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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운동권이여 패션리더가 되라(2)


2001.10.28.월요일

딴지 명랑문화 보급우원회 함주리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브레이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제1 빠따 : 대중문학이냐 대중의 문학이냐


 


 


죄의식은 언제나 정당한가


독자제위덜 그동안 안녕하셨는가. 지난 기획기사의 인트로를 쎄린 이후, 각계 각층의 독자들로부터의 폭발적인 멜 러쉬 있었더랬다. 그 중에서도 본 우원 대딩 시절에 "전설의 그들" 혹은 "88 꿈나무" 라고 불리우던 88~90학번, 나이로는 서른 초중반의 멜 비율이 가장 많았더랬는데, 주로 복학한 이후의 후배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털어놓는 내용이 많았다.


한 독자는 복학한 다음 후배들과 생활하면서, 정치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우리들, 즉 "후배들"의 대부분은 정치 얘기를 하거나 정치적인 사고를 하는 것, 곧 "운동권" 이라고 불리우는 집단의 문화나 방식을, 무언가 촌스럽고 진부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 90년대 학번들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그 "진부하고 촌스럽"다고 느꼈던 것들,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 라고 불평했던 점들이 아주 없었다고야 말 못하겠다.


열거하자면, 머 조그만 것들이다. 우선 운동권 학생의 염색 머리, 선배들로부터 걍 넘어가기 힘들었다. 무심코 입은 영어 티셔츠는 미국문화의 무비판적 추종자라며 한 눈총 받고, 콜라 마실 때도 미제국주의 독극물이냐 한 마디 듣고, 연애, 이거 또한 배부른 짓거리로 눈치 꽤나 봤었지. 본 우원 기숙사 동기 중 하나는 열혈 운동권이었는데, 베스트 셀러로 나오는 로맨스 소설을 심심풀이로 즐겨 봤었다. 그러다 선배들이 기숙사로 찾아올 때면 베개 밑에다 그것들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었지..



그땐 우찌나 맛있던지..


80년 세대에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금기들이, 90년대 젊은이들의 의식 속에서는 인정되기 힘들었다. 씨바 울 엄마랑 똑같자나 하며 궁시렁거리다, 급기야는 환멸 운운해가며 첨부터 정치나 사회에 관심 없던 애들보다 더 빨리 더 멀리, 그 세계로부터 달아나기 일쑤였다.


시위 도중 전경을 피해 뛰어들어간 여관방에서 어쩌다 삘릴리하여 뽀뽀 함 한 것에 대해 미치도록 죄의식을 느껴야 했던 세대. 그들은 왜 그렇게 고지식하고,무엇을 그토록 부끄러워 했을까, 아니 죄스러워했을까. 죄의식. 그렇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 아닐까. 무고한 시민들이, 같이 싸우던 동지들이 눈 앞에서 죽어나갔던 시대에 자신이 살아 남았다는 데 대한...


죄의식은 저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처럼,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독소로 작용했고,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므로 당연히,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이것은 그러한 죄의식이 공유되지 않은, 아니 상대적으로 약한 90년대 학번들이 선배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본 우원, 죄의식을 가지는 게 틀렸다 라고 말하는 것 결코 아니다. 본 우원 또한 90년대 들어서 스무살을 맞은 후세대로, 감히 선배들에게 죄의식을 버려라 말아라 운운할 주재가 아니다.


다만 본 우원이 의문스러운 것은, 저 위에서 "운동권 학생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와 같은 식으로, 죄의식을 느껴야할 것과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들이 어느 정도 통념상으로 정해지고, 구분되어 있다는 것. 바로 이 구분이 정당하냐 하는 것이다. 혹 이것들 중에는 아주 획일화 되거나 관습적인 흑백논리에서 나온 것들은 없는가. 그리고 그것을 검증하는 작업이 있었는가, 다만 그런 것들에 대해 묻고 싶은 거다.


