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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뽀오츠] 추억의 명승부 -남자배구-

2002.12.22 일요일
딴지일보 스뽀오츠부

본 우원이 첫 빠따로 소개하고자 하는 명승부는 96년 배구 슈퍼리그 최종결승전 4차전 고려증권 : 현대자동차 전(96년 2월 28일)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명승부 중 하필이면 왜 이 경기냐구?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젤 큰 이유는 아직까정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감동 만빵인 배구경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 흐흐


또한 양 팀은 전통의 라이벌이었다. 84년 제1회 대통령배(슈퍼리그의 전신)가 시작된 이후 95슈퍼리그까지 두 팀은 나란히 5번씩 우승을 나눠가진 국내 남자배구 양대산맥이었다. 이번 대회는 통산 최다 우승팀을 가린다는 측면에서도 무척 의미있는 대결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성화재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독주로 인해 배구판에 정내미가 뚝 떨어졌을 올드팬덜과 진정한 라이벌전의 참맛이 뭔지 궁금해할 요즘팬덜을 위해 이 같은 기사와 동영상을 마련했음이다.


아울러 서브권제의 묘미도 함께 느껴보시라.








최종결승전에서 2승1패(1차전 3:1 고려증권 승리, 2차전 3-2 고려증권 승리, 3차전 3-0 현대 승리)로 앞선 고려증권과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현대자동차의 4차전 현장 속으로!


   1세트 (15:11 고려증권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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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전에서는 무엇보다도 초반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1세트부터 불꽃 튀는 접전이 펼쳐졌다. 서브권만 왔다갔다하길 수차례. 한 점 한 점 올리는 게 임산부 첫 아이 분만하는 것마냥 힘들어 보였다.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단 1초도 눈을 뗄 수 없어서 생리현상 경기 전에 해결하지 못한 거 졸라 후회하게 만드는 경기였다.


최종결승전(5판 3선승제)에서 1승2패로 몰려있던 현대는 전날 3차전에서 3-0으로 이긴 여세를 몰아 4차전도 먹어버릴 심산이었다. 초반 페이스는 좋았다. 마낙길의 탄력 넘치는 백어택으로 1점을 선취한 뒤 강성형의 블로킹과 상대 범실을 묶어 3-0으로 달아났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고려증권도 박선출-이병용의 중앙속공과 문병택의 위력적인 오른쪽 강타로 3-4까지 따라붙었고, 박선출이 강성형의 공격을 차단하며 첨으로 5-5 동점을 이뤘다.


암만 그래도 호화군단의 자존심이 있지. 현대는 고려증권에게 쉽게 역전을 허용치 않았다. 고려증권이 어렵사리 7-7 동점을 만들어 놓으면 또 다시 9-7로 두 발짝 앞서 나갔고, 간신히 9-9 균형을 맞춰 놓으면 어느 틈에 10-9로 도망갔다.


하지만 고려증권이 어떤 팀인가? 지고 있어도 5점 정도는 너끈히 뒤집을 수 있는 끈기와 오기로 똘똘 뭉친 조직력의 결정체가 아니던가.


9-10으로 뒤진 상황에서 이수동의 연속적인 레프트 강타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한 고려증권은 마낙길의 연타성 공격이 아웃되고, 세터 이성희가 임꺽정 임도헌의 회심의 스파이크를 정확한 타이밍으로 막아내며 12-10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 후로 고려증권은 단 한 번도 리드를 빼앗기지 않았다 이수동-문병택 쌍포가 폭발하며 13-11을 만든 고려증권은 상대팀 주포인 임도헌, 마낙길의 공격범실을 틈타 1세트를 15-11로 끝냈다.


 


 2세트 (17:16 현대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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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배구가 이보다 더 박진감 넘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배구의 진수, 묘미, 매력을 모조리 맛볼 수 있는 경기였다. 양 팀은 이거 남자경기 맞아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매 공격마다 숨막히는 랠리전을 전개했다. 폭포수처럼 시원시원한 스파이크와 그림같은 수비가 판타스띡한 조화를 이룬 이 경기는 차라리 하나의 작품이었다. 가히 아트의 경지였던 것이다.


결국 10번의 동점, 8번의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한 끝에 웃은 팀은 현대였다.


세트 초반, 수차례 득권 공방이 있었지만 점수는 맨날 그대로였다. 먼저 소강국면을 뚫고 나간 것은 현대였다. 강성형과 마낙길의 시간차 공격과 블로킹이 빛을 발하며 6-2까지 성큼 달아났다.ㄹㄹㄹ


그러나 이수동의 위력적인 스파이크가 불을 뿜으며 4-6까지 추격한 고려증권은 최성영-박삼용이 마낙길의 공격을 연속으로 잡아낸 다음, 임도헌의 파워 넘치는 공격이 안테나를 맞고 아웃되는 사이 7-7 동점을 만들었다.


