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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8.목요일


딴지담임목사 미쉬파트


 


 


 


 


안녕하세요. 미쉬파트입니다.


 


오늘의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난 글들에 대한 감사와 해명(?)을 잠시만 드리겠습니다. 먼저 감사드릴 것은 어떤 식으로든 격려해 주시고 잘 해보라고 응원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런 것을 바라고 글 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격려해 주신 분들께는 머리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좀 당황스러운 응원도 있었습니다만...^^;) 상투적인 이야기같습니다만 앞으로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도록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해명이랄 것 까지는 없지만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조건 옳고 맞다는 것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한계가 많은 사람인데 무슨 말이든 어떻게 다 옳은 말만 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제가 아는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아마 제가 목사라서 기독교 신앙이나 교회 등에 대해 그동안 궁금하셨거나 맘에 들지 않은 것들 물으시는 것이라 생각은 합니다만 이곳 딴지가 기독교 사이트도 아닌데 줄줄이 댓글달고 거기에 논쟁이 또 붙는 것은 뭔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가급적 글을 쓴 내용에만 서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실 분들은 제 메일로 말씀해 주시거나 아예 다른 글로 게시판에 쓰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과 이에 대한 해결방법에 대한 제 글이 기독교 전반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은 저로서도 당혹스럽습니다.


 


가능한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관련된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만 논의의 범위에서 지나치게 비약되는 부분이나 주제와 관련이 없는 글에는 굳이 답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부분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사실 제가 꼭 쓰고 싶었던 [교회의 직분제도]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의 규모의 문제와 이 교회의 직분제도의 문제는 현재 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저는 보는 바입니다. 이 직분제도의 문제는 사실 단순한 것은 아니며 한국교회의 정치적 성향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다룰 [한국 개신교의 역사와 한국정치와의 관계]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교회의 직분제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항상 제 글이 그렇지만 현재 교회를 출석하시고 계신 신자분들이 많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직분제도는 사실 그 명칭 자체의 근원은 성경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개신교의 직분제도인 목사, 전도사, 장로, 감독, 집사, 권사 등의 제도는 모두 성경에서기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으니까 그 직분을 인정한다는데에야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문제는 이 직분제도에 심각한 왜곡과 오용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오늘 글에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각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현재 개신교의 직분제도는 피라미드형입니다. 평신도-집사-안수집사-장로(권사)-부목사-목사 뭐 이런 구조가 일반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 하에서의 계급제도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이 직분의 성경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우선 현실속에서 이 직분들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현재 교회의 직분은 계급입니다.


 



최고의 계급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엄연히 이 직분의 높고 낮음은 교회에 존재합니다. 대형교회들의 경우 평신도가 담임목사를 만나려고 하면 비서실에 미리 신청을 해야 합니다. 그럼 비서실에서는 그 내용의 경중을 판단하고 담임목사의 스케줄을 고려해서 시간을 배정하는데 그게 길게는 몇달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성도를 만나는데 몇달이 걸릴 정도로 바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 공동체는 목회자와 성도가 언제나 함께 만나고 삶을 나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경우 아무리 커져도 수백명을 넘기는 힘들 것입니다.) 대형교회든 혹은 꽤 알려진 목회자의 경우 외부 스케줄이 자신의 목회일정보다 더 많습니다. (강연회나 세미나 혹은 모임참석 등이 대부분이죠) 이건 목사라기보다는 정치인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형교회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사실 중소형 교회라도 평신도가 불쑥 담임목사에게 나 할말이 있는데 좀 만납시다 하기 참 어렵습니다. 왠만큼 몇백명만 모여서 장로들이 선출되어 있는 교회만해도 이러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일년에 두어번 있는 심방기간에 담임목사가 잠깐 집에 왕림(?)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나마도 사람이 많아지면 나중에는 신청자에 한해서 라는 단서가 붙지요.


