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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7.수요일


그냥불패 톰소여


 


PD수첩 사건에 전혀 관심없었거든. 요즘 먹고 살기도 바쁘잖아. 그래서 정지민이니 문성관 판사니 진중권이니 그냥 관심끄고 살았걸랑. 근데 요즘 하도 시끄럽길래 뭔가 싶어서 봤더니, 오홋, 정지민씨가 인문학도라는 것을 알게됐어. 나도 한때 책 좀 읽어서 궁금했거든. “나는 천상 인문학도다라는 사람의 내공이 말이야. “내가 PD수첩 사건에서 활용한 언어능력, 자료찾기, 합리적인 유추와 논리제시는 모두 내가 공부하면서 사용하는 것의 몇 천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 너무 멋지잖아. 이야, 우리 역사학계도 드디어 스타가 나오는구나.


 


그래서 화장실에서 똥누면서 이대 홈페이지에가서 정지민씨의 2007학년도 이대 석사학위 청구논문,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를 찾아서 읽어봤지. 요즘 세상 좋아져서 석사논문도 온라인으로 바로 pdf로 볼 수 있어. ,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렇지 아리스토텔레스도 pdf로 보는 세상이잖아.


 


우선 라카프라(Dominique LaCapra)를 모르는 횽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여하튼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만 알면돼. 한마디로 내공이 후덜덜한 지성사가야. 코넬대학에서 가르치는데 머 그 제자들도 완전 어깨랑 목에 힘 좀 주고다니지. 미국에서도 그 정도 중량감이 있는 지성사가/이론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마틴제이(Martin Jay)정도밖에 없을꺼야. 한국에는 중앙대 사학과의 육영수 선생 (정지민씨의 논문 심사위원 중의 한명이지)이 부지런히 소개를 하고 있고, 정지민씨의 지도교수라고 할 수 있는 이대 조지형 선생도 좀 공부를 한적이 있고 말이야.


 


석사논문이야 뭔가 새로운 이론이 나오는게 아니고, 그냥 선행연구된거 잘 정리해서 나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이 정도만 보여주면 되는거 우리 다 알고 있잖아? 그래서 기대반 걱정반 그렇게 가지고 읽어나갔어. , 서론, 좋아, 좋아.


 


근데 서론 지나서 본문의 첫 페이지 (p.4)를 읽어나가다가 딱 걸리는거야. 두번째 단락의 80년대의 전반적인 수정주의적 경향을 설명하는 부분말이야. 인용하자면,


 


흡사하게 최근에는 미국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노예 등 기타 희생자들에 비해 유태인이 특별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효과를 가졌다라는 부분이야. 그리고 주장이라는 근거에 대해서 각주를 봤더니 Charles Maier, “A Surfeit of Memory?”라고 참고문헌을 써놨더라고.


 


앞뒤문장을 같이 묶어서 풀어말하자면, 메이어라는 학자는 수정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는 학자중의 한사람으로서, 인디언이랑 흑인노예도 유태인들과 동일하게 고통을 겪었기에 홀로코스트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처럼 보이잖아. 정지민씨 논문에 따르면 말이야.


 




근데 라카프라가 후덜덜하다면 찰스 메이어(Charles Maier)도 후덜덜하거든. Recasting Bourgeois Europe같은 책은 유럽사 공부 좀했다는 애들에게는 필독서잖아. 근데 이 사람이 (미국사 전공도 아니고 유럽사 전공하는 사람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거야? ..이상하다. 뭘까..싶어서 똥 계속 누는김에 (내가 변비가 좀 심해) “A Surfeit of Memory?” 논문을 직접 찾아봤어. 이 논문은 1992년에 예일대학에서 강연한 것이 논문화되어서 1993년에 History and Memory에 발표된 건데, “Can there be too much memory?”라는 질문에 답을 해가면서 논문을 풀어나가는거야.


 


근데 논문을 반쯤 읽어가도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노예 등 기타 희생자들에 비해 유태인이 특별한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주장은 찾을 수 없는거야. 이거 이상하다, 정지민씨가 이럴리는 없는데 말이야.


 


변비가 심해질 즈음, 아하 드디어 146페이지에 정지민씨가 언급한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노예가 나왔어. 좀 길지만 인용해볼께.


