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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걸다 디벼보기 위원회] 셀마 이야기

2001.4.16.월요일

딴지 영진공 별걸 다 디벼보기 위원회
 



They say its the last song.
They dont know us, you see.
Its only the last song if we let it be.








 


셀마


이번에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셀마 제즈코바 (Selma Jezkova)입니다. 누군지 다 아시죠.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이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이전에 밝혀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이 이야기는 라스 폰 트리에 (Lars Von Trier) 감독의 문법과 행간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셀마의 모습은 영화 만들기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축인 관객 분들이 보시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얘기되는 내용은 그저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하고 인정돼야하는 다양성의 한 쪽이라고 보시면 별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 영화의 제작과 관련된 얘기 몇 가지 해 드릴께요. 우선, 이 영화 촬영할 때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한 건 거의 다 아실텐데요 (실제 안무를 담당했던 분은 이 영화를 Documentary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배우들에게 자유로움을 주고 또 보다 자연스러운 극의 흐름을 살리기 위해 셀마의 뮤지컬 장면 등에서 동시에 100대의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감독의 의도는 100대의 카메라가 설치 된 공간에서 벌어진 한 Sequence를 있는 그대로 한 번의 흐름으로 처리하려고 했었는데, 실제 그렇게 되지는 않고 불가피하게 편집의 과정을 거쳤다고는 합니다.









크왈다


다음으로, Cvalda (셀마를 챙겨주는 아줌마) 얘기인데요, 애초 섭외 할 생각도 안 했던 거물(?) Catherine Denevue가 감독에게 편지를 보냈답니다.


아주 아주 작은 역이라도 좋으니 함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원래는 35세의 흑인여성이었던 크봘다를, Catherine Denevue를 위해 설정을 바꾸었답니다. 반면에, Udo Kier (의사)같은 경우는 자기 역의 비중이 너무 적다고 밤낮으로 툴툴댔다고 그러네요.


나머지는 제작자의 감독에 대한 평인데요, 초기에 굉장히 차갑고 현학적인 (쉽게 말하면, 잘난 척 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던 경력 때문에 사실 많은 배우들이 Lars Von Trier감독과 작업하기를 꺼려했었답니다.


그런데,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킹덤>을 만들면서 비로소 연기자들과의 벽을 허물 수 있어서 이제는 배우들이 기꺼이 감독과 함께 작업하기를 원한다는 평이네요. 아, 그리고 Lars Von Trier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젊은 시절에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답니다.


자, 여기까지 얘기를 마치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께 한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부탁은 다름이 아니고, 사회주 ..., 또는 공산 ... 비슷한 단어만 들려도 경기가 일어나면서 자동적으로 빨갱이 쉑 ... 라는 말을 저도 모르게 다발적으로 발사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내용에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그냥 코방귀 몇 번 가볍게 날려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너무 과민반응 보이지 마세요.



자, 이제 셀마 이야기를 시작하렵니다.
 




베를린 장벽을 기억하시나요. 이 장벽이 허물어지던 그 날 이후로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등 자본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국가들은 소리 높여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겼다." "공산주의(사회주의)는 패배한 악마의 주의다."


그리고 그 전까지 막연히 민주주의라고 표현하며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불온시 하던 우리 사회의 자칭 주류에서도 서슴없이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말을 내내 읊조리게 만들었습니다.


고르바쵸프라는 이름도 기억하십니까. 소위 공산주의권 몰락의 정점에 서 있던 이입니다. 이 사람이 앞장 서 주창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흐름 속에서 구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 그리고 쿠바를 제외한 대다수 남미 국가들은 그야말로 혁명에 못지 않은 변화 속에서 기존 공산주의 정권이 모두 쫓겨나다시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들이 자본주의권과 되풀이되던 실제 전쟁이나 냉전의 전장에서 패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내부적인 몰락의 계기를 자청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챠우세스쿠 같은 이는 끝까지 변화를 거부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만)


게다가 고르바쵸프는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자부하던 인데, 도대체 왜 그 당시 사회주의국가 권력자들에게는 자살이나 다름없던 일들을 선도했었을까요?