 


이 심방의 폐해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담임목사가 심방을 하면 보통 따라 붙는 수행인원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부목사들과 담당 권사들만 해도 7-8명 이상이 되는데 이 사람들 오면 보통 식사와 접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모여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 좋겠는데 이게 또 그게 아니라 칙사 대접을 해야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목사님은 주의 사자이니 대접을 잘 하면 자신이 복받는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이러니 한 번 심방을 받으면 심방감사헌금에 접대를 합치면 최소한 수십만원이 들어갑니다. 왠만큼 재정여유가 없다면 이는 큰 부담이지요. 이래서 심방도 아무나 못합니다. 재력이 있지 않으면 어렵죠.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고 하실 것입니다. 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주로 개척교회)도 있지요. 그때는 성도 한명이 아쉬울 판이니 목사가 성도들을 엄청나게 잘 대해 줍니다. 그러나 제가 여태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작은 교회가 점점 커져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정도로 성장하고 나면 거의 예외없이 위와 같은 형태의 심방형태로 변질됩니다. 따라서 이는 일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직제와 관련된 근원적 문제의 병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바로 목사가 하나님 바로 밑에 있는 [존귀한 분]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기도할 때 목사를 일컬어 주의 사자 라는 말을 흔히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교권주의 때문입니다. 지도자층에 권력을 두어야만 밑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기 쉽다는 것이죠.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오면서 자연스럽게 목사와 평신도는같은 교회 공동체원이지만 신분으로는 차이가 나는 희안한 구조로 나누어집니다.


 


목사는 크게 담임목사와 부목사, 그리고 특수목사가 있습니다. 담임목사야 뭐 다들 아시겠지만 교회의 대표이자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적 의결권자이자 교회의 인사권, 재정권, 행정권, 교육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무소불위의 자리입니다.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담임목사가 일이 바쁠 때에는 그 일을 땜빵하는 역할을 하거나 교회의 행정을 주로 담당합니다.


 


(부목사는 쉽게 말씀드리면 정직원이 아닌 인턴직원입니다. 죽어라 일만 하고 대우는 못받지요. 하지만 부목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있는 것은 간혹 교회에서 잘 본 경우 그 교회의 다음 담임목사로 청빙하거나 아니면 다른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일수록 그런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따라서 큰 교회로 가려는 목사들이 많은 이유가 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훌륭한 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우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지만 실제로는... 웃기지 말라고 하십시오. 정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들입니다)


 


특수목사들은 교육목사나 협동목사, 파송 선교사 등이 대표적인 존재들입니다. 교육목사는 말 그대로 교회학교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로 특화된 사람들이고 협동목사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만 대부분 특정한 보직없이 설교만을 담당하거나 상담실이나 연구소 같은 교회의 부속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파송 선교사는 목사안수를 받고 그 교회에서 다른 나라나 지역으로 선교사로 나가는 목사를 말합니다. 요즘은 음악목사의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교회마다 찬양단 없는 교회가 없고 음악시설과 음향설비를 않한 교회가 없기 때문에 이를 지도하고 감독하는 음악목사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특수목사들은 특정한 전문사역을 담당하는 목사들입니다. 이 목사들은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교단별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 신학교와 목사 안수 시스템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이 부분도 한국개신교의 타락에 엄청난 원인을 제공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회직제라는 부분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교세가 큰 교단일수록 목사안수를 받는 것은 사실 어렵습니다. 사회처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재수 아니라 삼수 이상을 하는 사람들도 수두룩 합니다. 그만큼 목사가 된 사람들은 자부심이 장난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기 좀 그렇습니다만 국가고시에 합격한 것만큼이나 목에 힘을 주게 되지요. 이런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목사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목사는 하나님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당연히 평신도들에게서 불평이 나오겠지요.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평신도 계급, 즉 집사, 안수집사, 장로, 권사 들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오를 곳(?)을 만들어 두면 자연스럽게 목사에 대한 불평이 사그러듭니다. 꼭 목사를 하지 않아도 나름 교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거든요.



우선 집사는 서리집사와 안수집사로 나뉘어집니다. 서리집사는 간단히 말하면 매년 임명되는 집사입니다. 그리고 안수집사는 항존직(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집사입니다. 이 안수집사가 사실 성경에 나타나는 집사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서리집사는 교회에 지나치게 발을 담그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교회 다닌지 몇년이 지났는데도 변변한 호칭도 없이 교회나가기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편법적 호칭이 되겠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할까 심히 의아합니다. 명칭따위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데도 말이죠.)