죄의식은 죄를 지었다면 가져야 마땅하다. 평생을 지니고 살며 고통 당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관습적이고 타성적인 죄의식은 불행의 씨앗이다. 그것은 오히려 운동권의 정당한 자리매김을 방해한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죄의식은, 그것이 공유되지 못한 다음 세대와의 소통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죄의식이 치열한 검증 없이 "정당화" 되면, 그것을 공유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죽어간 자들을 원치 않은 높은 자리에 신처럼 올려놓는 동시에, 그렇게 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죄의식을 가진 채 살아남은 자신이 그 중간쯤인 제사장의 위치에 선다. 그런 다음 자신과 같은 죄의식을 공유하지 않은 또다른 살아남은 자들을 그보다도 아래 자리에 놓게 되는, 어떤 우월감이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산자와 죽은 자 모두에 대한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본 우원, 이 기획 시리즈의 첫번째로 대중문학이라는 분야를 놓고 이야기 하고자 한다. 주구줄창 연애질 하는 얘기, 아니면 사회개념으로 확대되지 못한 아주 협소하고 상투적인 가족애를 다루는 게 전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학(이러한 명칭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편의상의 분류로 썼다). 대중문학은 언제나 대중 개개인의 욕망을 다루고 배설하고, 간혹은 미화시킨다. 그것 자체는 당연한 속성인 것이다.


대중문학이 태생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욕망, 그것은 확실히 운동권과 접점을 찾기 어려웠으리라. 순수문학의 범주에 드는 공지영이나 최영미 등의 시나 소설도, 개인사에 불과한 넋두리에 운동권을 끌어들였다며 후일담 문학이라는 조롱 섞인 명칭과 함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머 대중문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역시 대중문학은, 이 시대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다수로, 자주 읽는 책이다. 솔직히 본 우원, 운동권의 대표인사들이며 일선에서 민주화를 지도하는 사람들의 문제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는 본 우원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기획을 통해 본 우원 그리고 딴지가 소통하고 싶은 대상은 운동권 인사들이 아니라, 평범한 대중, 즉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일반대중이다. 이 사회를 이루는 대중 혹은 민중, 그 하나하나에게 죄의식을 요구하고 개인적 욕망을 거세하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며 부당한 일이다. 그럴수록 대중은 멀어져갈 수밖에 없고, 사회를 이루는 하나 하나의 사람들이 멀어져간 다음에야, 어떻게 세상의 변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로맨스와 대중문학, 그리고 운동권의 평행선


 







나는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여 호의적인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베리 켄트는 "나, 나, 나는 우리 영국이 지, 지, 지브롤터 섬에 폭탄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한마디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영국의 포클랜드전 당시. 영국 중학생                           스우 타운센드의 <비밀일기> 중


 







한참 운동권이 대학문화 전반을 뒤흔들고 있던 1986년 대한민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국 중학생의 책이 있었다. 이름하여 <비밀일기>. 딱 잘라 말하자면 걍 평범한 소심이 중딩남의 연애 얘기다. 물론 마지막은 연애소설 답게 여친과의 해피엔딩으로 행복하게 막을 내린다.


이 책은 머 딴 거 없이, 중학생 남자아이의 성적 호기심 등이 솔직하게 쓰여졌다는 점 하나로 당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었다. 물론 울나라에서도 그랬다. 이성교제 자체가 죄악시 되던 우리나라 현실 속에서 여자친구의 가슴 한번 보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매일같이 성기의 크기를 재며 고민하던 영국 중학생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기는 힘들었고, 역시 같은 또래였던 본 우원도 당빠 그런 호기심에서 책장을 열었더랬다.


그러나 본 우원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갈수록 생소하게 느껴지던 게 있었는데, 바로 영국 중학생의 진솔한 고백이라고 불려지던 그 책 안에서 줄기차게 드러나는 영국인들의 정치성향이었다.