일단 그 질문을 배경으로 깔고 영화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셀마(공장노동자로 나옴)와 주인집 아저씨(경찰)가 마주 앉아 서로의 힘들고 아픈 비밀을 함께 나누던 장면 생각나십니까. 아저씨의 고민은 다름 아닌 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소비를 참을 수도 줄이지도 못하는 Linda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Linda. She always spends, spends ... "


린다는 자본주의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고 그 아저씨는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찾아 허덕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는 즉시 그의 곁을 떠나고 말테니까요.


상품의 소비가 급격히 줄거나 공급이 지나치게 넘치는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역사적으로 경험했듯이 공황이 닥칠 수밖에 없으며 절대 다수 사회구성원의 극심한 고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요. 사회주의 권에서는 단계적으로 공급과 소비를 조절하다가 궁극적으로는 조절 자체가 불필요한 단계로 발전한다는 답안을 작성했었지만 자본주의 권의 답안은 사뭇 달랐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레이건 과 대처가 실천했었고 현재는 부시가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방식이 바로 그 답안 중 하나입니다. Tax Cut (예전에는 New Deal) 등의 정책을 통해 소비를 부추기고 감원과 Down-sizing을 통해 자기네 상품의 경쟁성을 높여 열심히 시장에 내다 파는 겁니다.


헌데, 이 방식의 문제점은 파는 사람의 주머니엔 돈이 쌓여만 가는데, 정작 살 사람은 언제나 돈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수에게만 돈이 몰려버린 결과를 바로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얘기는 들어보셨어요, IMF라고.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있던 셀마에게도 고민은 있었습니다. 눈이 멀어가고 있는 것이었죠. 게다가 그 증세는 자기에게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들 녀석에게까지 옮아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She said, communism was better for human beings." "romantic, and definitely communistic ...- 재판 장면에서


좀 가난하더라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가끔씩 꿈속에 젖어 살면 될 줄 알았는데 눈이 멀어가는 셀마는 기계 하나 제대로 못 다뤄 당장 공장에서도 쫓겨나 작은 꿈에 젖어보기는 커녕 밥을 굶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를 지경인 것입니다. 게다가 자칫하다가는 아들(진, Gene) 녀석마저도 꼼짝없이 똑같은 어둠 속에 빠져들고 말 것이고요.


맹목적 교조주의에 의한 공산주의권의 자멸을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변혁하자고 외친 것이 바로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였습니다.


자기들 사상이 우수하다는 맹신만을 부여잡고 멀어가는 눈을 애써 외면하는동안 갈수록 국민들은 굶주리고 이론과는 달리 오히려 자본주의권의 생산성이 더 앞서 달아나기만 하는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권은 종주국 역할을 하던 구소련의 지도자를 필두로 쫓기듯 스스로 수술을 받겠다고 나서게 되고, 자본주의의 요소들을 접목시켜보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셀마가 미국에서 아들의 수술을 받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았으니 ... 나는 이제 어찌돼도 괜찮아
(Ive seen it all)."


그리고 현재까지의 결과는 여러분들이 직접 보고, 알고 계시는 바와 같습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정한 부()입니다. 그리고 그 부는 한정된 것이기에 어떻게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양측은 피 흘리는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함께 고민을 나누며 서로를 다독이던 셀마와 주인집 아저씨가 2,506.10 달러라는 생명과 바꾸기에는 너무나 형편없이 적은 돈을 사이에 놓고 목숨을 걸고 벌이던 싸움처럼 말입니다.


그 싸움의 와중에서 기어코 죽어서야 손을 놓은 주인집 아저씨로부터 되찾은 돈, 한푼 두푼 땀으로 모은 아들의 수술비를 움켜 쥔 셀마는 울면서 노래합니다. 마치 그 이전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 저질러졌던 수많은 참혹한 일들을 인정하고 뉘우치듯이 말입니다.


"정말로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I am so sorry, but I did what I had to do.)"