 


안수집사(실제로는 집사)쯤 되면 보통 교회의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회사로 따지면 중역쯤이라고 해야 할까요? ^^;) 안수집사들은 대개 교회의 각 부서의 부장이나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활동합니다. 제직회에서도 나름 존재감있는 사람들이 되지요. 또한 개신교회 내에서는 예비장로군에 속하는 사람이 됩니다. 즉, 차기 장로는 이 안수집사들 속에서 선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안수집사로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가운데 재력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은 일정한 교육을 거쳐 장로로 임직하게 됩니다. 개신교 내에서 장로는 평신도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장로가 되면(이는 교단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 같은 경우는 장로제도가 없습니다. 이때문에 재력있는 사람들이 죄다 다른 교단으로 가버리니까 최근 들어 침례교에는 [호칭장로]라는 희안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침례교단의 헌법에는 장로가 없다보니 호칭으로라도 장로라고 불러서 그런 사람들의 이탈을 막자는 웃지못할 편법이죠.) 당회의 구성원이 됩니다.


 


당회는 장로교를 비롯한 장로제도를 도입한 모든 교단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입니다. 당회는 교단마다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만 보통 25-50명 정도의 평신도 중에서 한 명의 장로가 나오고 그 장로들이 모임을 당회라고 합니다. 목사 역시 장로의 신분으로 여기에 참여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녹스(John Knox). 스코틀랜드인이다.



보통 담임목사는 이 당회의 의장을 겸합니다.(그래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호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당회는 한 마디로 교회의 모든 부분을 관리하고 감독하고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곳입니다. 심지어는 목사의 해임 및 초빙도 결정합니다. 따라서 장로들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게다가 평생직이죠.



따라서 담임목사라 해도 그 교회를 본인이 직접 개척하여 키우지 않은한은 장로들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목사와 장로들의 파워게임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장로로 구성된 당회가 있어야 총회대표(줄여서 총대)로서 교단총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대형교회들은 총대들이 많기 때문에 그 위세가 대단하지요. 목사들이 교회를 기를 쓰고 규모를 키우려고 하는 이유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인 명성교회. 장로교다.


 


총회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싶고 총회장자리 하나 하려면 규모가 작은 교회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총회는 누가 더 자신의 추종자들을 많이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각축장이 되고 결국 여의도 정치의 축소판과도 같은 곳이 됩니다.


 


그 동안은 장로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여성도 장로가 될 수 있도록 교단헌법들이 바뀌었고(교계도 여성파워가 장난이 아닙니다 ^^;) 지금은 여성 장로도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여성은 장로보다는 권사로 많이 임직을 받게 되는데 권사들은 주로 권사회를 중심으로 일을 하는데 여자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왠만한 대형교회들 권사회는 당회만큼이나 그 권한이 큽니다.



그 이유는 권사 역시 아무나 될 수 없고 재정이나 교회에서의 인맥이 강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주로 권사들은 50대 이상의 여성들이니 보니 말로 싸워서는 절대 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권사회가 강력한 곳에서는 부목사나 전도사들 정도는 말한마디로 목을 자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권사회의 영향력은 적지 않습니다. 당회가 교회에서 외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한다면 권사회는 내적인 부분을 주로 담당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는 남자보다 여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곳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의 최고 기관인 권사회를 무시하고서는 담임목사도 목회를 제대로 못합니다.


 


이 외에도 권찰이니 감독이니 하는 직분들이 있습니다만 권찰은 성경에 있지도 않는 것이고 감독은 장로의 또 다른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자, 현재까지 살펴 본 개신교의 직분과 직제에 따른 권한(?)들을 살펴 보았는데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은 왜 한국개신교회가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지 금방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운영되고 조직된 제도가 그렇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입니다.


 


그럼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만일 성경에서도 이러한 계급주의와 권위주의가 성경의 교회관을 이루고 있었다면 저는 당연히 목사의 길을 걷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 신앙은 예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말을 잠깐 돌려서... 요즘 모 통신회사 광고에 보면 [다 그래! 라는 생각을 뒤집어라] 하는 카피가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을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다 그렇지, 교회는 원래 그래 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구조와 시스템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나쁜 것은 도려낼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이런 글을 연재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입니다.)


 


성경의 세계관, 즉 성경의 사회적 구조는 역피라미드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신구약 성경을 잘 살펴보면 금방 이해되는 이야기입니다.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최고의 권력자가 앉게 되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관의 구조라면 성경의 세계관은 최상층에 있어야 할 하나님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그들을 위해 대신 죽는 세계입니다.


 



 


존경받고 대접받아야 할 선생님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부자이자 세리로서 남을 착취했던 삭개오가 회개한 후 자신이 토색질한 것의 네배를 갚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하며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던 창녀와 세리들도 차별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성경의 세계관과 사회구조입니다.