핑크 여단이었나 머였나, 하여간 중학생들이 만든 모임의 목적이란 게 바로 세계평화. 전쟁 등 시사문제에 대하여 모여서 토론한다. 근데 얘네가 파티랍시고 놀 때는 또, 징하게 똑부러지게들 논다. 세계에 기아에 시달리는 얼라들이 얼매나 많은데 우리가 이래 먹고 싸고 흥겹게 놀아나서야 되겠남, 하면서 태클 걸리는 사태는 엄따. 곧 걔들한테 정치적 감각이란 게 비장하고 특별한 먼가가 아니라, 생활이더란 거다. 춤추고 연애하고 노는 것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그들에게 정치란 거룩힌 신화도 아니지만, 촌스럽고 답답한 무엇도 아니다. 물론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라는 영국 얘기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연애 이야기다. 그런데 남쥔공 여쥔공의 러브질이 학교에서 교장의 독재에 반대하고 대처 수상의 실업정책에 의의를 제기하며 왕실 예찬론자인 교장과 설전을 벌이는 나름의 투쟁(?) 가운데 서서히 싹이 튼다. 또한 그런 정치성향들이 거룩하거나 비장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가치관을 가져서 그렇게 하는 사람, 진보적이라고 보여지기 위해서 하는 사람, 쥔공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사람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묘사된다.


사실, 실업자인 아버지에다 엄마까지 다른 남자랑 살면서 집을 나가버리고, 세탁은커녕 저녁밥 시간에 개와 밥그릇을 같이 쓰며 씨바거리는 쥔공에게 제도교육이 오직 보이는 관심이라곤, 흰 양말과 단정한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랄하는 것 뿐이니 젠장, 그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하지만 인생이란.. 그런 쥔공이 아예 자포자기 상태로, 단 하나 남은 빨간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간 것을 "저항"이라 착각한 자칭 진보적 평화주의자 여쥔공은 어렵쇼 연애를 걸고.


본 챕터 첫머리 인용글에 나온 베리 켄트는, 언제나 주인공을 괴롭히고 힘 약한 애들 삥을 뜯으며 가끔은 물건도 훔치고, 노르웨이와 영국 가죽산업의 관계를 묻는 지리선생에게 "사돈의 팔촌 관계죠"라고 답하는 전형적인 마초소년.


하지만 이넘은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시작하자, 토론장에서 가장 뜨거운 애국자로 변신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주인공을 놀려대며, "씨바 아르헨티나 쯤은 폭탄으로 날려 버려" 라고 하는 내추럴 본 극우 마인드를 드러내는데, 그게 진짜 애국심이라고 여겨지며 기립 박수를 받는 것을 쓸쓸하게 푸념하는 쥔공의 모습은, 영국사회의 중학생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형태로 보수와 진보, 극우의 개념을 머리 이전에 "감각"으로 배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이 주목을 받은 것은 정치적이거나 사회문제를 다뤄서가 아니다. 솔직한 세태 풍자를 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정치성향이 강한 중학생이 자기 신념을 피력한 정치적 소설이 아니라, 당시 대처 집권기의 영국의 생활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술했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영국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몇 년째 실업자래도, 영국의 복지정책과 실업수당은 우리나라처럼 처절하게 극빈계층을 방치하지 않는다. 최소한, 창고 안에 개밥 통조림은 있는 것이다. 중학생들도 대처의 실업정책과 강경노선을 교장의 연설 시간에 비판할 수 있고, 복지국 앞에서 실업자들이 불법으로 점거농성을 하지만, 개처럼 두들겨 맞는 일은 없다. 우리와는 다르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오락성에 치중한 문학으로, 황지우나 김지하처럼 투사를 키워내는 본격 참여문학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모든 대중이 황지우나 김지하를 읽으면서 사회변혁에 한 몸 던지는 투사가 되버리면, 그럼 나라는 어떻게 굴러가나. 사람은 다 각자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는 없다. 정치를 무조건 운동으로 연결 시키지 말자. 감각. 먼저 감각을 가지는 것이 기본이다. 정치감각.


수많은 투사가 있더라도, 올바른 정치감각을 가진 개개인이 없으면 결코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그렇게 많은 대중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문학을 죄시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접점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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