원인이나 의도가 어떤 것이었던지 간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를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 채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셀마.


주변에서는 자꾸만 그런 셀마에게 뭐하러 죽음을 자청하느냐, 새롭게 시작해도 되지 않느냐고 달랩니다. 허나 현실은 그런 낙관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병원이나 변호사는 셀마가 죽을 지경이 되어도 이천불 남짓한 수술이나 변론을 거저로 해 주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죽지 않으면 아이의 눈을 고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셀마는 죽음을 택합니다.


하지만, 정작 죽음으로 이르는 길은 너무 너무 무섭고 몸서리치게 싫은 길이어서 셀마는 단 한 발자국도 옮기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눈이 멀었지만, 셀마는 자기가 너무도 사랑하여 나를 죽여서라도 내 아이에게 반드시 주고 싶었던 이 세상의 빛과 공기를 차단해버리는 검은 두건은 정말 목에 매어지는 밧줄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습니다.


그래도 셀마는 그 소름끼치는 무서움 속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이 이제 밝고 맑아져서 필요 없게 된 안경을 두 손에 꼬옥 쥐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이 노래는 마지막이 아니야.
(... but this is not the last song.)"


어릴 때 셀마가 뮤지컬이 끝나지 말기를 빌면서 극장을 빠져나오는 신호로 삼던 마지막 바로 전 노래를 이제는 셀마가 스스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모습으로 말합니다.


"그들은 이게 마지막 노래라고 떠들어.
그 치만 걔네 들은 우리를 몰라, 그거 알지.
우리가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 마지막 노래가 되고 마는 거야.
(They say its the last song.  
They dont know us, you see.  
Its only the last song if we let it be.)"

 




마지막 장면의 자막을 통해 이 이야기 처음에 꺼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봅니다.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였던 감독은 <유로파(Europa)>를 통해 자본주의 질서의 재편을 냉소적으로 그려냈었고, 공산주의 권의 몰락 이후에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Breaking the waves)>에서 보여지듯 초월적 존재나 사상에 대한 맹신이 아닌 인간에 대한 바보스러울 만치 희생적인 사랑을 해답으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새 천년을 맞이하게 된 지금,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커다란 변화로 점철되었던 20세기 후반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경제난과 변화의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는 구 공산주의권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실제 의도가 어쨌든 고르바쵸프로 대표되는 당시 사회주의국가 권력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 죽고 나 살자식으로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면 지금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굴러가고 있을까란 의문 속에서 셀마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려내었고, 그 죽음을 통해 어둠을 걷고 새로운 빛을 찾게 된 진(우리 (us))에게 이제는 어찌해야 될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과연 관객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이젠스타인의 <전함 포템킨>, 챨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 페데리코 펠리니의 <자전거 도둑>, 또는 <록키 호러 픽쳐 쇼>에서 볼 수 있듯 영화는 꿈의 공장임과 동시에 강력한 호소매체이거나 일정한 공감대의 매개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보는 이의 감정과 관점에 따라 그 메시지가 꿈이 될 수도 또는 호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저 처량한 셀마의 모습에 눈물 쏟으며 일컬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관객이 있을 수 있고, 뷰욕(Bj rk)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열연에 감탄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뮤지컬이라고 음미하거나 은근히 풍기는 마조히즘에 불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상영시간 내내 졸다 깨다 하다가 뭐, 이렇게 재미없고 따분한 영화가 다 있냐라고 툴툴대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느낌만큼은 어느 누구도, 영화를 감독한 이조차도 끼여들거나 어쩌지 못하는 아주 소중한 관객 여러분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셀마를 어떤 모습으로 그렸든 간에, 그의 손을 떠나 셀마가 여러분께 찾아간 이상 이제 셀마가 왜 죽는지, 현실 속에서 진(아들)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 우리와 그들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전적으로 관객 여러분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쯤에서 셀마의 이야기를 접어봅니다.


 

 

딴지 영진공
별걸 다 디벼보기 위원회 나홀로 위원
이규훈
(
kyuhoonl@earthlin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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