 


“To post an alternative heuristic question: why not a museum of American slavery? Would it not be a more appropriate expenditure of national land and funds to remember and make vivid crimes for which our own country must take responsibility rather than those perpetrated by a regime which, in fact, Americans gave their lives to help destroy? Or why not a museum of American Indian suffering from smallpox to Wounded Knee and the alcoholism of the reservations? Of course, the affected groups might not want this sort of museum. If we polled spokespersons for African Americans and American Indians, they might prefer a museum which integrated the proud moments of their history and culture with its moments of victimization in some linear or historical order. Why does the new Jewish museum center on the catastrophe? And why is it this catastrophe and not the slave auction block or Andrew Jackson’s ethnic cleansing of the Cherokee that is remembered on the Mall?”


 




이 부분만 읽어보면 정지민씨가 제대로 잘 인용한 것 같지? 미국땅에 흑인노예 박물관이나 아메리칸 인디언 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유태인 박물관을 세우는 것보다 세금을 더 제대로 쓰는 것 아니겠냐고. 왜 하필 워싱턴에 유태인 박물관이냐고.


 


근데 원래 논문은 앞뒤 맥락을 잘보고 이게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를 봐야하는거잖아.


 


우선 본문을 잘 읽어보면 메이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흑인과 인디언의 예를 들어서 유태인의 경험이 특수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유태인들의 기억은 홀로코스트라는 재난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현상이 어떤 형태로 20세기 후반의 정치지형학적인 변화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싶은거야. 그래서 흑인노예와 인디언의 예는 “to pose an alternative heuristic question”이라고 토를 달아놓으거고 말이야. 그게 핵심이 아니라는거지.


 


물론 메이어는 논문에서 기억의 과다/범람이라는 20세기말 전지구적인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어. 특히나 유태인들의 특정한 집단기억형성에 대해서 말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정지민씨가 핵심이라고 인용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거야. 논문 끝부분 (150-1페이지)의 결론을 보면 더 명확해지는데, 그냥 인용할께. 번역하기 귀찮아. 


 


“As a historian I want past suffering to be acknowledged and repaired so far as possible by precluding reversions to violence and repression. But I do not crave a wallowing in bathetic memory. I believe that when we turn to memory it should be to retrieve the object of memory, not just to enjoy the sweetness of melancholy. And I am not certain that any memory can retrieve the past….the past cannot accompany us. Memory can, but insofar as it leaves behind the past it must be kept in its place as servant, not master, as a reflection on experience and not experience as a whole. In this conditioned sense, and for all the reasons expounded above, I hope that the future of memory is not too bright.”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야. 누군가 견해를 인용하고 할때는 좀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거야. 인문학의 기본이잖아. 각주다는거 한국서야 누가 확인하지 않잖아? 하지만 큰물에서 놀려면 그러면 안되는거잖아.


 


또 하나 사족인데, 앞서서 내가 인용한 본문 바로 앞페이지에 메이어는 수정주의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잠시 정리하고 있어. 물론 메이어가 사용한 수정주의와 정지민씨가 사용한 수정주의는 정의 자체가 좀 달라. 정지민씨가 사용한 수정주의는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학자들을 지칭하지않고, 그냥 홀로코스트가 유일무이하다는 견해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들을 폭넓게 지칭해. 그래서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애들은 논문 가운데극단적인 수정론자라고 지칭하고 있지. 반면에 메이어는 논문에서 Irving같이 홀로코스트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긴 하지만 수정주의로부터 자신을 좀 멀리하고 있어. 수정주의에 대해서 메이어가 모라고 하냐면 말이야.


 


“I cannot really fathom the revisionist mentality… Holocaust revisionism is noxious because it negates the minimal demands of a pluralistic society; it denies respect.”


 


간단히 말해서, 개념이 없는 넘들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거야. 이렇게 수정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이런 학자를 수정주의적 경향이 있는 학자로 분류를 하면 오독의 여지가 있다는거지.


 


그리고 이건 좀 내가 쓰면서도 촌스러운데, Charles Maier Arno Mayer는 완전 다른 사람이거든? 이름 비슷한거 인정해. 근데 각주에, Maier Mayer 좀 헷갈렸더라. 그냥 실수였지?


 




똥도 다 눴으니 오늘은 그만할께. 학자로서 꼭 대성해야해.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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