고, 나하곤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지만은 이런 문명 속에 굶주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는 이해를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당연히 데모도 해야 되는 거라 생각했고 또 시대적으로 누구라도 좌파가 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냐.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고시를 준비하고.. 교수가 되야 하니까.. 취직을 해야 하니까.. 요런 사적인 생각 없이 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누구라도 빠져들 수 있는, 저만 그랬다고 보지 않습니다. 내가 거기 눈감지 않고, 공적인 요구에 눈을 안 감고 덥썩덥썩 들어가다 보니까 거까지 간 거지요. 그 당시 그 시대는 우리를 모두 거기에 몰아넣는 그런 시대였다고 난 생각을 합니다.


지금 내가 또 다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또 그런 길을 안 갔겠느냐, 지금도 만약 쿠데타가 일어나면 나는 앞장서 나가 싸우고 이럴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잖아. 너무나 참혹한 어려운 시기를 우리는 살아왔다.. 길고도 먼 가난과 압제의 터널을 이제 겨우 벗어난 거 아닙니까.


근데 내 우리 딸을 보고도 너희는 이런 고민을 안 하냐.. 물으면 허허허.. 그런 생각 안 해..  배가 안 고프니까.. 요즘엔 난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이 고마운 거야.. 난 너무 배고프게 살았거든.. 요즘은 배 안 고프잖아. 하하하하. 요즘은 억울하기도 해.. 그렇게 고통스러운 젊음을 보내야만 했던 게.. 재미있게 살지도 못했고.. 연애도 한 번 해봤으면 좋았겠고..


총 : 근데 지금 말씀하신 정도의 보수라면 사실은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이나 보수정당이기는 매 한가지고.. 당을 옮길 기회도 적지 않아 있었을 텐데요?


김 : 난 옮기고 그러는 걸 아주 나쁘게 생각해요. 그 쪽이 야당이고 내가 여당이면 옮길 수 있지만.. 햇빛을 찾아서 가는 건 난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총 : 근데 그렇게 얘기 하시면 애초 민자당에 왜 갔느냐 얘기가 당연히 따라 올 수밖에 없거든요?
김 : 아...


총 : 당을 못 옮기지 못하는 건 콤플렉스 때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고 나서..
김 : 음..
총 : 그런 건 아니십니까?
김 : 민주노동당 같은 데로 옮기면 괜찮겠지. 왜냐하면 그건 내가 낮은 곳으로 가는 거니까.
총 : 양지 바른 곳으로 간다고 욕 많이 먹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런 종류의 욕을 먹고 싶지는 않은 거...
김 : 그렇습니다. 난 안 했으면 싶어. 그건 옳지 않은 거 같어...


총 : 근데 어디서도 내가 그 때 왜 그랬다.. 하는 이야기는 없더라구요.
김 : 그런 얘기 하지 않지..
총 :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었나 보군요.
김 : 누가 물어보겠어..



왜 그랬어야만 했느냐.. 벌써 2시간째 그걸 물었다. 이렇게도 물어보고 저렇게도 물어보고 사방팔방에서 물음표를 날렸다. 결론? 마지막에 내자. 이 대목에서 커피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2시간 짜리 전반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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