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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과일을 못 먹는 남자

2001.3.13.화요일
딴지 명랑 식생활부

프롤로그


1차를 하고 2차를 갈때면 난 슈퍼에서 짱구나 새우깡을 산다. 혹은 길가에서 구워주는 쥐포를 살 때도 있다. 왜일까? 2차로 흔히 가는 곳은 맥주집인데, 거길 가면 내 친구들은 늘 피처와 과일안주를 시키기 때문이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물을지 모른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과일을 못먹는다. 아니 과일을 못먹는 사람도 있나? 혹시 알레르기? 그런 건 아니다. 억지로 먹는다고 몸에 뭐가 나거나 그러진 않는다. 그럼 왜 안먹을까? 거기에는 20여년 전 우리 형제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추억이 담겨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과, 당근, 콩


어머님은 귀가 좀 얇으신 편이다. 두께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남의 말 한마디에 쉽게 흔들린다는 얘기다. 아버지 지병에 좋다는 꼬임에 넘어가 쥐똥을 원료로 만든 약을 200만원이나 주고 사기도 했고, 이상구 박사의 뉴스타트 운동(채식을 하자는 운동이다)이 화제가 되었을 때는 한달 이상 식탁에 풀만 올라왔다. 상어 간으로 만들었다는 스쿠알렌도 어찌나 먹었는지 등에 지느러미가 생길 정도였다. 광우병 파동이 한창인 요즈음은 쇠고기를 일체 안 사실 뿐 아니라 소가 들어간 일체의 음식을 거부한다. 소... 소가 들어간 게 뭐가 있을까. 소가리? 소면? 하여튼, 어머님은 지금도 각종 사이비 약장수들의 표적으로 군림하고 계시다.









맛있겠지? 매일 원샷해봐..


내가 아주 어릴 적에도 신문은 있었다. 그 신문에 어느날 아침마다 사과를 갈아먹이면 건강에 좋다는 기사가 실렸다. 믹서기가 그다지 흔하지 않았을 때인데도 어머님은 믹서기를 과감히 사셨고, 그로부터 우리 4형제(딸 둘, 아들 둘이다)는 아침마다 갈은 사과를 먹어야 했다. "뭐가 어때서? 사과 갈아먹으면 맛있쟎아?"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맛있는 것도 한두번이다. 양도 어린 내가 감당하긴 너무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맥주 500cc 정도의 컵 4개가 갈아놓은 사과를 가득 담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당시 그 사과가 먹기 싫어서 난 잠을 깨기가 두려웠고, 엄마가 깨워도 자는 척하는 귀여운 앙탈을 부리기도 했다.


일년여가 지났다. 다시 신문에 아침마다 당근을 갈아먹이면 건강에 좋다는 기사가 실린다. 당근... 토끼가 좋아하며, 지금은 ‘당연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그 음식.... 이제는 사과 대신 곱게 간 당근이 우리를 기다렸다. 차라리 사과 먹을 때가 봄날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난 당근쥬스를 원샷으로 먹었다. 먹었다기보다는 어머님이 부어넣어 주셨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 먹고 나면 헛구역질이 낫고, 하도 먹었더니 귀가 길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당근이 차라리 행복한 거라는 걸 당시엔 깨닫지 못했다.


몇 개월 뒤 그 신문에 콩을 갈아먹이면 건강에 좋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다음날 잠을 깼더니만 커다란 컵에 무슨 늪 같은 허연 물체가 담겨있는 것이다.


"엄마, 이게 뭐야?"


"응, 콩이다!"









           "우어어어, 콩...!!"


갈은 콩을 먹어 봤는가? 그것도 500cc 정도를 원샷으로...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순간을 말하라면 난 주저없이 그때라고 얘기할 것이다. 컵을 쥔 내 손은 공포로 떨렸다. 먹고 나서 우리가 하두 헛구역질을 해대자 어머님은 거기다 소금을 타주셨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만나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까 궁리했다. 다들 장남인 내가 총대를 메주길 바랬고, 난 그 기대에 부응하기로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느 때처럼 콩 500cc를 원샷하고 난 배탈이 났다고 학교를 안갔다. 그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계속 헛구역질을 하면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아픈 것 같기도 했는데, 병원에서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날부터 엄마는 더 이상 콩을 갈아주지 않았다. 물론 사과와 당근도.


 사과, 당근, 콩, 그 이후


콩밥이 나온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우리 형제들의 밥그릇 뒤에는 골라낸 콩이 쌓여 있다. 음식을 다 잘먹는 나지만, 콩국수가 나오면 손도 안댄다. 샐러드가 나오면 당근만 빼고 먹는다. 과일? 절대 안먹는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보다 힘이 세진 탓에 더 이상 엄마가 힘으로 들이붓는 일이 없어졌다. 우리가 과일을 안먹자 비타민이 부족할까 걱정하신 어머님, 당근작전을 실시한다. 수박 먹으면 300원, 사과 먹으면 100원, 배 먹으면 200원... 다른 형제들은 치사하게 그 작전에 넘어가 돈을 챙겼지만, 어릴 적부터 유난히 고집이 셌던 나는 돈 얼마에 내 신념을 팔 수는 없었다.


교수님 댁에 놀러갔다. 식사를 하고 사모님이 사과를 깎아 오셨다. 그러자 교수님 왈,


"내가 서선생은 과일 안먹는다고 했쟎아요."


"아이고, 내 정신좀 봐. 그럼 뭐 드시겠어요? 수정과 드릴까요?"







어머님이 우리에게 절대 못먹게 하셨던 건 쏘세지콜라였다. 내가 그 두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건 바로 거기서 연유한 거다. 난 요즘도 길을 가다 똘이장군같은 쏘세지를 사먹고, 음료수로 늘 콜라를 먹는다. 쏘세지빵을 즐겨먹고, 햄샌드위치를 가끔 먹는다. 오이는 먹어도 당근은 안먹는다. 토마토, 호두, 복숭아, 감, 포도.... 결코 안먹는다. 참외, 수박, 사과 -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안먹는 3대 과일이다.


돌이켜보면 그건 우릴 위한 엄마의 사랑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어린 시절은 참 행복한 것이었다. 내 친구가 쓴 하마가 소말리아로 간 까닭은?이란 책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와 먹는 것으로 대립하지 마시라고 강조하고 싶다.
아이가 커갈수록 어머니의 시야 밖에 있을 때가 훨씬 많아진다는 것,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꼭 이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들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딴지 명랑 식생활부
마태우스 서민(bbbe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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