그 후로도 9-9, 10-10, 12-12, 13-13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13-13에서 6번의 사이드아웃 끝에 먼저 14점 고지를 점령한 팀은 고려증권. 마낙길의 시간차 공격이 눈치 빠른 재간둥이 센터 박선출에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도 만만치 않았다. 두 번 걸릴 수 없다는 오기로 점프한 마낙길이 시간차 공격을 성공시킨 뒤 문병택이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면서 14-14 듀스가 됐고, 살림꾼 강성형의 천금같은 블로킹으로 또 다시 15-14로 전세가 뒤바뀌었다.


끝내 두 팀은 16-16으로 갈 때까지 갔다. 17점 상한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1점을 먼저 따는 팀의 승리. 마낙길의 호쾌한 백어택이 작렬했다. 이에 뒤질세라 노련한 박삼용도 쳐내기를 성공시켰다. 곧이어 국가대표 센터 윤종일의 깨끗한 B속공이 상대 코트에 뚝 떨어졌다. 현대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 김성현으로부터 토스를 받은 마낙길의 연타가 정확하게 코트에 들어가자 현대 선수들은 일제히 두 팔을 치켜 올렸다.


 


   3세트 (15:9 고려증권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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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배구는 흐름이 경기다. 따라서 직전 세트에서 듀스 끝에 진땀승을 거둔 팀은 담 세트에서 상승세를 타기 마련이고, 아깝게 진 팀은 사기가 팍 꺾일 수밖에 없다.









MVP에 선정된 이성희


그러나 고려증권은 그런 일반적인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마술의 팀이었다.


고전하리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려증권은 초반부터 기세를 올렸다. 배구 9단 박삼용의 쳐내기와 문병택의 호쾌한 백어택으로 4-1로 달아난 고려증권은 국내 최장신 센터 제희경의 키값에 눌려 4-6 두 점차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후로는 별다른 위기를 맞지 않았다.


9-5로 앞선 상황에서 강성형의 스파이크와 문병택의 공격범실로 6-9로 추격 당해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박선출의 B속공, 이수동의 빠른 C속공과 때맞춰 나와준 김성현-마낙길의 범실에 편승해 점수를 12-6으로 벌렸다. 사실상 승부가 결정됐던 것이다.


이어 최성영이 임도헌의 공격을 막아내 14-7 매치포인트를 만들었고, 14-9에서 지창영이 백트를 맞고 또르르 굴러가다 떨어진 볼을 리시브하려다 중앙선을 밟는 에러를 범한 덕분에 3세트를 따냈다.


 


    4세트 (16:14 현대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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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팀 선수들 모두 겜에 중독된 거 같아요. 허허


매 세트마다 명승부를 연출하는 양 팀의 플레이가 매우 만족스러운 듯 칭찬에 인색한 편인 오관영 해설우원도 양 팀 선수들을 치켜세우고 독려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3세트까지 펄펄 날아다니던 양 팀 선수들.. 2시간 여 동안 사력을 다해 뛴 덕분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그 사이 코트에 본드칠이라도 해놓은 것인가. 양 팀 선수들 모두 좀처럼 발이 안 떨어졌다. 4세트부터는 체력전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고독한 터미네이터 임도헌


세트 스코어 1-2로 벼랑 끝에 몰린 현대는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붙였다. 글구 마낙길의 쳐내기, 김성현의 서브 에이스, 강성형의 블로킹을 집중시키며 4-0으로 앞섰다.


고려증권은 박삼용-문병택의 좌우 공격을 앞세워 4-5 턱밑까지 쫒아갔지만 현대는 임도헌의 대포알 스파이크와 김성형-제희경의 콤비 블로킹으로 10-5까지 멀찌감치 도망갔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으면 고려증권이 아니지. 5점차로 질질 끌려가던 고려증권은 역전의 명수답게 순식간에 10-10 동점을 만들었다.


문병택의 라이트 공격과 최성영의 속공으로 6-10으로 따라붙은 뒤 임도헌의 서브 범실, 김성현의 네트 터치가 속출하는 사이 8-10으로 점수 차를 좁혔다. 이어 박삼용의 밀어넣기와 문병택의 백어택으로 10-10을 만드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런 경기라면 맨날 중계방송하겠어요. 항상 냉정함을 잃지 않는 오관영 해설우원.. 이 대목에서 또 다시 흥분했다.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먼저 13-13 균형을 깨뜨린 것은 현대. 임도헌이 문병택의 공격을 정확하게 차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삼용의 레프트 공격 성공으로 양 팀은 2세트에 이어 또다시 듀스를 맞았다.


