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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7.수요일


산하


 


10년도 더 전, 한 탈북자 (요즘은 새터민이라고 하는데 좀 입에 안붙는다)를 만났을 때 나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보다 한두해 전에 발생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의 조카라나 뭐라나 하는 이한영씨 살해 사건에 관해서였다. 영화 "의형제"의 도입부에서 죽어가는 김정일의 '육촌'과 그 가족들처럼, 이한영씨는 그의 아파트 복도에서 총알을 맞았다. 범인은 영화만큼이나 대담했고 영화 속 암살자 '그림자'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국정원은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모자를 쓰고 현금을 찾는 CCTV 까지는 공개했지만 그 뒤 수사의 성과가 발표된 기억은 없다. 그저 북한의 공작원일 것이라는 추정만 꺼내 보였을 뿐.  



이 사건에 대한 어느 새터민의 해석은 이랬다. "그거는 남북합작이지요.  북한도 이한영이가 눈엣가시였고, 남한도 더 이상 이한영이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거기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국정원 말을 여러 번 듣지 않았었거든요.   내 추측인데 남북 정보기관이 합작을 했다고 봐요. 북이야 장군님 얼굴에 먹칠한 배신자 죽여서 좋고, 남한은 귀찮은 관리 대상 없어져서 좋고."



물론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추측에서 수용해 둘만한 진실의 조각 하나는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남이건 북이건 세계 어느 나라건, 한 나라의 권력 그 자체와 권력을 떠받드는 축들이 절대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즉 무슨 수를 쓰든 조국의 배신자를 죽여 없애겠다고 소음총 든 암살자를 파견할 수도 있고, 능히 적의 손을 빌려서라도 귀찮은 자를 처리할 수도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김정일의 육촌 뿐 아니라 그 아내와 장모까지도 거침없이 죽여 버리는 북한의 공작원도 실제 인물의 복사판일 수 있고, "PD가 빨갱이니 세상이 이 모양이지"라고 뇌까리는 송강호의 꼴통성은 PD수첩 제작진을 두고 "이 땅에 혁명을 추구하는 좌파세력"이라 열을 올리던 민모 사무관의 최후진술에도 몽고반점처럼 나타난다. 


 



 


항상 정의로운 권력이란 본디 "동그란 네모"와 같은 형용모순이다. 더구나 사생결단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뤄 왔고, 아직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은 대결의 장에 서 있는 두 권력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 정의로움이란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사치재 이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권력은 끊임없이 그 치맛자락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권력은 정의롭고 정당하며 악에 저항하는 선의 도구라고 끊임없이 설득하고 주입한다. 어린 아이들처럼 "누가 좋은 편이야?"를 묻게 만들지도 못하게 우리 편은 당연히 좋은 편임을 윽박지르고 명토박아 버린다. 거기에 고개를 갸웃이라도 할라치면 가차없는 응징과 위협으로 그 고개를 바로잡아 놓는다. 그리고 드디어 사람들은 "좋은 편을 우리 편으로 하겠다"는 현실적 선택이 아니라  "우리 편이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몽환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남에서 북에서 모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또 다른 분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역시 십 몇년 만에 한 노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십몇년 전과 단어 몇 개만 다른 주장을 반복하시는 것에도 질렸지만  "종북주의 운운은 한나라당보다 더 나쁜 주장"이라는 무도한 주장을 서슴지 않으시는 데에 그만 인내력을 상실하고 말았었는데, 강의 도중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었다. 1976년 8.18 도끼 만행 사건을 설명하면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겨우 두 명이 죽었다고 수백만이 죽을지 모르는 전쟁 위협을 서슴지 않았던 야만적인 나라 미국......."  



늑대와 그 상전 붉은 돼지가 북한을 지배했던 영화 "똘이장군"을 시종일관 관통했던 정서가 이렇게 극적으로 환생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전방확보를 위해 나무 가지를 치고 있는 인민군을 국군 장병들이 도끼로 때려죽였다면 그 교수님은 "겨우 두 명"이라는 표현을 쓰실 수 있었을까.  이미 그분의 프레임은 튼튼했고, 감옥이 되어 마땅히 학자적으로 자유로와야 할 그분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남과 북의 권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장단과 강약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편이 좋은 편이어야 한다"는 강박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영화 "의형제" 속에서 끈 떨어진 간첩 강동원과 파면당한 국정원 요원 송강호는 두 권력의 최첨단 촉수로 기능했고 기능하고자 하는 사람이면서도 그 강박에서 한 발짝씩 벗어나 있었다. 아이를 죽일 수 없어 배신자의 누명을 썼던 강동원과 사살령 떨어진 강동원을 구하고자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송강호의 모습은 <JSA>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그 버금딸림 정도로의 신선함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걱정도 따른다. 



<JSA>를 보고 웬 예비역 JSA 경비병들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들고 일어났던 기억을 끄집어내 보면, <웰컴투 동막골>을 반미영화라고 우겼던 코미디를 되새겨 보면, 이 영화를 두고도 "인간적인 간첩의 모습과 돈만 밝히는 국정원 직원을 익의적으로 대비시켰다"면서 허연 백발을 헤드뱅잉하실 분들이 꼭 계시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북한 공작원을 "그림자" 처럼 극악무도하게 설정함으로써 반북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영화"라고 부르짖는 사람도 분명히 생길 것이고 말이다. 



"우리 편이 좋은 편"이라는 믿음은 "어느 편이 옳은가?"하는 질문을 사장시키고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는 간사하지만 현실적인 지혜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실질적이건 이데올로기적이든 지배하는 권력의 속성을 꿰뚫어 보기는 커녕,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로, 아니 반항은 커녕 충성스러움에 산천초목이 기함을 하는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영화 속 북한의 킬러 '그림자'처럼, 그리고 강동원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목사의 팔을 꺾어 내동댕이치며 빨갱이라고 고함쳤던 송강호처럼 말이다.



친북친남이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 말의 저작권은 고 문익환 목사님에게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친남의 대상이 노태우 정권이 아니었듯, 친북의 대상이 김정일 정권에 국한될 수도 없을 것이다. 쌍방의 권력은 절대악도 아니고 절대선도 아닌 실제로 존재하고 행동하는 권력일 뿐이다.  현상유지에 몰두하고 보호본능에 충실하며  더 큰 권력을 추구하면서 양립할 수 없는 라이벌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지에 충만한 현실적인 권력일 뿐이다.  그 권력의 강건한 자기장 아래에서 그에 무조건 충성해야 하는 입장의 두 사람이 그 충성을 조금씩 이그러뜨려 가면서 가까와지는 모습은 그래서 보기에 편안했다.   친북과 친남은 저렇게 되어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에 조금씩 객관적으로 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가면서, 일방의 논리를 거부해 가면서. 영화 <의형제>는 그래서 재미있었다. 


 



P.S.잠시 언급한 그 교수님은 또 이러실 것이다.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은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북한 정권과 인민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돼지 수령과 늑대 인민군 밑에서 신음하는 북한 인민"만큼이나 만화적인 발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