 


신약성경인 빌레몬서를 보면 당시 도망친 노예로서 잡히면 사형에 처하게 될 오네시모를 위해 당시 교계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이 친히 그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 주인인 빌레몬에게 그를 노예에서 벗어나게 해 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예가 주인의 물건과 같던 시대에 이미 노예를 한 사람의 인격으로 인정하는 곳이 성경이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66권의 정경 가운데 한 권으로 인정해주던 곳이 교회입니다.


 


이는 신약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남의 노비로 들어가게 된 사람은 영원히 노비로 사는 것이 아니라 희년이 되면 다 해방해주고 그의 원래 소유인 땅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이런 정신이 실제로 구현된 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 천국 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실제로 구현할 교회공동체에게 누구든지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교회는 마땅이 이 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는 누가 더 높고 낮은 계급이 없는 예수님의 몸(지체)이라고 설명합니다. 몸은 눈이 있고 손이 있고 입이 있어야 하지만 눈이 더 중요하거나 입이 더 귀하다고 할 수 없듯이 모든 구성원은 동일한 가치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사장이든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오면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하고 존중해야 하며 특히 사회적인 약자들을 더욱 귀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줘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히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의무이자 또한 그들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집사->안수집사->장로(또는 권사)->부목사->담임목사 식의 계급구조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교권적인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집사는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데 방해가 될만큼 구제나 봉사하는 일이 많아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이것을 전담하고 도울 동역자를 세우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집사입니다. 즉, 집사는 교회가 해야 할 구제와 봉사를 담당하는 직분입니다.


 


그럼 장로는 무엇일까요? 디모데서와 디도서를 보면 장로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늘어나는 교세에 비해 전문적인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성경의 가르침에 정통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이제 막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신앙적으로 잘 권면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장로들입니다. 오늘날의 장로와는 완전 딴판이죠.


 



오늘날의 장로의 한 예


 


목사는 바로 장로이면서도 특별히 가르치는 일에 특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목사와 교사가 같은 문맥 속에서 언급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원어상 어원도 목사와 교사는 같습니다. 즉,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권사는 사도행전에 보면 구제, 그것도 여성들(과부들)의 구제에 특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중 참 과부는 오늘날의 권사의 어원적 모델이 되는 사람들로서 행실과 신앙에서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여성들로 여성 신도들의 신앙을 권면하고 격려하는(당시는 남녀 구분이 심했습니다.) 사람들입니다. 이 역시 오늘날의 권사들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직분들은 모두 교회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 보면 교회의 다양한 직제에 대해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분은 남에게 위세를 떨치거나 지어는 군림하고 과거 구약의 제사장들이나 왕처럼 남을 다스리는 직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고 중보해 주는 제사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이제 이런 존재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이 예수님을 통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를 베드로 사도는 "믿는 사람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현으로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도대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신적권위를 진 존재가 왜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목사도, 그걸 믿는 신자들도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개신교회는 모든 권력화되고 제도화된 직제들을 다시 성경대로 돌려야 합니다. 목사(가르치는 자), 장로(지도하는 자), 권사(권면하고 격려하는 자), 집사(구제와 봉사를 담당하는 자) 모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을 돕고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직분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라면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법칙인 성경의 정신을 따라 모든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제도와 규칙은 가장 세속적인 방법으로 운영하는 것은 실재로는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더군다나 이 직분들을 얻으려고 돈까지 갖다 바치고 직분을 받을 때 또 적게는 수백만원 많게는 수억원의 돈을 교회에 특별헌금으로 바쳐야 하는(그래서 왠만한 큰 교회에서는 재력이 없으면 절대 안수집사 이상의 직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눈치가 보여서도 감히 하려고 못하지요.) 이런 타락한 짓들을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이며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사람들을 제 멋대로 휘두르고 고통을 주면 무엇을 할 것입니까?


 


교회는 절대로 타인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본인의 자발적인 참여와 기쁨으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행복해서 교회를 다녀야 진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처럼 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세속적인 방법으로 살고 있다면 이는 말 그대로 위선이며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은 교회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현재의 왜곡되고 어그러진 교회제도를 다시 성경의 정신에 기초하여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서 교회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라"라고 말한 사도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글에는 [목사제도와 신학교 시스템]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주제도 매우 중요한 한국개신교의 갱신의 핵심적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뵙겠습니다. 오늘 주제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뵐때까지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