마낙길이 문병택의 공격을 블로킹하며 현대가 15점에 먼저 도달했으나 아직 맘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곧바로 이병용이 속공으로 응수했고, 고려증권은일단 한숨을 돌렸다.


결국 피말리는 접전은 상무에서 갓 제대한 마낙길의 손에 의해서 마무리됐다. 마낙길은 15-14에서 연거푸 공격을 성공시키며 16-14 아슬아슬한 승리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오관영 해설우원은 또 한 마디 덧붙였다. 고려증권, 아주 징그러운 팀이에요


 


    5세트 (17:16 고려증권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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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 세트를 고려증권이 접수하면 고려증권의 우승이 확정되지만 현대가 이기면 96슈퍼리그 패권의 향방은 마지막 5차전에서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초반부터 양 팀은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게(?) 점수를 나눠가졌다. 랠리포인트제가 적용되는 5세트인만큼 속전속결이었다.


범실이 나올 때마다 범실을 저지른 팀 선수들의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하고, 잿빛으로 변한 반면, 당신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오라고 말하는 듯한 상대팀 선수들은 기쁨의 탄성을 질러댔다.


1점차 이상 벌어지지 않던 점수가 첨으로 2점차 이상 벌어진 것은 세트 후반. 10-10 상황에서 제희경이 박삼용의 공격을 가로막고, 최성영의 속공마저 걸리면서 현대는 12-10으로 앞섰다.


그러나 임도헌의 네트터치에 이어 박삼용의 연타가 네트 맞고 들어가는 행운으로 다시 12-12 동점이 됐고, 박삼용의 쳐내기로 13-12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현대도 끈덕졌다. 13-14로 뒤진 상황에서 김성현이 박삼용의 공격을 막아내며 14-14 듀스를 만든 것이었다. 박삼용의 시간차 공격으로 고려증권은 한 점 달아났지만 마낙길이 맞불을 놓으며 다시 15-15 동점. 마낙길의 레프트 공격이 작렬하며 오히려 현대가 16-15로 유리한 상황이 됐고, 박선출의 속공이 들어가 또 다시 16-16 동점.


이때 문병택의 라이트 공격이 터지며 고려증권은 또 다시 17-16 리드를 잡았다. 서브왕 이성희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찬찬히 서브를 넣었다. 상대 강성형은 회심의 일타를 날렸으나 볼은 그대로 바운드됐다. 최성영이 걷어올린 볼은 세터 이성희에게 연결됐고, 파이팅 머신 이수동이 힘껏 팔을 휘둘렀다.


볼은.. 블로킹벽을 뚫고 그대로 상대 코트에 떨어졌다.



이수동은 우승이 확정되자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플로어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던 선수들 눈이 벌겋게 변했다.


93년 이후 3년 만의 정상탈환이었다. 그것도 챔피언결정전 3승1패를 포함, 21승 2패의 빼어난 성적으로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었다.


슈퍼리그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고려증권은 다크호스 정도로 분류됐다. 우승은 언감생심이었다. 딴 팀 선수들에 비해 네임벨류가 처지고, 눈에 띄는 스타급 선수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버뜨.. 고려증권이 언제 이름 갖고 배구했더냐.


파워, 높이, 이름값.. 고려증권의 끈적끈적한 조직력 앞에서 이런 것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성희, 박삼용, 이수동, 이병용, 박선출, 문병택, 최성영, 이병희, 송재택.. 무명군단의 통쾌한 반란에 많은 사람덜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특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려증권의 우승은 현대같은 좋은 라이벌이 있어서 더욱 빛이 났다는 거다.(신감독, 내 말 알간?)







 
본 우원.. 운 좋게도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었다.


당시 분위기를 잠깐 설명하자면.. 관중석은 반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한 현대를 사모하는 오빠부대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끈끈한 조직력이 돋보이는 고려증권을 응원하는 넥타이 부대.


글구 본 우원은 아부지 넥타이 하나를 가방에 쑤셔넣은 후 넥타이 부대에 슬며시 끼어서 목이 터저랴 고려,이겨라!를 외쳤었다.


고백컨데.. 고려증권의 우승이 확정된 순간은 울 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마음 짠~ 했다.


고려증권은 이제 역사 속의 팀이 됐다. IMF 된서리를 맞고 98슈퍼리그 이후 팀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슈퍼리그 통산 6회 우승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채. 하지만 많은 사람덜의 뇌리 속에 고려증권은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 그때 그 시절의 명승부를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딴지 스뽀오츠부
도우넛(bluesky@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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